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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모세와 두 아들 (출 2:16~22, 4:24~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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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두 아들 (출 2:16~22, 4:24~26, 18:1~6)

  몇 년 전인가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식 결혼문제가 나왔습니다.
  기사 아저씨는 얼른 손자를 보고 싶은데 자기 아들이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도통 결혼할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내가 내 차를 팔아서라도 결혼비용을 마련해 줄 테니까 제발 좀 빨리 결혼해라.”고 사정을 하니까, ‘결혼은 해도 애는 낳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라면 하겠다고 그 아들이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기사 아저씨는 “야, 내가 손자도 못 볼 거라면 뭣 하러 내 차까지 팔아서 널 장가보내야 한다는 말이냐?”하고 분통을 터뜨리셨고, 물론 그 교섭(?)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중에는 바로 그처럼 자식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짐’만 되고 부부 두 사람만이 즐기는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세 드신 부모들은 “자식을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미 겪어보아서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식을 키우는 가운데 부모도 배우게 된다.’는 뜻입니다.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생명의 기쁨을 알게 되고, 양육의 희생을 겪음으로써 자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비로소 깨닫게 되고, 자식과의 갈등을 극복해 나가면서 스스로의 인생관도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특히 우리 신자 부모에게 있어서는 한층 더 그러합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과정을 통하여 그 부모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더욱 새로워지고 차원 높게 발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 부부 역시 그런 부모였습니다.
  모세로 말하자면 명실 공히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도 최고의 선지자였고 특히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민족의 대 지도자였지만, 그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아버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모세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도 비로소 ‘영적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부모가 자녀를 키움으로써 배우고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녀의 출생’을 통하여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기 2장 16절부터 22절에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애굽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자라던 모세는 한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는 사건 때문에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미디안” 지역의 한 우물가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곳의 “제사장” 집안의 “일곱 딸”들을 도와주게 된 일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 집에 정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디안 제사장”이라 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그저 ‘미디안 족이 섬기던 신에 대한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본문에 그 제사장의 이름이 “르우엘”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그의 ‘사적인 이름’이며,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이드로’라는 이름은 제사장으로서의 ‘공식 직함’이라고 짐작됩니다. 

  하여튼 모세로서는 “그와 동거하게” 된 것, 즉 그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살게 된 것은 정말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애굽 바깥에서 아무 연고도 없이 그저 도망만 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가 이제는 안전한 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얻어 결혼을 하고 가정까지 꾸며 정착하게 되었으니 도망자 신세였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복’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아직까지는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아내 십보라를 통하여 낳게 된 첫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은 것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직역하자면 ‘그곳에 추방됨’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대로 모세 자신의 처한 현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말입니다.
  즉 모세는 자기 첫 아들의 이름을 순전히 자기 신세타령이나 다름없는 말로 지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김 나그네 인생’ 혹은 ‘박 이방의 떠돌이’ 따위로 자기 장남의 이름을 지어 놓았으니, 그런 이상한 이름으로 평생 불리게 될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참 어이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둘째를 낳게 될 때에 가서는 모세도 좀 달라지는데, 나중에 출애굽기 18장 4절에 보면 그 둘째 아들의 이름이 “엘리에셀”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역하자면 ‘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이며 좀 더 풀어서 해석하자면 출애굽기 18장 4하반절에 이어지는 대로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영적 성장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첫 아들 낳을 때까지는 그저 자신이 이방 땅에서 떠돌이가 된 것을 한탄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처럼 신세타령만 하지 않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신 까닭에 지금 타국의 객과 같은 생활이나마 안전하게 살게 되었음을 비로소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어 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새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래서 그 새빨간 핏덩이가 태어나서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는 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출생을 생각해 보게 되고 내게도 이런 생명의 날이 시작되게 해 주셨던 ‘생명의 주권자’를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뿌듯한 일입니까?
  그러니 둘째, 셋째 자녀들을 계속 낳게 되면서 ‘다산(多産)’이라는 것이 결코 부모에게 ‘부담’이나 ‘짐’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가정의 기업’이 증가되고 ‘부모의 기쁨’이 더 증폭되는 것임을 당장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을 매일 새롭게 실감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에 그 자녀가 병들어 아파하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죄의 병에 걸려 신음하는 것을 얼마나 불쌍히 여겨 주시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그 자녀가 부모에게 웃음과 기쁨을 줄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의 본분이 그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보면서도 “어이구, 내가 저것 때문에 못 살지.”라고 오히려 자신의 인생이나 한탄하는 부모들은 그 얼마나 한심한 자들이겠습니까?
  생명의 주께서 주시는 최고 귀중한 선물을 계속 낳고 기르게 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의 인생에 쏟아 부어 주고 계시는 ‘많은 은혜’들을 더 깊이 깨닫고 더욱 뜨겁게 감사드릴 줄 아는 부모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의 신앙교육’을 통하여 부모 자신들 사이의 ‘영적 화합’도 더욱 공고해집니다. 

