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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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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마 5:21~26)

마음속의 살인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있습니다. 살인은 곧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 문제 삼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살인의 개념을 더 넓힙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라가’라는 욕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여 무시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은 다른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까지도 존중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인격적인 무시는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받았던 제자중 하나인 사도 요한은 살인의 개념을 더욱더 확장합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예수님은 입으로 행동으로 표출된 것을 문제 삼았다면 사도 요한은 마음속의 살인까지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합니다. 사실 살인은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미움이 싹터서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속의 미움은 결국 표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의식중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특히 예민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살인의 싹마저도 철저히 없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살인과 폭력의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혜진이와 예슬이 유괴살인 사건으로 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그 살해 동기도 사소한 것이었고, 시신을 유린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연이어 일산에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몇 일전에는 양구에서 자기가 화난다는 이유로 공원에서 운동하고 있던 처음 보는 여학생을 마구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회가 날로 각박해지고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위험과 폭력에 노출되어 학교에 보내도 불안하고, 아파트 단지 안도 불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저 자녀들을 집안에 붙들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집안에 있으면서도 어른이 없을 때는 누가 초인종을 눌러도 전혀 인기척이 없도록 숨을 죽이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위험한 사회가 되었는가?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살인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에 이르게 된 마음 바탕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도 살인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라가’는 말은 멍청하다 우둔하다는 뜻의 욕설입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은 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에 대해서 욕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 또한 살인과 같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을 받는다, 공회에 잡힌다.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표현만 달리했을 뿐이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분노와 인격무시의 대가

살인이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노와 인격무시입니다. 분노와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가 쌓여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살인자들의 마음속에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노의 마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마음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이 분노 지수와 인격 무시 수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살인과 폭력이라는 것도 이런 문화적 정신적 바탕 위에서 나옵니다. 분노의 마음이 없는 곳에는 갈등이 덜합니다.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는 분노도 적을뿐더러 살인이라는 끔찍한 인격말살을 행하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우리 자녀교육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분노가 쌓이는 이유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쌓입니다. 부모는 바깥일로 바쁩니다. 바쁘다보니 아이들은 소외되고 컴퓨터와 TV가 그들의 부모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있고 자녀 교육에 열심을 쏟는 부모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자녀의 적성과 관심을 따라 교육하지 않습니다. 오직 학교 성적, 명문 대학 진학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은 괜찮습니다. 열심히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만 매여 있습니다. 마치 양계장에 있는 닭처럼 사육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국 사회처럼 초등학교에서 대학 진학 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처럼 마음 놓고 뛰놀아야 할 아이들이 갇혀 지내면 그 안에서 분노가 쌓입니다. 틱낫한이란 수도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화』란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화의 원인중 하나를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찾았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대부분 화난 음식들입니다. 닭고기가 대표적입니다. 사람들은 닭을 자연 상태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빨리 살찌게 하기 위해서 좁은 닭장에서 기릅니다. 닭은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흙속에서 먹이를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닭이 느끼는 화와 좌절을 여러분 짐작하시겠습니까? 또 알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낮과 밤을 조절해줍니다. 이 때문에 닭들은 더욱 화가 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부리로 서로를 쪼는 폭력성향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그 부리를 잘라 버립니다. 이처럼 분노가 그 몸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는 닭을 먹고, 계란을 먹으니 인간 몸속에 그 화가 들어온다는 내용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는 행복한 닭이 나은 행복한 계란을 먹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분노가 줄어든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광우병 논란으로 사회가 뜨겁습니다. 결국 광우병이란 것도 곡식과 여물을 먹어야할 소에게 동물 사료를 먹여 고기 맛도 좋게 하고 성장도 빠르게 하여 경제성도 높이려는 인간의 욕심에 대한 소의 분노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양계장의 닭처럼 마음 놓고 뛰놀지 못합니다. 자기가 먹어야 할 여물보다는 사회가 주는 여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분노가 쌓여가기 시작하고 이런 분노에 노출된 아이들이 폭력과 살인에 이릅니다. 

요즘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TV의 영상이나 인터넷과 게임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이런 영상 문화에 빠져 있는 것은 심리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빌 게이츠에게 아이들에게 무엇을 제일 선물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컴퓨터일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게이츠는 의외로 종이로 된 책을 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사준 백과사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지고 넘기는 것이 아이들 정서 순화에 좋고 머리 발달에도 좋습니다.

자녀들이 영상이라는 것에 일찍 노출되어서 안 됩니다. 미국 소아과학회에서는 만 2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TV 시청을 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영상이라는 것이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느리게 흘러가는데 영상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갑니까? 영상에 오래 노출되면 아이들이 짜증이 많아집니다. 현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빨리 빨리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들의 문제 중 가장 많은 경우가 TV에 과다 노출되었을 때 발생했습니다.  

