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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뿌리가 보전하는 가지 (호 9:16~17, 롬 1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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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보전하는 가지 (호 9:16~17, 롬 11:17~18)

  리더스 다이제스트 5월호에는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는 여섯 가지 요인들’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첫째는 일류대학 출신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연줄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부와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넷째는 좋은 가문이어야 합니다. 다섯째는 잘 생긴 외모를 가져야 합니다. 여섯째는 과장하고 포장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성공하는 요인이 능력, 경쟁력, 자기계발이 중요한 요소인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그것보다 자신의 뿌리가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성골 혹은 진골을 따지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가문 출신인가 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가늠합니다. 우리의 뿌리 찾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성공의 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리와 더불어 가지가 든든해야 뿌리도 돋보이게 됩니다. 옛말에 “부자는 3대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부자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됩니다. 가지가 부실하면 뿌리도 얼마 못 가고 뽑힙니다.

  ‘용비어천가’에는 -“불휘 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뮐새, 새미 기픈 믈은 가말에 아니 그츨새”라고 합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가 부실하면 잔바람에도 나무는 흔들리고 조금만 바람에 세게 불어도 나무는 부러집니다.

  민들레는 초롱꽃 목 국화과의 풀입니다. 그 뿌리가 땅속 깊이 박히는 것이 민들레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민들레는 짓밟혀도 잘 죽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고 잘 죽지 않으므로 민들레는 그 씨앗을 멀리 날려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성을 얘기할 때 민들레와 같다고 합니다. 민들레의 씨는 바람에 날려 멀리 퍼져갑니다. 민들레의 뿌리는 땅 위의 풀보다 3배 이상 깁니다. 반면에 달맞이꽃의 경우는 땅 위의 풀이 뿌리의 5배 이상이나 깁니다. 민들레는 뿌리가 길고 잘 박힌 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은총입니다. 자연과 영성의 세계는 상통하는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뿌리 덕에 나무도 풀도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나무의 가지는 해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뿌리는 물이 있는 곳으로 뻗어갑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의 선인장 뿌리는 얼마나 길게 뻗어나가는지 어떤 것들은 100미터 이상도 있다고 합니다. 이 뿌리의 끝을 ‘악마의 발톱’이라 하여 신경통에 좋은 약재로 쓰인다고 합니다.

  모세는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유기감’(sense of rejection)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신적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면서 동시에 유모인 어머니가 히브리인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일러 주었을 때 엄청난 어릴 때의 심리적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낳았을 때에 게르솜이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22에 보면 게르솜이라는 아들의 이름의 뜻이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뿌리 없음(rootlessness)을 한탄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만나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에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바로 앞에 갔을 때는 모세가 거의 한 것 같습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것입니다.

  뿌리는 나무의 생명입니다.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잘려나가고, 줄기가 꺾이고, 밑둥만 남아도 뿌리만 있으면 살고 다시 싹이 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아무리 무성해도 뿌리가 잘려나가면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골로새서 2:7에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뿌리를 든든하게 하는 것이 좋은 믿음으로 자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가지가 든든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잘 보전하는 가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뿌리를 견고히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지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뿌리가 자랑거리이지 가지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가지는 뿌리 때문에 무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무엇이 있습니까? 자랑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되고 장애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돈이나, 명예나, 젊음이나, 건강이나, 미모나, 지식,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인생만사가 일장춘몽이라 하지 않습니까? 한낱 봄날의 꿈과 같은 것입니다. 자랑하려고 보면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지혜나 용맹이나 부가 다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도둑이요 지나치면 사기꾼입니다. 그래서 자랑은 그 자체가 사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랑하다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자랑하던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다윗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힘센 것을 자랑하던 삼손은 그 힘 때문에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빠지고 비참한 죽음을 맞보게 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자랑하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재물을 자랑하던 부자는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목숨을 거두어가셨습니다. 인간이 자랑할 만한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플리니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비둘기들은 자랑삼아 높이 날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른 나머지 매의 먹이 되고 만다.’ 자랑은 그 자체가 몰락이고 허무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17에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가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뿌리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16살 때 학교에서 ‘모임과 대화에서 지켜야 할 언행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110개의 좌우명을 배웠는데 그 중의 하나를 30년 후에 벌어진 독립전쟁 때에 오만한 영국 군주와 장군을 대면했을 때 분명히 떠올렸던 법칙입니다. 그것은 바로 ‘공작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54번째 법칙입니다. 오만과 자만심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워싱턴과 그의 오합지졸 혁명군은 오만에 빠져 있던 영국군을 공격하기가 너무 쉬웠습니다. 오만의 달콤한 미끼를 최대한 이용한 것입니다.

