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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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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 (요 4:19~26)

들어가는 말 

제 이름을 조혁래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콜로라도에서 자라서 Ft. Worth에 있는 Southwestern 침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현재 교회 개척자임과 동시에 목사인데, 콜로라도에 있는 특별히 덴버 대학 공동체와 연관된 Global Impact Church라고 하는 교회의 목사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저를 기억하게 하신다면 우리와 그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약 3년 전에 하나님은 저에게 필생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며, 그 계시는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 교훈을 받은 후에 저는 변화되었으며 우리 교회도 변화되었는데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서론 

성경을 펴서 요한복음 4장 19-26절을 찾으십시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 안에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런 순서입니다. 여러분이 절대로 그 책 이름을 따라 아이들 이름을 짓는 이름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면, 예를 들어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서, 여러분은 너무 많이 넘어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9-26절입니다. 

  이 구절을 고찰하기 전에, 그 배경이 되는 이전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려면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길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대부분의 정상적인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은 “혼혈”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완전한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야만 했던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10절에 보면 그 신적인 만남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매우 독특한 사람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할 것은 당시 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은 남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인에게 말을 걸고 가르치는 것은 규준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이야기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게 그리고 여인에게 신학을 가르친 것이며, 또한 이 여인은 그 자신의 공동체로부터도 경원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6절에는 이 여인은 제 6시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시간에 따르면 제 1시가 오전 6시이기 때문에 이 시간은 정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든지 아니면 땅거미가 질 때 물을 길으러 왔지 가장 뜨거운 시간에 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러한 여행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집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거기에 우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우물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발견하는 사실은 이 여인은 나쁜 평판 때문에 그녀의 마을에서 추방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혼은 묵인해 줄 수 있지만 축하해 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은 이혼할 수 있었고 공동체로 부터 용인될 수 있었지만 세 번째 이혼은 결코 묵인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이혼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평판이 안 좋았고 그 이유로 그 마을에서는 그녀를 추방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는 것만 아니라 추방당한 족속 중의 추방당한 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을 위해 예수가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야만 하겠다고 말한 것이고, 또 바로 이 사람에게 예수는 그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기꺼이 계시한 것입니다. 

  이 배경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제가 사흘을 꼬박 이야기 할 수 있었지만 여러분 중에서 내일 일하러 가실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서 줄여서 10시간만 말하려고 합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하고, 그녀는 어떻게 그가 그녀에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하는지 묻습니다. 그 때 예수는 생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그녀는 빈정거리는 투로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올 것을 요구하자 그녀는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고, 예수는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설교 본문과 만납니다. 우리 같이 19-26절을 읽읍시다. 

본론 

19-20절에서 그녀는 예수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는 질문을 하는데, 그것이 큰 논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제를 바꾸려고 이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20절에서 그 논쟁은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안이라고 믿었습니다. 혹시 거기에서 할 수 없으면 회당 안에서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살렘을 향하여 머리를 향하고 기도하는 공통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가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들만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의 통치 시대 후에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었을 때 지어진 것입니다. 반역이 있었고 두 왕국이 생겨났으며, 남쪽 왕국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을 포함하고 있었고 북쪽 왕국은 성전이 없었습니다. 북왕국은 하나님을 예배할 장소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 27:11-26에 언급된 것 때문에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이 통일 되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차별을 당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큰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21절에 있는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여인이여 내 말을 믿으라. 헬라어 pisteue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pisteuw는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에게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주려하는 그 대답을 신뢰하라. 모든 그녀의 신뢰를 주님의 대답, 주님의 응답에 두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명령과 똑 같은 것입니다. 너는, 내가 지금 주려고 하는 그 대답을 신뢰하라! 이 예배에 관한 가르침은 진리이고 우리가 그것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신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21절에,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것은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기에서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를 이해합니까? 그는 예배에서 장소의 개념을 빼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성전이나 회당에 가야 한다고 믿은 것인데, 예수님은 “예배는 장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서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예배라는 단어의 의미가 오용되어 왔습니다. 제가 진리를 말씀드리죠. 어쩌다가 이름을 교회라고 갖게 된 건물에 걸어 들온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언제 일어설지, 앉을지를 알고 언제 양손들 들지 혹은 언제 머리를 숙일지를 안다고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다리가 교회 건물에 들여 논다는 것이 당신에게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 지겨운 설교를 들으면서 꾹 참고 앉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장소는 예배와 아무 관련성이 없습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사실 엎드리다 혹은 구부려 입맞춤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가 예수의 발에 입맞춤한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극도의 조롱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알았는데 유다는 그 입맞춤을 통해서 예수를 조롱하려고 한 것입니다. 

