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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 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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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막 10:13~16)

제가 이 시간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낸 재미있는 문제를 내 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 좋은 답을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성도님이 차를 몰고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고 있는데, 정류장에는 세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병세가 심각해 보이는 노인이고, 다른 한명은 전에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의사이며, 또 다른 한 명은 꿈속에서 그리던 여인이었습니다. 차에 한 사람밖에 태울 수 없다면 성도님은 누굴 선택하겠습니까? 

중병에 걸린 노인은 생명이 위태로우므로 빨리 병원에 데려 가야 합니다. 방치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한 번 스쳐가는 사람입니다. 전에 목숨을 구해준 의사는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계속 관계를 가져야 할 사람입니다. 꿈에 그리던 여인은 이번 기회에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친다면 다시는 이런 좋은 기회가 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한 명만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면접하러 200명이 왔는데 그 가운데 채용된 사람은 위의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채용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자신은 의사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며 급히 노인을 모시고 병원으로 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 정류장에 남아 꿈에 그리던 여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운전을 하고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차에서 내린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 

고정관념은 이미 익숙하고 습관화된 사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는 고정된 의식입니다. 이 고정관념은 인간 생활에 많은 유익도 있지만 때로는 발전과 창조적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족쇄와도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 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통하여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 못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쳐주시고 있습니다.

1. 아이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깨뜨려야 할 첫 번째 고정관념

하나님 나라 백성 자격, 유대인 성인, 쓸모 있는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도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도 고정관념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지금 유월절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마음 시원한 말씀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고 필요를 채움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입니다. 이 때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축복기도를 받게 하기 위해 왔습니다. 제자들은 그 아이들을 보고 어떻게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제자들의 마음이 분주하고 예수님께 달려드는 사람이 많으니까 질서를 잡기위해 짜증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까지 데려오는 것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아이들은 질서를 지킬 줄도 모르고 시끄럽게 하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런 행동은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결국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께 나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사도 청화대도 들어가려면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어린아이들은 자격 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부모의 의존자이거나 부속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한 인격자, 구원받아야 할 천국 백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에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부모의 의존자 또는 부속물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성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애들은 몰라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더 유추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수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마찬가지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 나가? 생활을 정리하고 나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을 만나기 위해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제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그랬을 것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린이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꾸짖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보고 실망과 의분을 표시하였습니다. 이미 소자 하나도 멸시하지 말라고 교훈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의 귀중성을 교훈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나오려고 할 때 제지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기회, 축복받을 기회를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매쟁이입니다. 영적 유통업자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노인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게 하는데 방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을 주님에게 데리고가서 축복을 원하는 부모처럼 진정 자녀가 사는 길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우리 주님께 자녀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켜 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나이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어떤 병일지라도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면 치유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식에게 축복해 주면 자식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데리고 나아갔을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을 예수님게 데리고 나아간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만져 주심을 바라고입니다. 여기서 만져준다는 것은 단순히 손으로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19:13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아이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모든 부모는 아이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아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체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관리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력,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야 심력이 강해지고 영력이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아이는 최고로 키우고 싶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표어인 것 같습니다. 출산율 1.3인 시대에 있어서 부모들이 자녀를 똑똑하고, 건강하며, 창의력 넘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보십시오. 얼마나 어렵게 얻은 아들입니까? 그 아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망한 것이 아닙니다. 암흑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참으로 어려운 시절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남자를 낳으면 죽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나니까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요한 을 성전에 데리고 와서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인구는 전세계 약 천 오백만 명인데 노벨 수상자의 1/3(86년까지 93/300)을 차지했습니다. 미국 재벌의 23%가 유대인이고 뉴욕 중고등학교 교사 중 50%, 미국 법조계 70만 변호사들 중 14만명(2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인구로 볼 때 3%로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월가의 돈줄을 잡고 있습니다. 