영재 교육으로 유명한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글자나 숫자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치원 졸업할 때쯤 1-6까지의 숫자와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글자만 가르칩니다. 그들은 왜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 걸까? 이스라엘의 교육학자들은 읽기, 쓰기는 좀 더 나중에 배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중요한 시기에 글자를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꽃'이라는 글자를 한 자 더 아는 것 보다 진짜 꽃을 하나라도 더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또 영상과 인터넷 안에서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이고 죽습니까? 아이들은 자라면서 영상을 통해 총과 칼과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데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어린이는 6학년이 될 때까지, 텔레비전을 통해 8,000건의 살인을 목격한다고 합니다. 또한 텔레비전을 통해 십만 건의 폭력을 목격한다고 합니다. 인터넷과 게임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총이나 칼 폭력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들이 게임의 대부분입니다. 가끔 조그만 구멍가게 같은 데서 아이들이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는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심겨질까 염려가 됩니다. 이런 교육들을 받고 나면 그 안에 폭력성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 집에서는 아이들 장난감을 사줄 때 총이나 칼 등 폭력적인 것들은 아예 사주지 않습니다. TV도 안방으로 옮겼습니다. 이런 폭력성의 환경에서 자라게 한 이후에 우리 아이들이 잔인해지고 심한 경우 살인을 저질렀을 때 어른들은 죄 없다 할 수 있을까요? 

또 아이들 앞에서 자꾸 ‘돈 돈’ 말하지 마십시오. 조그만 단지 안에서도 임대 아파트니 일반 아파트니 하고 나누고, 주택과 아파트를 나누고, 강남과 비강남을 나누면서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길 바라십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도 없고 사람을 무시하는 존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마음 속에 살인의 마음을 심어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회가 자꾸 경제 경제만 강조하니까 아이들도 돈이 최고인줄 알고 돈을 위해서면 사람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물질 중심과 성장과 경쟁 중심의 사고가 그 안에서 살인의 죄를 낳고 있는지 모릅니다.

경쟁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남보다 앞서야 하고 1등만 알아줍니다. 그러니 모두 기를 쓰고 1등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옆 사람은 경쟁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밟고 넘어가야 할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경쟁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우수한 사람, 뒤쳐진 사람은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자살이라는 것도 이런 열등감에서 나옵니다. 이런 열등감이 다른 사람을 향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이런 환경에서 길러놓고 무정하다느니 배려심이 없다고 하느니 말할 수 있을까요? 어른들의 죄가 심히 크다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경쟁과 성적 위주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심히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형제 화목을 가르치십니다. 형제가 화목한 것이 더 소중하다. 형제 화목은 예배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인격무시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인격 무시는 살인죄와 같습니다. ‘라가’라 욕하고 미련하다고 할 때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다 존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을 향하여 욕을 하고 미련하다 바보 멍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에 대한 모독입니다.     

어떤 랍비의 이야기입니다. 이 랍비가 길을 가다가 대단히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랍비를 보고 인사를 했지만 랍비는 그 인사를 받지 않고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너는 라가다. 추한 놈같으니라고!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너처럼 징그러운 놈들이냐?”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물어보시오. 그분이 만든 내가 왜 이렇게 징그러운지를.” 결국 이 랍비는 하나님을 욕한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무시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미워하거나 가볍게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인격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형성이 되면 그때부터 그 사회는 폭력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말 한 마디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우리 사회가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개탄하는 어른들을 보면 제 자신이 참을 수가 없어집니다. 한 인격을 무시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로 이런 폭력성을 만들어냈는데 말입니다.

예배보다 형제 화목이 먼저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힘써야 할 것이 형제 화목입니다. 서로 화목하면 살인을 피할 수 있습니다. 형제와의 화목은 심지어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님께서는 가르칩니다.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드렸던 예배의 핵심입니다. 그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 예물을 드리던 것을 중지하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만일 지금 우리 머릿속에서 다른 사람과 불화한 일이 있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나가 먼저 화목하고 난 연후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우리 생활과 신앙이 분리된 예배에 대한 주님의 경고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배 잘 드리는 사람보다는 세상에서 화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평일에는 온갖 불의를 저지르고 사람들로부터 원망 들을만한 일들만 하다가 주일에 경건한 채 하며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의 전통을 잇는 말씀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대단한 외침입니다. 돌에 맞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것이 하나님의 전이 아니라고 외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어지는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렘7:5-7) 그들이 생활 속에서 행실이 바르지 않고, 이웃들에게 불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와 약자를 괴롭히며,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실이 동반되지 않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외침이었습니다. 삶에서는 우리의 불법 때문에 이웃이 고통하는 소리가 가득한데 교회 생활만 열심히 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이것은 죄를 가지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8,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만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어지는 30절에는 더 두려운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죄를 짓고서 성만찬에 참여하다 병이 들고 죽음에 이르렀던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죄중에 가장 중요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형제화목을 어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2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느냐” 이들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편당을 짓고 자기들 끼리끼리 성만찬을 먹는 불화의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는 성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아침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사실은 죄를 정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성만찬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이유도 우리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형제와 불화하고 죄가 있고서는 하나님의 성만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라도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급히 사화하라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화해할 때입니다. 화해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넘겨지고 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은 아직 정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가고 나서야 후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지금은 급히 사과하고 화해해야 할 때입니다.

9월 11일은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진 날입니다. 비행기가 충돌한 후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쳤던 짧은 순간 그 안에 갇혔던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거듭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딸도 정말 사랑합니다. 그 애 좀 잘 돌 봐줘요.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합니다.”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모두 동일하게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후회하거나 유언처럼 남길 말도 이 사랑과 화목의 말일 것입니다. “누구에게 잘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미안해” “서로 화목하게 지내렴” “여보 사랑했어요” 이런 말들입니다. 마지막 순간을 주식 때문에, 돈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급히 화해하라고 말씀합니다. 예배 드리고 화해해도 되지 않아요? 아닙니다. 주님은 바로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형제의 화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자신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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