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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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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0~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 박해 지수가 높은 한 나라에 교우 한 가정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제게는 기독교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국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는 처음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몇 년 전 한 선교사님의 선교보고 때 받은 충격이 생각납니다. 이슬람과 라마 불교의 강력한 진이 형성되어 있는 중국 청해성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였습니다. 선교 보고 중에 복음의 문이 꽉 막힌 그 지역에서 몇 년 째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선교사님 혼자서 새벽 기도를 하며 지내시는 답답함을 말씀히시면서 이제는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자기 몸이 갈갈이 찢겨서. 그 살조각 하나 하나로 인하여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가지 허락해 주신다면. 순교를 하되 가족 모두 한꺼번에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만 죽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겪을 어려움이 너무 크겠기에 함께 순교하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원한다고 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선교사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만 너무 부끄러워서 울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맞아 본 적이 없었지만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작년 한해 동안 회교권 및 비 기독교국가에서 16만5천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순교의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기독교 핍박 시대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 많은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 인간관계의 어려움, 환경적인 답답함 등이 있었지만 인신 구속이나 고문, 순교와 같은 어려움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하고 감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 보고를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내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되기에 이정도 시련만 주시는 것이구나.’ 같은 시대에 같은 주의 종이면서 저 선교사님과 나는 어떻게 믿음이 이렇게 다른가?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은 두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와 하나님께로 가셔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하려고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알지 못하고 당하면 감당을 하지 못할 믿음이니까 미리 그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께로 가겠고. 너희들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요 16:6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이해가 안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7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이 무슨 엉뚱한 말씀이십니까? 아니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야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도 되지 않아요? 바다에 풍랑이 일때도 예수님께서 같이 계셨으니까 풍랑이 잔잔하게 되었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예수님이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었는데 예수님이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이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실 때 오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함께 계신 것과 같으며, 더 큰 역사도 행하실 것이기에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과 성령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훨씬 더 유익하고 더 큰 일을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은 너희가 두려워하지만 성령님께서 오시면 너희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16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7절-18절)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오셔야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성령님께서 임하셔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냥 제자들에게 내가 미리 너희들에게 그 말을 한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오히려 너무 기뻤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난 다음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님이 와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신 것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큰 복입니다. 어떤 핍박과 환란이 와도 내가 정말 가야 될 길이라면 성령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데 기쁨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환란 중에도 기쁨을 얻게 됩니다.

20절 “...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21절-22절에서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였습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 분명히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때는 남편도 미워 죽겠다고 할 정도로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모가 고통스러워할 때 산모 주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중환자실 분위기 입니까? 아닙니다. 산모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마음에 아기를 기다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요! 좀 참아요! 이제 곧 애기가 나올 거예요!” 분명히 산모는 지금 죽겠다고 하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기를 낳고 나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산모도 아기를 안는 순간, 해산의 모든 고통을 다 잊고 아기를 기쁨으로 안습니다. 아기를 받아들고는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임마누엘’의 확신이 생깁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핍박을 당하는 일이 혹 있어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런 기쁨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여러분 중에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자신에게 임할까봐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될까?’ 상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변할 것입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오십니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나면 누구나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말은 관념적으로 믿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투정도 하고 원망도 하고 조건도 달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거야!’ 아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만나고는 기절초풍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두려웠던 게 자기 입술로 함부로 말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빛 가운데 만나고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조금만 체험해도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2002년 서울 월드컵 축구 때, 온 국민이 한 달 동안 꿈같은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혼자 방 안에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인사도 안하고 지내던 이웃 주민들이 같이 모이고. 어른들도 시청앞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 6,7시간을 기다려 축구 시합 중계를 보지 않았습니까? 젊은이들은 열정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길거리 광장에서 밤새도록 대한민국을 외쳤고. 그들이 밤늦도록 돌아다녀도 모두들 웃으며 지켜보았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정말 전 국민이 하나되는 행복감과 자존감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월드컵 축구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을 체험하면 어떻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순천 반란 사건'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공산당에 의하여 처형되는 끔찍한 일을 겪었습니다. 애양원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이 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부흥회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 장례식 때 열 가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의 혈통 중에, 순교자 자식이 나왔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둘째는, 수많은 성도 중에서 하필이면 이 보배들을... 하잘 것 없는 우리 집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셋째는, 3남 3녀 중 가장 늠름하고 아름답고 잘난 장남과 차남을 하나님 앞으로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넷째는, 한 아들 순교하기도 어려운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다섯째는, 예수를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인데, (즉 병석에 누워 한평생을 마치는 것도 복인데.)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는 그런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섯째는, 저들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일곱 번째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그 원수를... 내 아들로 삼을 수 있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덟 번째는,내 아들들 순교 열매로 하여...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출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아홉 번째는, 이같은 역경 속에서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깊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열 번째는,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경험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이 아무에게나 주신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을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 이미 성령님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위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전도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그 전도사님이 간증을 하였는데,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입대하였는데 군 생활 중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죄 중에 빠져 아주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제대하면서 목회자거 되는 길을 포기하였다고 했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선배 목사님이 전도사로 일해 달라는 제안이 왔는데, 차마 왜 전도사 일을 못하는지 밝힐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냥 주저하다가 교회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내적인 괴로움과 계속되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깨끗이 그만 두겠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 없이 지내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깨달았으면 되었다.’ 