  출애굽기 4장 18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에 “18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25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미디안에서 40년이 지난 후 모세는 드디어 “애굽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출애굽의 사명 수행을 위해 떠나게 됩니다.
  20절에 나오는 대로 그때 그는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즉 온 가족을 함께 데리고 애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길의 숙소” 즉 당시 장거리 여행자들이 쉬어 가던 길가의 임시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모세를 직접 죽이려 하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세가 갑자기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중병에 걸린 것을 뜻할 수도 있는데, 하여튼 조금 전에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고 그를 파송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일견 이해되기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십보라는 하나님께서 왜 갑자기 자기 남편을 죽이려 하시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 상황에서 즉시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벤” 것을 보아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여기서 “차돌”이란 ‘돌칼’을 의미하는 것이며 ‘양피를 벤’ 것은 바로 할례를 행했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이란 말이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첫 아들 ‘게르솜’은 이미 할례를 받은 것 같고 지금 이 “길의 숙소”에서 ‘즉석 할례’를 받은 아들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려 떠나고 있는 지도자가 자기 아들에게조차 할례를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됨을 상징하는 핵심 요소인 까닭에 부모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모세 부부는 그것을 어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종교와 문화가 다른 미디안 출신인 십보라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며, 모세와 그녀의 부부 사이는 그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겪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니까 그제야 십보라도 겁이 덜컥 나서 그렇게 반대하던 자기 아들의 할례를 당장 자기 손으로 할례를 행한 후에 그 아들의 “양피를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면서”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당신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 아들의 피를 흘리는 불쾌한 일을 끝내 하게 만드는 사람이군요.’라는 원망의 뜻인지, 아니면 ‘당신은 이 피 때문에 다시 내 남편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라는 인정의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피 남편”이라는 표현이 “할례를 인함”이었음은 분명하고, 바로 이 십보라가 행한 할례 때문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주신” 즉 살려 주신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 부부 사이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영적인 불화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도 틀림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녀를 신앙적으로 바로 키우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부모 역시 영적으로 더 자라고 더욱 가깝게 결합됩니다.
  부부라는 것은 사실상 전혀 ‘남남’이었던 사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그 과정에 크든지 작든지 갈등이 생기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인데, 바로 자녀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말에 자기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건전하고 알찬 교육의 기회를 주려고 새소식반에 보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서 결국 그 부모도 교회에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일이 우리 교회에서는 흔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즉 자녀교육으로 시작했던 일이 나중에는 ‘온 집이 구원을 얻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에 혹 탈선하지 않도록 늘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생활과 SFC 모임에 꾸준히 참석시키면 그 자녀가 오히려 부모의 신앙생활에서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들을 깨우쳐 주게 됩니다.
  즉 자식을 바로 키우려 하다 보면 절로 부모 자신도 배우고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를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게 하면 그 아이는 물론 ‘언약의 자녀’로서 평생신앙교육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지만, 그 부모도 유아세례식 때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바를 따라서 자녀를 말씀과 기도와 경건의 본으로 양육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신 역시 신앙생활에 절로 진보하게 되는 일석이조의 은혜가 가정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에 'for kids' sake'(자녀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혼하려던 부부가 ‘자식 생각 때문에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같이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신자 부부에게는 자녀 때문에라도 같이 살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자녀를 신앙적으로 바로 키우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부모 역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복이 따라오게 되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자녀 양육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부모는 더욱 충성스러운 ‘교회의 일군’이 됩니다. 

