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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당신은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삼하 13: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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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삼하 13:30~39)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말은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진단을 마치고 말합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작년 봄쯤에만 왔어도 소망이 있었는데, 그만 암이 온 몸에 다 퍼져서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적인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너무 늦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녀교육입니다. 자녀교육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농부는 봄에 파종을 해야만 가을에 수확의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정의 현주소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정의 모습은 어떤가?’ ‘내가 좋은 부모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정말 좋은 아버지인가?’ ‘내가 정말 좋은 어머니인가?’ 아니 우리 아이들에게 누군가 “너희들은 너희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내가 대체 몇 점짜리 아빠가 될까?’. “너희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이 누구냐?” “네! 예수님 빼놓고는 우리 아빠가 제일 존경스러워요.” “우리 엄마가 제일 존경스러워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존경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한 것이 우리의 가정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몇 학년 몇 반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것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 아이들의 친한 친구 한 세 명의 이름을 대실 수 있는 분 있을까요? 그 정도 대실 수 있다면 훌륭한 부모입니다.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기쁨과 설움도 함께하는 그런 천국과 같은 가정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옥 같은 가정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어떤 가정들은 아이들을 너무 자유방임으로 키웁니다. 그저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등록금주고 끝입니다. 방임이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그건 부모가 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바른 길을 지도해 줘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가정은 너무 구속을 합니다. 10만 늦게 들어와도 30분 동안 무릎 꿇려놓고 훈계를 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치 지옥 같습니다. 그 가정은 하루 빨리 탈출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청소년이 못된 형들을 만나가지고 함께 의기투합해서 택시강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붙들려서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목사님이 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너 왜 아버지 어머니가 다 계신데 이렇게 나쁜 형들하고 어울려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느냐?” 그 아이가 하는 말이 “그 형들이 못된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보다는 친절해요. 우리 가족들보다는 내게 더 잘해줘요.” 정말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있는지를 이 시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비극적인 가정의 이야기를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이 가정은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제일 장남되는 아들이 자기 배다른 누이동생을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누이동생을 겁탈해 버렸습니다. 참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그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누이동생을 내 쫒아버렸습니다.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오빠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복수심을 불태웁니다. 그리고 그 못된 일을 한 형을 잔치자리에 초청해서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 그를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곤 아버지가 무서워서 멀리 외국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가정입니다. 이 정도 되면 흔히 콩가루 집안이라 합니다. 아버지는 졸지에 두 아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는 살해당했고, 하나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딸은 오빠에게 겁탈당하고 두문불출하고 식물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가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윗의 가정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인물이지만 가정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왕이요 훌륭한 장군이지만 자녀들과 대화가 부족했습니다. 결국 가정이 이런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우리가 어떤 부모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돈 많이 버는 큰 집에 살게 하는 부모, 맛있는 것을 사주는 부모만이 좋은 부모는 아닙니다. 한간의 초가도 그것이 오순도순 대화가 있고, 격려가 있고,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은 정말 천국 같은 가정인가? 지옥 같은 가정인가?’ 한번 물어보십시오. ‘가족끼리 만나면 서로 만날 때마다 기쁘고 즐거운가?’ 고등학생 아이들, 대학생 아이들은 아빠와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돈 달라고 할 때만 어쩔 수 없이 와서 돈 달라고 합니다. 서로 어색해서 눈을 서로 마주치지 않습니다. 눈을 마주쳐 본 적이 없습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낯설어 합니다. 남 같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마침 5월 달이었는데 담당 주일학교 선생님이 결석을 해서 대신 고1반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지도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희들은 아빠를 생각하니?” 한 아이가 픽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남자지만 피부하나는 매끈해요.” 요즘 아빠들도 얼굴을 많이 가꾸나봅니다. 한 아이는 그럽니다. “그래도 먹여 살려주니 고맙기는 하지요.” 이런 시큰둥한 반응입니다. 존경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전도사님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야 그럼 우리 여름 수련회 가서 아빠 성토대회 할까?” 그랬더니 좋다고 마구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떤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데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듭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한 대 때렸습니다. 그리고 “이 놈의 자식, 넌 내 아들도 아니야! 당장 나가버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아요?” 그러면서 짐 싸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일 년에 이렇게 집을 나가는 청소년들이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통계를 내 봤더니 가출충동을 느껴본 아이들이 남자가 93%, 여자가 87%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출한 아이들의 85%가 유흥업소에 가서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자아이들은 가서 술 배달하고 여자아이들은 가서 술 팔고 있습니다. 불행한 이야기지만 못된 어른들의 원조교제 대상의 64%가 가출한 10대 소녀들입니다. 미혼모의 40%가 10대 청소년들입니다.