  그 말씀을 듣고 펑펑 울었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씻겨주시고 다시 세워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마음에 너무나 분명한 답이 왔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기만 한다면 어떤 길이든 상관없습니다. 큰 교회에서 사역하든지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든지, 어떤 어려운 길이라도 주님과 동행하기만 한다면 저는 너무 기쁩니다.” 이 기쁨이 전도사님의 사역을 훌륭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넘칩니다.  

20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2절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4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야할 길을 가게 하시고, 또 기쁨으로 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세상 기쁨만 구하느라, 가야 할 길을 못가는 것도 문제이고 가야 할 길을 가되 죽지 못해 가는 것도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정말 복을 받는 길을 가면서도 슬퍼하며 사고 괴로워하며 가고 답답해 하면서 가고 갈등하면서 가면 그것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가면서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면 신앙 생활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 건축비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걱정스런 전망을 보고 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주님,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오직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에 어느 장로님 한 분과 성령충만한 중에 대화하면서 건축비 문제에 대하여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건축비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일을 통해서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룰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도 부담이 되지 않고 너무 마음이 기쁜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에 그렇게 무거운 마음이 싹 바뀌었어요.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생각해보니 지난 주일에는 회계 장부만 보면서 대화하였고, 토요일에는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면서 대화하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지  만 우리에게 부디치는 수많은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죽을 것 같고, 도무지 해결의 길이 없는 것 같은 순간도 옵니다. 그 때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교인들을 보니까 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얼굴이 우중충한 것입니다. 찬송도 기도도 힘이 없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바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에베소교회에는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학식도 많고 성경도 잘 알아서 잘 가르쳤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하여는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능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십자가 복음과 성령님에 대하여 설교하고 교인들을 붙들고 간절히 안수 기도를 했을 때 모두 성령을 받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능력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형편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정말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장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큰 근심거리가 생긴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집 안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게 됩니다. 가족들이 말이 없어지고 자녀들도 눈치를 보게 됩니다. 중학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다 집에 들어오는데,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어머니가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아들이 현관에서 얼어붙듯 멈칫 섰습니다. 그 순간 아들의 마음에 번개처럼 떠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그 날이 이 아들에게 있어서는 생전 처음 하나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영적인 눈이 뜨인 날이었답니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는 처음이었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좀 도와주세요!”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생전 처음 기도하면서 울었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나니 마음에 걱정이 사라지더랍니다. 방에서 나오니 집에 드리워진 무거운 먹구름이 걷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엄마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아들 표정이 달라지니 사업은 망했으나 망한 집 같지 않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가장이 힘을 얻고 나니 사업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복을 받은 것은 그 아들이 믿음 안에서 훌륭히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자신이 언제 하나님을 만났는가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기쁨은 사람이 몸부림치고 땀 흘려서 얻어지는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성령의 사람이란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을 놓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습니다. 그 나무가 포도를 맺은 것을 보고 그 나무가 포도나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쁨이 일어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잔치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고민하던 주인에게 기쁨이 넘치게 됐습니다. 불안하던 신랑 신부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믿고 맡겼던 어머니 마리아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모든 하객들도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 결과가 기쁨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심령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여러분, 다 실패해도 실패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으로 찬양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님께 기쁨을 구하십시오.
(24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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