  22절에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예수는 이것을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기 위해 이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메시아가 다윗 가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23절,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이것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장소가 예배의 요소가 아닐 때가 온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제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가르쳐 드리죠. 이것은 여러분이 차안에서, 혹은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혹은 산에서 혹은 호수에서도 예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 건물에 오실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입니까? 히브리서에 우리는 신자들의 모임을 폐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일 때 우리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교회 건물에 제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고 있고 바로 지금이 “참 예배자”를 위한 시간입니다. 거짓 예배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참 예배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를 구별한 것은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제게 하나님을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가 있다고 제게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게 그 대답이 있습니다. “참 예배자는 아버지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것이다.” 당신이 참 예배자라면 이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합니까?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제 생각에는 이것을 이해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을 수단으로 해서.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당신이 예수를 영접할 때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갖지 않고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인 인도함을 받아 기도하고(로마서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이것이 “성령으로”라는 구절을 이해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참 영이 바로 우리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인격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남을 이야기 하고,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죽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교회 건물에 들어올 때 것 치례를 하고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을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것을 아십니다. 참 예배자는 예배자가 된 것처럼 연극할 수 없습니다. 참 예배자는 하나의 예배자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당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당신의 됨됨이, 당신의 본질,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 예배자가 되는 요소입니다. 당신 자신의 됨됨이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예배자는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으로) 그리고 진리로. “진리로”라는 어구를 보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요한복음 14:6과 관련하여 진리를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여기서 이런 의미로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진실을 정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개념입니다. 

제가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준비됐나요?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행한 것, 여러분이 본 것, 인터넷에서 어디 SITE에 접속한 것,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이 말한 것을 달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갈 때 정직한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서 이런 말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서 당신께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때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진실로”는 성경의 진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준비됐나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모이는 사람들은 우리들만이 아닙니다. 몰몬교도들도 있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있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모이는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가 무엇으로 구별됩니까? 바로 진리입니다. 저는 담대히 말합니다. 비록 다른 종교에 좋은 가르침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진실이 아닙니다. 성경만이 진리이고,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을 여기서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성경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참 예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의 주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서 사랑하라.” 여기서 뜻이라는 말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우리가 좋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싸움은 우리가 말하고 싶은 대로 성서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로 성경이 우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23절이 계속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저는 여러분에게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는 여러 분야에서 전형적인 남성입니다. 저는 축구, 야구를 좋아하고, 체조 혹은 그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스포츠든지 상당히 좋아합니다. 저는 고기를 좋아하고 고속의 운전을 좋아합니다. 또 저는 리모콘 광입니다. 저는 한 손에 리모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텔레비전 시청을 즐길 수 없습니다. 저는 채널을 돌릴 때나 텔레비전을 끌 때 리모콘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제 아내가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고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우리가 다른 보자고 하면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리모콘이 어디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면 저는 그 장소를 뒤 엎어서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저는 리모콘이 있는 곳을 좋아합니다. 오르파 윈프리는 안 좋아합니다. 저는 리모콘을 발견하기 전에는 오프라 윈프리를 고문할 것입니다. 저는 쉽게 저의 손가락을 움직여 채널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리모콘을 찾을 수도 있는데 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리모콘을 찾으려고 양손과 두 무릎을 사용하여 모든 물건들을 뒤엎듯이, 23절에서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려고 같은 일을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는데 대한 많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주시하고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해준 것이 언제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성경적이지만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영시시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예배할 때” 예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할 의무가 있다는 것도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스타일”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유입니다. 음악도 그 자체가 예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예배 스타일로 예배할 수 없고 이러한 설교 스타일오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음악과 어떤 스타일이 당신이 예배하는 능력을 결정한다면, 문제는 “예배 스타일”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인정하는 것은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스타일이 있고 제가 즐겨 듣는 설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어떤 “스타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면,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점검 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참 예배와 예배 스타일을 분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동체 예배는 당신과 저와 그와 그녀가 개인적으로 예배할 때 발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같이 할 때 이 시간이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공동체 예배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이러한 스타일로 같이하고 그것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한다고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노래하고 설교하는 동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배의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의 수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때 이러한 논쟁과 예배 스타일에 대한 주장은 말이 핵심 사항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론 

저는 두 절을 읽음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25-26절을 읽읍시다. 그 여자는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26절을 읽읍시다. 헬라오는 사실 “너에게 말하는 자가 바로 나다”라는 말입니다. 21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믿으라 그리고 내게 주는 대답을 믿으라.” 왜요? 바로 내가 말하는 자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헬라어로 egw eimi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그에게 돌을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이 사용한 바로 그 문구입니다. 왜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시작하거나 계속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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