  몇 일전 대구지역 청소년들의 초등학생 성폭력사태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3학년 초등학교 어린이를 5학년 오빠하고 중학생이 합세해서 성폭행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의 왜곡된 모습입니다. 우리 부모들의 성의 타락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투영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보다 놓은 비디오를 아이들이 보고 결국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실습해 본 것입니다. ‘참 우리 가정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가?’ 우리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가정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가정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교회보다 우선이 가정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가정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가정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무슨 이야기로 끝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서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로 결론을 맺습니다. 가정 이야기로 끝납니다. 구약의 마지막인 말라기도 가정이야기로 끝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 자리,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소망하면서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말라기 4장 6절에 보니까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거기에 저주가 임할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 시대를 가리켜서 ‘아버지부재의 시대’라 그럽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혼한 가정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습니다. 고아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성장하면, 성장해서도 자기를 고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느끼며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이 성장하면 여러 가지 잘못된 인격이 나타나고, 대인기피증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을 해서 그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이성을 만나면 배신감을 느끼고 복수를 하려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합니다.

  미국의 한 학자가 직업군인인 자녀들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봤답니다. 직업군인이니까 아버지가 멀리 지방에 가 있기도 하고 외국에 나가있기도 하고 해서 아버지를 잘 못 만납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 가운데 많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문제를 드러내더랍니다. 쉽게 작은 일에 분노합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기피하고,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하고, 직장을 자주 옮기는 그런 증세를 나타내더랍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때로 어떤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가 집에 안 오는 것은 자기 때문이라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도소 제소자의 70%는 아버지 없이 성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정에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실 것입니다. 엄마가 밥 먹여 주고 학원만 보내면 교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교육은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부성과 모성이 함께 결합되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할 일이 있고, 아버지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합될 때 건강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가정 심각한 문제가 바로 1500만의 자녀들이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린이의 33%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습니다. 계부, 계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참 문제입니다. 특별히 아버지들은 가정의 영적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들도 아빠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줘야합니다. 연세가 들면 들수록 가정에서 아내의 비중은 커지고 남편의 비중은 점점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교육에 치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아빠들은 그들을 훈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사랑해주고 용서해 주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제일 문제는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씨,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효자집안에 효자 나고, 충신집안에 충신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 속담에는 자녀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다윗의 범죄는 어디서 출발할까요? 자기의 범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잘 압니다. 그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자기 아내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강간죄를 또 누가 범합니까? 장남 암논이 자기여동생을 범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여자도 아니고 자기의 충성스러운 장군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암논은 접근해서는 안 되는 자기의 배다른 누이동생을 범했습니다. 똑같은 죄가 가정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적진 깊숙이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살해 했습니다. 그의 아들 압살롬은 형 암논에 복수의 칼을 갈다가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살인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죄를 숨기려고 하는 암논의 모습은 바로 자기 죄를 은폐하려고 하는 다윗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하기 전까지는 그 죄를 계속 은폐하려고만 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것을 알면서도 분노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죄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징계하던지 처벌하던지 뭔가 그는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죄가 생각나서 그는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가정을 파괴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 땅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다윗은 몇 번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우유부단했습니다. 