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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름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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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마 25:1~13)

I. 신앙도착증 환자들

극의 제목도 저자도 잊어버렸습니다만 언젠가 심리극을 한토막을 본적이 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세상적으로 모자랄 것 없고 남 부러울 것이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남의 결혼생활을 훔쳐봄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성도착증 환자였습니다. 극은 이 주인공이 남의 결혼 생활을 이곳 저곳에서 훔쳐 보다가 당하는 봉변 그리고 그의 사회적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인격적 손상과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이 땅에는 성도착증 환자가 아니라 신앙도착증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 열심을 봄으로 자신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큰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의 심리 밑바닥에 이런 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큰 교회에 출석만 하면 자신의 신앙도 커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내가, 남편이, 부모가, 자식이, 가족이 잘 믿으니 부스러기라도 떨어지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주변에는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들,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종교인 혹은 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II. 본문 : 마태복음 종말론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이름하여 마태복음의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의 말씀들은 어느 때에 읽어 봐도 두렵고 무서운 말씀이며 현실에 안주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 이야기는 우리들의 거울이며, 미련한 다섯 처녀 이야기는 우리들의 경종입니다. 그러므로 이따금 신앙에 회의가 생기거나 신앙생활이 나태해질 때는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여러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구석구석에서 구원받았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가운데서 50% 정도의 구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 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열 처녀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세상이 복잡하게 보여도 마지막에는 두가지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 영원한 축복을 누릴 사람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사람으로 분명하게 갈라지고 맙니다. 한쪽에는 영원한 큰 기쁨이 있고 한쪽에는 영원한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갈림길 가운데 어느쪽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자동차는 제걸음을 가고 있습니까? 행여 기름이 떨어지지나 않았습니까?

본문을 보십시다.
옛날 고대 팔레스틴의 혼례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씩 그 축제가 계속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은 대낮이 아니라 보통 저녁이나 한밤중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첫째, 낮이 너무 더워서 그랬고 둘째, 히브리 개념으로는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랑은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오랜 시간을 즐기다가 한밤중쯤 되어 신부의 집으로 행진을 합니다. 한편, 신부는 친구들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마침내 신랑이 도착하게 되면, 신부는 자기의 친구들인 들러리들과 함께 나가 신랑을 영접하여 등불을 켜고 이제 신랑의 집으로 떠나는 연등행렬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처럼 신랑의 행차가 의외로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밤은 깊어가고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돋기 시작하면 악성 소문이 번지기 시작합니다. 입빠른 신부 들러리 중 한 사람이 혹시 바람 맞은 게 아니냐, 중간에 샌 모양이라고. 또 한사람은 신부에게 오늘밤은 신랑이 안 올 것 같으니 그냥 자자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 둘 잠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열심을 내지만 그 연조가 늘어가며 게으름 나태가 생깁니다. 종말은 무슨 종말! 2000년 전부터 종말 아니던가? 어느새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불신자들과 꼭 같아집니다. 그들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그들 하기 싫어하는 것 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시험거리라도 있으면 뒤로 넘어져 잠에 빠져듭니다. 

본문의 경우에는 열 명의 처녀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정적을 깨고 한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기름을 예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잔치집에 들어가고 기름을 예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뒤늦게 시장에 가서 기름을 사 가지고 기름을 채워 잔치집에 도착하지만, 이미 잔치집의 문은 닫힌 후였습니다. 슬피 울며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닫힌 문안에서 들려온 신랑의 소리는 "내가 당신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오"라는 소리뿐입니다. 이들은 초청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때로 혼인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여기 신랑은 보통 신랑이 아니라 예수 신랑입니다. 예수 신랑 놓친 것은 천국을 놓치고 영생을 놓친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입니다. 


