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과 계시 (요 14:10, 막 9:23, 롬 1:17, 히 11:6)

  • 잡초 잡초
  • 247
  • 0

첨부 1


신앙과 계시 (요 14:10, 막 9:23, 롬 1:17, 히 11:6)

일반적으로 신앙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앙은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어 마음에 이르게 하고 약속을 철저히 지켜서 믿음을 굳게 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의 뜻을 따르는 일에 몸과 마음 그리고 힘을 다한 신앙을 말함인 것이다. 한 마디로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이란 말은 종교적 용어로서 성격이 한층 뚜렷함을 알게 한다. 

한편 신앙과 지식, 양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확신, 또는 불확실성은 그 둘의 속성으로 단정될 수 있다. 성서는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그 최고의 인격화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생명으로 자신을 계시 하셨으며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려 질 수 있다는 신약의 선언에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 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라 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절대 필요한 요소이기에 이것 없이는 종교적 체험이 나타날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정의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할 일이 없으며’(막9;23)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신앙으로만 가능하고’(롬1;17, 5;1, 갈2;16등)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신앙의 행태에 대하여 지적해야 할 당위적인 잘못된 신앙관을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할 것은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는 점이며 인간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이나 업적이라 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함에 이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과학은 사실을 취급하고 철학은 추리하며 신학은 사실 아닌 것들을 고집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확실성은 오직 사실에서 발견 되어져야 하고 그 밖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많은 것들이 사실도 아니며 증명할 수 있는 표준도 아닌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은 사실로 믿음에서 사는 삶이다. 모든 결정과 약속은 신앙의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실로 인간의 삶의 생활은 완전히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올바른 신앙을 확인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이념이 아니며 어떤 교리를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어떤 지성적인 전제에 대한 복종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신앙은 이성 혹은 과학 그 어느 것의 대용품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삶의 편의적이고 실용적인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욕구충족으로의 대용품은 더욱 아니다. 신앙의 핵심은 경험이나 경험에서 결과 되는 행위이다. 신앙은 경험을 의미하고 신뢰하며 보다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행태의 행위는 실재의 새로운 사람의 양심과의 결부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삶의 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헌신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와 인간 사이에 있는 적극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은 정신, 혹은 심정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모든 기능과 함께 전 인격을 요구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또는 인간을 통하여 일하면서 인간을 초월한 실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와 경험에 대한 거의 초월적으로 우주적인 증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자라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이름이며 신학은 이것을 설명하고 증거 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신앙은 맹목적이 아니다. 신앙은 분명히 그 목적이 확실하다. 신앙은 어떤 새 진리, 새 통찰력, 새 비전의 경험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성이야 말로 맹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출발점, 범주, 혹은 전제를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 그 자체대로 버려두면 의심하게 되고 회의에 빠지며 그 자체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시발점이 될 뿐만 아니라 이성에 대한 지속적인 안내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의 새로운 빛으로 말미암아 사실에 관한 새 전망을 얻고 거기서부터 이성은 필요한 지침이 된다. 신앙은 우리에게 새 통찰력과 이해를 부여해 주는 참된 관계이다. 신앙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향이다. 신앙은 기적이나 황홀경의 환상을 찾지 않으며 이성을 버려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신앙은 우리가 알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아니 되게 한 다’ 는 전제 된 믿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무엇인가?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의 자신의 본성, 힘, 질서, 사랑, 의, 영광 등을 보여 주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일반 계시’와 ‘특수 계시’로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이다. 

먼저 ‘일반 계시’의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역사의 질서 내, 외에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의 행동 안에 현존하신다는 고백이다. 모든 인류에게는 우주적인 종교의식이 있다. 이것은 무수한 예배의 형식, 신들, 종교적 상징, 종교적 윤리에 의해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에서 본 바와 같이 진리에 대한 열정적 탐구에서 증명이 된다. 여기에 신학은 이것을 인간의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여 그 부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기에 사람도 역시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말은 신학을 통하여 사용되어 진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울 속에서 볼 때 상으로 나타나 보인다. 거울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당신이 아니고 당신의 상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당신의 상이 있을 수 가 없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연에 예속 되지 않는 인간성의 부분이며 인간의 정신성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 형상을 낳는 실재를 찾는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그 형상의 원인을 지적하는 거울 속에 있는 형상과 같은 것임을 알게 한다. 이리하여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들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일반 계시’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유지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말함에 대해 신학자들은 진화론과 생물학과 더불어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이란 그 근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누가 혹은 무엇이 그것을 창조했는가? 질서와 계획, 그리고 자연과 생명의 배후에는 목적이 고려 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 한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만이 대답할 수 있음을 선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자이며 또한 생명의 과정은 계획과 목적이 있으며 우주는 질서 있게 계속되는 것으로 신앙하며 그것에 대한 대답을 신앙으로 해 내는 것이다. 세 번째 ‘일반 계시’는 역사의 배후에 도덕적 질서가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국가의 흥망성쇠, 제국과 독재들이 가고 오는 역사에서 사건의 흐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적 원인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위에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원인이 있음을 믿는다. 옳음과 그릇됨은 삶에 있어 차이를 가져온다. 사회의 폭군이, 도둑질, 살인, 착취, 정복을 함으로서 그것이 잘 지탱하리라고는 믿지 않음으로 인간사회에서 사람은 분명하게 모든 악을 오래 범할 수가 없으며 그에게는 아무런 덕 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이다. 분명히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이 질서는 마치 자연 법칙처럼 참되게 작용한다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보고 확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반 계시는 삶의 도덕적 구조가 있음을 증거 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질서 있고 목적이 있는 도덕적인 우주관을 믿는 것이다. 이제 까지는 ‘일반 계시’에 대하여 말함이며 여기에 또한 ‘특수 계시’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일반 계시’ 외에 하나님이 또한 자기 자신을 특수하게 몇 사건, 혹은 인격, 그리고 보통 역사상의 명확한 때와 장소에 자신을 나타내심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본연의 힘을 나타내셨다. 그는 역사의 질서 배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삶의 도덕적 구조가 있었다. 

이런 형태의 계시를 ‘특수 계시’라고 한다. 아주 중요하게 강조하고 지적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특수하고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점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며 이로써 역사의 시작과 종말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된다. 계시는 오직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해서만 알려 진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만이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다른 무엇으로도 증명되어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사랑은 인격의 많은 부분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알게 한다. 마치 하나님과의 경험이 어떤 것임을 서로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의 공동사회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 사회가 있다. 곤란한 문제는 결코 이런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직접적으로 또는 그 경험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에게만이 알려질 수 있다. 계시는 마치 태양과 같다. 그것은 오직 직접으로만 알려진다. 모든 빛은 태양에서만 나온다. 태양은 그 자체가 표준이며 다른 무엇에 의존하여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확증이며 또 출발이다. 

이렇게 계시는 태양과 같이 그 자체의 빛에 의하여 보여 져야만 한다. 계시는 마치 인간의 사랑에 있어서 한 사람이 그의 진실한 성품을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냄과 같이 하나님 스스로가 그의 본연의 힘과 목적을 나타내심을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약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자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하고 있다.(요한14;10) 사람은 그리스도가 나타내어 주신 대담이며 신뢰이며 능동적인 헌신인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계시를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사람의 이성, 양심, 통찰력, 감각, 그리고 상상력은 하나님과의 인간의 접촉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는 것이며 사람은 이것을 신앙으로 또한 인간의 모든 존재의 응답으로서 믿고 이해 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건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신앙과 계시’를 ‘이렇게 너는 믿느냐?’고 물음을 던진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