3년 동안 어머니 고향에 가 있던 아들 압살롬을 장군 요압이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지만 다윗은 그 아들을 2년이나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기에 사랑하지만 그러나 얼굴은 보기 싫었습니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았고,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들 압살롬의 마음에 또다시 상처를 줍니다. 결국 압살롬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왕이 됩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요 뿌린 데로 거두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의 마음속에 상처를 남기지 마시십시오.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 마음속에 분노를 쌓지 말고, 그 마음속에 상처를 주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에 대해서 꾸짖을 것은 꾸짖었어야 합니다. 그 동생 다말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아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압살롬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뭔가 결정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부모들도 그렇습니다. 용서하고 사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하고 용서받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아빠가 자식들에게 잘못했으면, 잘 모르고 꾸짖었으면 사과해야 합니다. “야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딸아! 내가 모르고 그랬다. 아빠를 용서해다오.” 이것이 솔직한 아빠고 위대한 아빠입니다. 위대한 어머니는 자녀에게도 용서를 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자녀들은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겁니다. 다윗은 그것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다윗 가정의 비극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라도 자녀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매일 드리는 것이 힘들면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꼭 드리십시오. 자녀들과 약속하십시오. “우리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꼭 만나서 예배드리자.” 10분이면 족합니다. 찬송 한 장 부르고, 성경 읽고, 그리고 돌아가면서 예배순서지에 있는 내용을 읽습니다. 그리고 공동기도를 같이 하십시오. 요즘 아이들은 읽기만 해도 무슨 뜻인지 다 압니다. 굳이 설교 안 하셔도 좋습니다. 설교라면 지긋지긋할 테니까. 가정예배 드리십시오.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말없이 축복해 주십시오. 아이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니면 깨어나기 직정에 머리에 손을 얹고,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아이 하나님의 훌륭한 인물 되게 해 달라고” 축복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러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활짝 열릴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는 것처럼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일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셔야 합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통터치. 적어도 내 믿음을 우리 자녀에게 그대로 넘겨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에 보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그것이 일생을 그들을 지배하고 지켜줍니다. 여러분! 이 일을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정말 존경받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말 사랑받는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웰링턴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승리해서 그는 승리파티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습니다. 웰링턴은 자기가 자랑하는 아주 귀하게 여기는 보석이 박혀있는 담뱃갑이 있었습니다. 그 담뱃갑을 자랑하기 위해서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담뱃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참모들이 보고 “그러면 누군가 훔쳐갔군요. 이 중에 있을 겁니다. 빨리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는데 그러는 와중에 어느 한 나이 든 병사가 문을 열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노병을 의심했습니다. ‘아마 저 사람이 장군의 담뱃갑을 훔쳐가지고 도망간 모양이다.’ 그러나 장군은 좋은날이니 그 담뱃갑을 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또다시 파티에 나가려고 자기 조끼를 입으려고 하니까 그 조끼 안에 자기 보석이 박힌 담뱃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는 그 노병을 불렀습니다. “여보게! 정말 미안하네. 내가 자네를 1년 동안이나 오해했네.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왜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황급히 문 밖으로 나갔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네!” 노병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저는 장군의 초대를 받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있지만 지금도 집에서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떡과 고기를 제 옷 주머니에 넣고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부끄러워서 내놓을 수가 없어서 도망친 것입니다.” 그 병사 앞에 웰링턴 장군은 눈물 흘리면서 사과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준비한 동영상을 함께 봄으로써 오늘 설교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동영상- 버티칼 리미트)

  버티칼 리미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버지가 아주 험난한 산 암벽을 타다가 실수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세 사람의 무게를 로프가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로프를 칼로 끊어서 떨어져 나가고, 두 남매만 구조를 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자녀가 살게 되는 장면입니다. 만약 이런 자리에 있었더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아버지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가정 만들어 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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