  ‘마피아’란 말은 아름다움이나 자랑을 뜻하는 시칠리아 말입니다. 그들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폭력, 살인, 불법, 공포 등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아름답지만 자랑할 말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4:16에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중세교회에서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목록이 작성되었는데 교만이 첫 번째 죄였습니다. 교만 외에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등이 치명적인 죄들이었습니다. 자랑과 오만은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쓸데 없는 자랑은 패배의 지름길입니다.

  고린도전서 9:16에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합니다. 왜 자랑할 것 없습니까? 복음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 됨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밖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째, 뿌리가 접붙임을 받은 가지를 보전합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가지가 뿌리를 보전합니까? 아닙니다. 뿌리가 가지를 보전합니다. 지난 주간의 어느 신문에는 스웨덴 달라르나 산악지대에서 유럽 가정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하는 가문비나무가 하나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이 나무의 나이는 9,000살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 처음 발견된 이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로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탄소연대측정 결과, 최소 8,000-9,500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문비나무의 줄기 부분의 수명은 600년 정도입니다. 그러나 뿌리를 통해 9,000년 간 생명을 유지한 것입니다. 하나의 줄기가 죽자마자 새로운 줄기가 생겨 생명을 유지해 왔습니다.

  뿌리가 없다거나 뿌리가 말랐다거나 뿌리가 썩었다거나 하면 나무나, 잎이나, 줄기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뿌리만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가지가 생기고, 잎이 피고, 열매를 열게 합니다.

  지난 번 우리나라 동해안 양양군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나니 완전히 폐허처럼 아무 것도 없던 산에 다시 새 삯이 나고 나무가 푸르게 자랍니다. 10여 년 전에는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산불이 났습니다. 산이 다 타고 폐허와 같았지만 뿌리가 있으면 다시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어나가고, 잎이 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살아 있는 뿌리는 가지를 보전하는 법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줄기와 가지와 잎이 견실할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인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뿌리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견고한 뿌리를 잘 붙잡아야 합니다.

  찬송가의 가사를 보세요.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이 찬송은 부를 때마다 힘이 납니다. 견고한 뿌리인 주님 때문에 든든합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가지가 보전 받습니다. 견고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 가지인 우리의 삶이 견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훌륭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데리고 올까요? 믿음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올까요, 아니면 성품과 인격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올까요?” 그 때 하나님은 “인격과 성품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믿음은 내가 직접 주겠다.”고 하셨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본인 뿌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세상에 뿌리를 둔 사람도 착한 일도 하고, 예배도 하고, 교회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뿌리가 세상이니까 뿌리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3:6에는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뿌리가 없으면 마르고 다시 돌아갑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사람들이 다 세상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섬기다가 세상으로 빠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뿌리를 둔 사람도 악하게 살기도 하고, 교회를 핍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뿌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바울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같은 분들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뿌리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하는 도중에 신도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 내내 그는 졸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 도중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은 다 일어나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다시 목사님은 “악마 편에 있는 자는 일어나 보세요”라고 하자 술에 취한 사람은 “일어나”란 말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당황했을 때 그는 “목사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목사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님과 제가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열세인 것 같군요”(We're in a hopeless minority)라고 하더랍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목사는 분명히 하나님 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외로워지면 너를 지탱해주는 그 튼튼한 토대로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뿌리가 든든하면 가지는 보전됩니다. 우리의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가지인 우리의 행동의 가지는 보전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소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땅을,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눈을 떠보니 그들은 땅을,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땅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땅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진 그들은 성경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합니까? 지금 그들은 얼마나 큰 혜택을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영국연방인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어 하나만 가지고도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입니다. 뿌리입니다.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뿌리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쓴 뿌리는 쓴 열매를 맺습니다. 나의 쓴 뿌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를 해롭게 하며 멸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도 보세요. 가인은 불평과 불만과 시기가 그의 쓴 뿌리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질투심과 자만심이 쓴 뿌리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그의 초기의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금전에 대한 탐욕과 주님께 대한 의심이 쓴 뿌리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팔고 자살하는 비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쓴 뿌리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나아가서 사회와의 관계까지도 다 망치게 만들고 맙니다.

결론 

  욥은 아무이 재물이 많아도 재물이 그의 뿌리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건강했지만 그의 건강이 그의 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들 일곱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그의 삶의 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물론 그의 삶의 뿌리가 아닙니다. 욥은 그의 믿음이 그 삶의 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재물을 다 잘라도 그의 믿음은 견고하였습니다. 그의 자녀를 다 잘라도 믿음은 견고하였습니다. 그의 건강을 잘라도 그의 믿음은 견고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믿음이 그의 삶의 뿌리였습니다.

  나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나의 가문입니까? 나의 지식입니까? 나의 재물입니까? 나의 명예입니까? 아니면 나의 신앙입니까? 신앙 외에 그 어떤 것도 뿌리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잘 보전하기 위하여 뿌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뿌리가 좋아야 합니다. 뿌리가 달아야 합니다.

  좋은 뿌리가 보전하는 좋은 가지 같은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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