  출애굽기 18장 1절 이하 6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2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3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함이요 4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5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6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뒤 홍해를 건너 시내산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즉 그 출애굽 사건을 듣고서 “모세가 돌려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시점까지는 모세가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출애굽기 4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처음에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떠날 때에는 분명히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떠났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언제인지 모세는 자기 가족들을 다시 이드로의 집으로 돌려보내었던 것입니다.

  그 시기는 아마도 바로 앞에서 보았던 ‘길의 숙소에서의 할례 사건’ 직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4장 이후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는 모세의 가족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때 십보라가 자기 고집을 꺾고 나머지 아들에게도 할례를 주기는 했지만, 모세로서는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추론은 여기 본문 2절에서 사용된 ‘돌려보내다’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이혼하다’라는 뜻의 단어로 쓰이게 된 사실을 통해서도 또 한 번 뒷받침됩니다.
  즉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앞에 두고 아직까지는 신앙적으로 부족한 아내를 데리고 가기가 꺼려졌던 까닭에 갑자기 그녀와 아들들을 함께 처갓집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래저래 여전히 꺼림칙한 것이 남아 있었던 모세 부부의 사이는 그의 장인 이드로가 직접 십보라와 모세의 아들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옴으로써 새로운 길이 트이게 됩니다.
  이드로는 지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수행하고 있는 모세가 그 사명 때문에 가족을 따로 살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라고 했고, 5절에서도 다시 한 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모세에게 이르니”라고 반복했으며, 바로 이어지는 6절에서 또 한 번 더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모세는 장인과 함께 자기 가족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때부터는 그들과 함께 광야행군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었습니다.

  ‘대의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가족에 연연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치가들을 역사상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하지만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제대로 해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할 수 있음이 역사의 정설입니다.
  그것은 교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며 바로 성경에서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딤전 3:5)라고 일깨워 주시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돌본다.’는 것이 ‘교회에 충성한다.’는 것과 절대로 상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식 교육시키는 것이 바빠서 교회 일 못한다.’는 변명은 전혀 합당치 않는 말이며 ‘집안 살림 꾸려 나가기 벅차서 헌금생활 못한다.’는 핑계 역시 결코 성립되지 않는 말인 것입니다.
  ‘남편 뒷바라지하기도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심방장, 구역장까지 맡아서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거절하는 것은, 자기 가족 뒷바라지를 진짜로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남편과 아내’만이 곧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직분자’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만 눈을 바로 뜨고 보아도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는 장로님들의 가정을 보시면 다 그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잘 성장하고 사회에서도 성공하고 축복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녀 정서교육을 핑계로 부모까지도 같이 예배를 빼먹으면서 주일에 가족여행을 떠나고 자녀 대학교 등록금을 핑계 삼아 부모가 십일조까지 떼어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식 때문에 진짜로 죽어나는 부모’요 ‘부모 때문에 같이 죽어가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늘 아버지를 마치 ‘자기 가정의 파괴범’이나 되는 듯이 여기는, 악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녀 양육’과 ‘교회 충성’은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둘 다 잘하게 되는 것인 줄을 깨닫고,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부모의 의무와 책임을 잘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는’ 특권 역시 더 잘 수행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잠언 23장 24절 말씀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을 때에는 분명히 그것이 아비와 어미에게 ‘즐거움’이 되기 위하여 주신 것이지 무슨 ‘짐’이 되라고 주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시편 127편 3절부터 5절에서도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보다 더 좋은 ‘기업,’ 자식보다 더 기쁜 ‘상급’이 무엇이 될 수 있으며 자식보다 더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화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녀를 통해서 배울 줄 모르는 부모, 자식을 키우는 가운데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부모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체험할 줄 모르는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이란 결국 ‘부모 단물만 다 빨아먹고 떠나는’ 애물단지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피와 살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자녀들을 보면서 ‘생명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고, 이들을 말씀과 기도로써 신앙교육을 잘 시키는 가운데 같이 ‘영적 성장’을 누리고, 자기 아들딸들을 책임 있게 양육할 줄 아는 까닭에 더 능력 있는 ‘교회의 일군’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자녀들을 인하여 부모된 자신도 더욱 큰 축복을 누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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