III. 준비하라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천국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며 분위기를 살릴 치장을 하는가 하면 얼굴을 손질하고 몸치장을 하는 등 갖가지의 준비를 다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특별히 신랑을 맞을 처녀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손에 등불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준비해서 하나씩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춤을 추며 즐기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등은 자기가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옷을 잘 입고 화장을 잘 하며 목욕재개 하였다 하더라도 이 등불을 준비하지 못하면 잔치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무엇보다도 등불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다같이 등잔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옷도 다 잘 입었고 얼굴과 머리단장도 곱게 했습니다. 필요한 등잔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게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엔 관심이 많고 참으로 중요한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등불을 밝힘으로 소모되는 기름, 계속 채워져야 하는 기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등은 들었는데 그 속에 정작 필요한 기름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소홀히 여기는데 있습니다. 맛난 음식보다 중요한 것은 입맛입니다. 좋은 침대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숙면입니다. 피아노보다 중요한 것은 연주하는 실력이지요. 그래서 미련한 자들은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자는 기름까지 준비하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문제를 가중시킨 것은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니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이미 피곤해진 몸들인지라 졸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은 지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재미있게도 "다 졸며 잘새"하였습니다. 미련한 처녀도 졸고 슬기로운 처녀도 똑같이 졸았다는 것입니다. 졸수 있지요. 그러나 이 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준비를 갖추고 졸았으나 미련한 처녀는 아직 준비할 것이 남아있는데도 졸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치면 졸 수도 있고 잠들 수도 있겠지만 갖추어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졸고 잤으니 이들의 행위는 미련한 것이며 그러기에 버림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미련한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의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등잔에만 기름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여분으로 또 하나의 기름통을 준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우리가 천국을 준비하되, 예수님 오실 것을 준비하되, 마지막 종말을 준비하되, 준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는 학생이 1점 차이로 불합격이 된다 하더라도 그는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합격한 사람만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불합격한 사람도 준비를 하였을 것이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때까지 턱걸이 신앙생활만 하시겠습니까? 은혜도, 기도도, 충성도, 헌신도, 봉사도, 셀 생활도 제발 흘러 넘치는 사람이 되십시요. 당신 이웃이 당신 때문에 먹고 살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십시요.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IV. 기름이 무엇입니까?

여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기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많은 경우 우리는 이 기름을 성령님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용시킬 경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점점 없어질 수가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기름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없어진 것처럼 성령이 있다가 없어질 수가 있습니까? 인격이신 성령님은 한 번 우리안에 오시면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계십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서 기름만 나오면 그것을 다 성령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경우에 성령이 불로 상징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만보면 다 성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불만 번쩍이면 성령이 오셨다고 생각하는 노이로제에 걸린 그리스도인도 종종있습니다. 기름이 등장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령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포괄적으로 이 말씀을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든, 믿음이든, 주님을 만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들을 기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 삶의 내용을 본문은 기름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우리 안에 갖추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 신앙의 내용이 결핍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기름 떨어진 줄이나 알고 사십니까?

유대인들은 제사만 지내면 성민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주일날 예배당에만 나오면 구원이 보증되는 것 아니지요. 헬라인들은 철학,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몇 토막 지식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 아니지요. 로마인들은 법과 도덕, 질서를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인들이 정신수양 정도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지요. 오늘 현대판 유대인들, 헬라인들, 로마인들이 교회안에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우리 가운데 종교적인 형식과 겉치레는 되어 있는데 정작있어야 할 기름이 없는 사람, 신앙의 내용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까?

형식적인 기도는 있으나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사람 아니계십니까?
형식적인 예배출석은 있으나 주님만의 만남이 없는 사람 아니계십니까?
형식적인 헌신은 있으나 성령의 충만함을 모르는 사람 아니계십니까?
좋은 설교를 구별할줄 알지만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사람 아니계십니까?
바로 이런 사람이 얼굴 단장은 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입니다.
소위 종교인입니다. 

바울은 어린 교역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중에 말세의 한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신앙의 껍데기는 있으나 신앙의 알맹이가 없는 사람들, 형식은 있으나 그 내용을 담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오는 시대가 종말의 시대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면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파워, 능력이 없는 신앙의 내용이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발 껍데기 등잔에 관심을 너무 갖지 말고 기름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신부의 자격은 얼굴이 예뻐야 하는 것도, 학벌이 좋아야 하는 것도, S라인 몸매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등불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V. 빌어 쓸 수 없다

본문이 말하는 또 다른 핵심이 있습니다. 
기름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 등불을 들고 나가게 됩니다. 이때에 기름이 채워진 등의 불빛은 환하게 켜졌지만 이미 기름이 타버리고 없는 등에는 그 불빛이 꺼져가고 있으니 그때사 당황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너희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밤도 깊었지만 기름이 없는 처녀들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기에 기름을 사러갑니다. 그런데 그렇게하여 기름을 사왔더니 잔치집 문은 굳게 닫혔고 "주여, 주여" 부르며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문, 천국의 문은 지금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그래서 종말은 항상 종말입니다. 언제나 종말일 수 있습니다. 