세계 저널리즘의 핵심에 있는「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를 비롯, 텔레비전의 NBC·CBS·ABC 3대 네트워크가 유대계입니다. 미국의 원자력 개발은 유대인이 독점하고 있고 NASA 과학자의 과반이 유대인입니다. 맨해튼 빌딩 주인의 40%, 전 미국 변호사의 20%, 뉴욕 의사의 과반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2000여 년 동안 갖은 학대와 고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뛰어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녀 교육에 있었다고 합니다.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자 젠센은 유대민족의 지적능력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신앙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지력, 심력, 체력 중에 심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적 부분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자아 개념, 집중력, 고난에 대한 인내력 등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2000여년 동안 나라 없이 삶을 살면서도 어려서부터 13살까지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한 의지력, 사명, 가슴에 끓는 열정을 넣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 신명기6:4-9에 근거한 쉐마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2. 아이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깨뜨려야 할 두 번째 고정관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 예수님께 나오기만이 아니라 회개하고 믿는 자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4,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용납하라는 말은 허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금하지 말라는 것은 걸림돌 역할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갖춘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천진하고 수하고 단순하고 겸손하여 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런 자는 누구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와같이 받드는 자”입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중심적인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아이와 같은”이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고정 관념 속에는 어린 아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특히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였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유법 중 직유법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시키는 방법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 같다.”라고 말할 때 내 마음이 곧 호수라는 말이 아닙니다. 호수처럼 잔잔하다. 호수처럼 넓다 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 처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대표적인 속성 천진성 순수성 단순성 겸손성 등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앞뒤 문맥을 정확히 살펴 보아야 하고 성경 전체의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진성을 가지면 들어갑니까? 순수성, 단순성, 겸손성을 가지면 천국에 들어갑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죄인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다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속성을 통하여 회개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의 말씀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십시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8장3절을 보시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 지 아니 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돌이키다(to turn)는 말을 회개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가린다고 침묵한다고 무시한다고 핑계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어른들은 마음이 굳어져 밭이 돌짝밭, 길가 밭, 가시 덤불처럼 되어 잘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잘 회개합니다. 그리고 잘 믿습니다. 

15절을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받들다란 말은 섬기고 모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데코마이”, 영어로 번역하면 “receive”입니다. 받아들이다, 취한다는 뜻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는 말씀에서 “영접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신앙은 시작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 코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조사한 한국인들의 신앙 의식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9세 미만(5.3%) 10살부터 14살까지(12%), 15세부터 19세(26%), 20세부터 24세(13%), 25세부터 29세(10.7%), 30세부터 39세(18.3%), 40세 이상(14.6%) 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윌버트 챠프만(Wilbert Chapman)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25세 이후에는 천명에 겨우 한 명,35세 이후에는 5만 명에 겨우 한 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겨우 한 명, 55세 이후에는 30만 명에 겨우 한 명,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겨우 한 명꼴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면 어린 시절에 회심을 하고 큰 일꾼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3. 아이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깨뜨려야 할 세 번째 고정관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백성들의 혜택(권한)- 주님을 이용하여 가 아니라 주님 품에 안기어, 안아주시고 안수해 주시고 축복해주심
어느 단체든 회원이 되려면 자격을 가추어야 합니다. 그 자격을 가추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회원이 되면 회원으로 권한과 혜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에게 혜택이 주어집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쫓아냈습니다. 아이들을 열등한 존재, 어른의 부속품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을 안으십니다. 안수하십니다. 축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온 백성들에게 삶의 평안을 주시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안아 주십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도구로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들은 18 세기에는 민중을 발견했고, 19C는 여자를 발견했고, 20C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18 세기에는 시민혁명으로 무시되어 왔던 백성들의 주권을 찾았습니다. 19 세기에는 여자들의 참정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20 세기에는 어린이의 인권이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문명화되고 교양화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힘없는 대중과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진정 아이들을 안아주십니다. 어떤 죄인일지라도, 아이들처럼 사람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주님께 나아가면 안아주십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돌아가서 안겨야 할 품은 하나님의 품이요 예수님의 품입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새벽 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밤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데리고 갈 곳은 예수님의 품입니다. 우리들이 안겨야 할 품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삶이라는 것이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얼마나 치열하고 힘이 듭니까? 참 안식을 누릴 품이 예수님 품입니다. 탕자가 안겨야 할 품은 아버지 품입니다. 

눅15:20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추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 품에 안겨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46:3,4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 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우리 예수님이 안수해 주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고난을 극복할 만한 용기를 주십니다. 험난한 강을 건너고 높을 산을 넘을 만한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주님 품에 안기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축복해 주십니다.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기위해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주님께 안기움 받고 주님께 안수받고 주님의 축복을 받은 다면 이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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