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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과 악의 기준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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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기준 (막 3:1~6)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과거에 해 본적이 없는 설교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약간 빈약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에게는 많은 속성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무소부재 하시다는 말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런 식으로.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를 물어보면 거기에 대해서는 약간 막연합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서 책을 읽어봤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는 한 줄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알 줄로 전제하고 설명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하나님에게 적용해서 이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십계명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둑질 하지도 않으시고 살인하지도 않으시고 간음하지도 않고 거짓증거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또 하나님께 부모님이 있어서 부모님을 공경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적용하는 십계명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이냐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요구하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거룩해지는지도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사람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관건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알듯한데 아직도 막연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기숙사의 한 방에서 네 명이 같이 살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거실 벽에 수영복을 입은 여자 모델 사진을 붙여놨습니다. 당연히 제 동의를 구하지 않고 붙인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 신이 나서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님이 제 기숙사 방을 찾아와서 그분이 그 포스터가 붙어있는 벽 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시더라고요. 민망해서. 불편하니까. 그러니 제 입장은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저도 당연히 안 쳐다보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분은 신학생이기 때문에 쳐다볼 수가 없고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쳐다볼 수 없고 그러나 여전히 그 포스터는 거기에 붙어있고.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거룩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안보는 척 하는 것입니까, 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껏 보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해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포스터를 붙인 룸메이트를 죄악시 하는 것입니다. ‘저 놈이 나쁜 놈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 친구를 죄악시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의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없이 갑론을박을 합니다. 인간은 의롭지 못하면서 무엇이 옳으냐는 문제를 놓고 의논하고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에요. 우리가 옳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옳으냐를 놓고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툽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전쟁도 불사합니다, 옳고 그른 문제를 놓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믿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의 오시는 것을 고대하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놓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핵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아주 싫어하든지. 무관심한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도 아마 이런 것을 가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 중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계명을 절대적으로 여겼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은 일에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4절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이 어디야 있느냐 했을 때 예수님이 그 궁극적인 기준을 제시하시는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여기에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작부분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기준과 인간의 거룩함의 기준이 일치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의 기준과 인간의 거룩함의 기준이 일치할 수 있는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 구원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요, 그것이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그 일에 동참해서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우리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보면 예수님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지만 병자를 고쳐주시는 일을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의롭고 거룩하신 것이고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방해하고 반대함으로써 완악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예수님도 노하실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람이 노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악한 것을 보고도 노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노하셨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지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람의 병든 것을 근심하시고 또 악의 권세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근심하신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의로운 진노를 느끼게 하고 거기에서 그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을 수 있는 능력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에서 이 영적인 능력이 나와서 거기에서 악을 대적할 수 있고 악에 붙들려 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평소에 이런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아무런 하나님의 능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사건이 요한복음 5장에 기록돼 있는데 거기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느냐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껏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행위와 예수님의 행위의 일치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껏 일하시니’ 그 말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병자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 일을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일치할 수 있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하는 일이 일치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냐?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고 또 용서하고 죄에 붙들려 있는 자를 구원하고 인간을 살리는 일,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이 일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함의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종교적인 위선, 형식, 무위도식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고 돕는 일은 하지 않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윤리, 규칙만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인 위선이 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지 이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뱀처럼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나 안 어기나 지켜보고 있다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니까 그때부터 예수님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이 이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지요.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그때부터 우리를 지켜봅니다. 저 사람이 성경대로 사나, 어떻게 사나 지켜보고 있다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저 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저렇네!’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그렇게 하느냐면 안 그렇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으면서 누가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부터 저 사람이 지키나 안 지키나 지켜보고 있다가 안 지키는 부분을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후예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왜곡된 면입니다. 옳고 그름을 주장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참 좋아하는데 본인들은 그렇다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고 용서하고 이런 것은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시고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냥 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욕하든 상관없어요. 예수님은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당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해를 입었지요.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예수님이 손해를 입으실 줄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하실 일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느냐? 첫째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안 함으로 거룩해지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심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인간의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거룩함도 무엇을 안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규칙을 다 지키면서 살더라도, 가서는 안되는 곳에 안 가고, 해서는 안되는 것 안 하고, 봐서는 안되는 것 안보고, 규칙을 다 지키더라도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고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그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규칙을 지키면서 살지는 모르지만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룩함을 행하기 위하여 사람이 꼭 예수님을 믿어야 되느냐, 예수님을 믿어야만 그런 거룩함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느냐,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기의 재산으로 많은 좋은 일을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안 믿더라도 그 행위를 통해서 얼마든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아주 중요한 질문이지요. 사람이 꼭 예수님을 믿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이냐 하는 질문과 같은 종류의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이 없이 선한 일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 없이는 그 선한 길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남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ㅁ’ 자가 빠지고 나를 위해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내 명예와 내 의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는데 결국은 그들도 살인자가 되고 거짓말쟁이가 됐어요. 
  
 모택동은 인민을 위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수천만 명의 인민을 죽였습니다. 스탈린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고, 과거 대통령들이 새로 출범할 때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외쳤지만 전의 대통령보다 더 부패한 대통령, 더 부패한 정권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의로운 길에 머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헬라어로 ‘하마티아’인데 과녁에 맞히기 위해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의를 행하기 위해서 하긴 하는데 거기에 못 미치는 것, 그게 죄입니다. 
  
  처음에는 적어도 과녁을 맞히기 위해서 쏘기라도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예 과녁을 맞히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인간의 죄의 현실입니다. 사람은 이런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선을 행하려다가 못 미쳤을 때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핀볼 머신과 같습니다. 핀볼 머신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용수철로 공을 ‘팡’ 쏘면 공이 핑, 핑,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결국은 아래로 또르르 굴러 내려오지요. 그러면 공을 못 내려오게 하려고 탕탕 다시 튀게 하지만 결국은 내려오지 않습니까. 인생은 핀볼과도 같아서 사람이 신이 나서 여기저기 이것저것 부딪혀 보지만 결국은 모든 공은 아래로 또르르 굴러 내려오게 돼 있는데 굴러오는 그곳이 무엇이냐면 내 힘으로는 안되겠다 라는 것입니다. I need help - 나 혼자는 못하겠다, 안된다. 
 
  모든 사람이 다 신나게 여기저기 핑핑 핑핑 하다가 돌아오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에요.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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