진작 깨닫고 알았어야 했습니다. 무엇을? ① 기름 떨어진 줄 알아야 합니다.
② 기름은 빌려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내 믿음은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부인을 둔 믿음 없는 남편되는 이들이 잘하는 말이 "아내 치마자락 잡고 천당 갈 것이요"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당가는 티켓은 하나 가지고 둘은 못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각자 자기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내 신앙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일 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영혼의 문제, 나의 생명의 문제, 진리와 나와의 문제. 나의 구원의 문제. 이 모두는 누구의 것에서도 빌어올 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각자의 문제요, 나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 개인적인 깨달음, 개인적인 신앙,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만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무디 신학교 학장인 죠지 스위팅(George Sweeting) 박사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참 음미해야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이 있지 손자가 없다." 깨달아지십니까?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아버지가 믿었기 때문에 저절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믿었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녀도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형식입니다. 어느 교회를 몇 년 다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구원을 보증해 주지 못합니다. 당신의 직분이 구원 보증서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 당신이 개인적으로 이 신앙의 내용 앞에 진지하게 부딪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이 사실을 확인하셨습니까? 신앙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주님으로 고백한 사실이 없이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어머니 때문에, 아니 우리 식구들이 교회에 나가는 고로, 나도 심심하면 한 달에 한 번쯤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누가 언제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그렇게 하던가요?

생활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신 사실이 있습니까?
당신은 거듭난 사실이 있습니까?
진정 예수님이 당신의 그리스도요 당신의 주인이십니까?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입니다.


VI. 문 닫힐 날이 온다

여러분 본문의 경고에 귀를 기울입니다. "신랑이 오므로 준비된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여기서 문이 닫힌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이 닫히기 전에 졸음이 오기 전에, 인생의 황혼기가 되기 전에, 건강하고 눈이 밝으며 총명이 흐려지지 않았을 때에 준비할 것을 준비하고 일할 것을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세르만테스는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말려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알고 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철" 혹은 "때"라고도 번역합니다. 즉, 때를 알고 살아라. 철을 알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장거리 여행을 위해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막 진입했는데 자동차 기름의 양을 알리는 게이지가 땅에 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당황하고 곤혹을 치루었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등에 식은 땀이 흐릅니다.

여러분, 기름통을 점검하고 인생의 차를 몰아 인생 고속도로에 진입하셨습니까? 기름 떨어진 줄이나 알고 살아가십니까? 기름 떨어졌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기름 떨어진 줄도 모르고 달려만 가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사에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1. 은혜 받을 때 은혜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눈물없이는 예배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지요. 엎드려 아버지 부르면 하나님이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감격을 가지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가 있습니다. 눈물없이 드리지 못했던 예배, 감격이 없이 드려질 수 없었던 예배, 은혜 받을 때 은혜받고 쌓아두어야 신앙의 굴곡이 있을 때 고난, 환란 실패 속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회개의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회개를 요청할 때에 회개의 문, 구원의 문이 열려있을 때에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회개해야지, 땅을 쳐도 회개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종말 문득 다가올 수 있습니다. 

3. 축복의 때, 복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복이 올지 모르니 늘 준비된 심령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4. 봉사의 때가 있습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낼 때, 일을 맡기실 때가 있습니다. 기회 지나고 나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내 등불이 밝히 타올라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신랑의 행렬, 하객의 행렬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기름이란 원래 이웃을 밝히는 것입니다. 밤길을 걸어갈 때에 손전등을 든 사람이 가운데 섭니다. 앞 사람을 밝혀 주고 따라갑니다. 뒤에 따라 가는 사람은 성큼성큼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릴때 마을에 놀러 나가 봅니다. 깊은 밤중까지 놀다가 집에 가려고 하니 마을은 칠흑같이 어둡기만 합니다. 한걸음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집안 어른들이 나무를 뒤적거려서 관솔불을 붙여줍니다. 관솔불에 불을 조그많게 밝혀 주면 그걸 가운데 아이가 들고 도랑을 건너갑니다. 앞에 가는 아이들은 뒤에서 불을 밝혀주니 길이 보이지요, 뒤에선 아이도 따라만 가면 됩니다. 정작 관솔불을 들고 섰는 아이는 오히려 불편합니다. 

내가 충만해야 되는 이유는 내가 은혜 받아야 되는 이유는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충만해야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불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내 가족들에게 천국가는 불을 밝히기 위해서 내가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름이 모자라 심지가 타들어 가는 등불을 상상해 보십시요. 연기로 이웃 사람들의 눈을 따갑게 합니다. 불빛 대신 연기 피우는 교인들이 가끔 있지요. 원래 기둥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성(古城)을 본적 있습니까? 다 무너지고 난 다음에 기둥만 서 있으면 흉물이지요. 내 등불이 밝아야 하는 다른 사람을 밝히기 위해서, 내가 기둥이 되어야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내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내 자식들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서, 내 남편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서 내가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기둥되는 것입니다. 


VII. 기름 떨어진 줄도 모르고

우리나라에서 제자 훈련으로 유명한 큰 교회 어느 목사님이 성령운동으로 유명한 큰 교회 어느 목사님을 찾아갔더랍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성령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이 가르치는 분이시며 성령을 말씀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런 분들에겐 영적침체가 없습니까? 그런데 왜 저는 이렇게 영적인 침체가 자주 찾아옵니까? 우리교회 지도자들은 뜨겁게 일하다가도 자주 슬럼프에 빠집니까? 충성하는 성도들이 왜 저렇게 당황스럽게 영적인 무서운 슬럼프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때마다 저는 내 영혼에 불이 꺼져 가는 것만 같아서 우리 성도들의 가슴에 성령의 불이 식어지는 것만 같아서 교회 모닥불조차 꺼져 가는 것만 같아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후후 불어대는 주부와 같은 심정으로 목회를 하곤 합니다. 목사님은 그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자기의 허상을 여지없이 드러내놓고 성령운동 하시는 분들의 허와 실을 잘 알고 있던 A 목사님은 틀림없이 J 목사님도 A 목사님의 손을 덮석 붙들고는 '목사님 그렇습니까? 그게 우리의 아픔 아니겠습니까?' 고백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J 목사님께서는 "아, 목사님, 그렇습니까? 나는 정반대입니다. 내 가슴에 불이 너무 뜨거워서, 우리교회 지도자들의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내가 하는 일은 불에 타지 말라고 찬물을 길어다가 그들의 머리에 붓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바로 서 일하도록 말씀의 기준만 가르치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대화가 되겠습니까? 대화가 단절되고 마는 것이지요. 

자신의 영적인 침체를 고백하는 목사님. 그리고 내 가슴은 너무 뜨거워서 찬물을 끼얹는 것이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고백하는 목사님. 두 분 목사님 중에 어느 목사님이 더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분 다 훌륭하신 어른이시요, 두 분 다 귀하신 고백입니다. 

내 영혼에 기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잔이 비어 있습니다. 고백할 줄 아는 것도, 내가 지금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다. 무서운 영적인 침체가 나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내 영혼의, 내 성도들의, 내 지도자들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후후 부는 주부의 자세도 귀하지요. 주여 나를 살려 주십시오. 이 몸부림은 얼마나 아름다운 몸부림입니까? 기름 떨어진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병이지요, 아픈줄 모르는 게 무서운 병이지요. 한편, 내 잔은 차고 넘칩니다. 내 심령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찬물이라도 끼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신만만한 신앙생활을 고백하는 이 영혼도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이겠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 요청하십시다. 
하나님 제 영혼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감격이 식어졌습니다. 주님 전에 찾아 올 때마다 찬송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던 가슴이 미어 터질 것같은 감격으로 예배드렸던 감격의 예배가 제게서 떠났습니다.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진정한 충성이 식어졌습니다. 헌신이 식어졌습니다. 주님 찾아오시옵소서. 충만케 하시옵소서. 하늘문을 여시옵소서. 내 잔이 비었나이다. 내 잔에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묻습니다.
여러분은 기름 떨어진 줄이나 알고 살아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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