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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세를 사용하라 (마 1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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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를 사용하라 (마 17:14~21)

I. 기도가 사역이다

중국 땅 리수스(Lisus) 족에게 복음을 전했던 영국의 선교사 프레지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수스 족은 큰 산맥을 중심으로 남 리수스와 북 리수스 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지요. 북쪽 방언을 먼저 배웠던 프레지어 선교사는 리수스 족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넓은 땅 어디에 가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오전에는 남 리수스 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오후에는 북쪽 리수스 마을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10년동안 그렇게 사역하는 가운데 100여명의 리수스 족이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시장에서 우연히 남쪽 방언을 하는 남 리수스족 한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가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를 선교사 가정으로 데리고가 성경을 가르치고 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복음을 위탁한 다음 남쪽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오전에는 남 리수스를 위해서 기도했고 오후에는 북 리수스 마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십수년만에 남 리수스 쪽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웁게도 수천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무려 수십배가 더 많은 사람이 남쪽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선교보고서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는 것임을 알았다. 기도가 사역이었다.”


II. 당신의 기도의 코드가 제 위치에 있는가?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회가 방해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역이라고 하면 사역의 방해꾼이 사역이었다고 하는 거지요. 목회자 뿐만 아니고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이 잃어버리는 것, 그 첫 번째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허둥대며 뭔가에 쫓겨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사탄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차단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재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 것인가? 내 힘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 것인가? “나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승패는 얼마만큼 기도생활을 늘릴 수 있느냐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때문에 기도의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시간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의 기도의 코드가 제위치에 있는가? 영적전쟁의 승패는 기도의 방패가 제위치에 있는가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영적전쟁의 모델로 흔히 일컬어지는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의 싸움에 보면 여호수아는 전쟁터에 나가 싸웁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승패는 산꼭대기에서 손들어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에 달려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고 기도하는 모세의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너무 지쳐서 팔이 내려올 때에 아론과 훌이 양쪽에 서서 그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경가들은 이 본문을 일컬어 무명용사의 승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의 승리였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승리였다. 중보기도의 승리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역사의 조연이 아닙니다.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행전 12장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그때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에 어떻게 옥문을 열어 제킬 수 있으며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끈들을 자를 수 있는가? 기도가 능력입니다.

셀교회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랄프 네이버 박사가 주님이 세우시기를 원했던 그 교회,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로 그 교회, 셀교회를 이루기를 원하는 교회에 던지는 충고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에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라. 둘째, 교회의 모든 리더쉽 - 영향력있는 사람들의 기도 리더쉽을 키워라.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능력있는 기도의 용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중직들, 모두에게 영적인 굶주림이 있어야 합니다. 불타는 목마름으로 기도를 갈망해야 합니다. 셋째, 전교회를 능력있는 기도 공동체로 만들라는 겁니다. 지난 2천년동안 언제나 교회의 부흥은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콜로라도 스프링스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사악했던 땅이었습니다. 마약중독자들과 수많은 술주정뱅이들과 창기의 소굴이었습니다. 기도의 용사들이 그 도시에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하나님, 이 땅을 바꾸어 주십시오. 사악한 사단의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변화시켜 주십시오.” 주의 종들이 협박을 받습니다. 총살위협을 당합니다. 그 중에 하가드 목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어느날 거대한 지구본 하나가 눈앞에 둥실 떠오르더랍니다. 그리고 그 지구본에 창문이 훤히 열려지는데 이 지구상에 있는 ⅔에 해당하는 40억 내지 45억의 인구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창문을 보니까 북위 10°에서 40°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10-40°윈도우에 사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후 전세계에 있는 선교단체 선교본부 70개 이상이 콜로라도 스프링스 지역으로 그 캠프를 옮겨갔습니다. L.A. 지역에 머물면서 Fuller 신학교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부흥운동을 일으키던 피터 와그너 박사도 중보 기도실을 콜로라도 스프링스 지역으로 옮기고 거기서 전세계를 가슴에 끌어안고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는 전세계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도시로 변화되었습니다. 


III. 능력을 잃은 시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한번 무대 위에 올려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연극인이 되고 관객이 되어서 오늘 본문을 무대 위에 올려 보십시다. 

막이 걷혀지면 귀신들린 한 아이가 간질병으로 초라하게 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져 있습니다. 그 아이를 끌어안고 신음하며 울고 있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바로 곁에서 제자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습니다. 왜 안되지? 왜 귀신이 물러가지 않지? 당황하고 쩔쩔매고 있습니다. 저만큼 서기관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나무라시며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오라.” 귀신을 쫓아내니 이 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무대의 막이 닫혀집니다. 그래서 이 연극의 제목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경제위기입니까?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입니까? 정치적인 불신입니까? 교육정책의 부재입니까? 모두 문제일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시대의 최대의 문제는 신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될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역사가의 글 가운데 이런 글이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은과 금은 많아졌으나 예수님의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버렸다. 이 한탄이 오늘 우리 시대의 한탄은 아닐런지요. 

교회 건물은 저마다 커지고 웅장해졌습니다. 교인들은 많아졌습니다. 재력도 있어 보입니다. 이름대면 알만한 유명인사들도 교회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은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비극적인 한 귀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 여기 제자들이란 말대신 교회란 말로 바꿔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사실은 아닙니까? “내가 교회에 데려왔으니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내가 교회에 이 문제를 가져와도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더이다. 능히 바꾸지 못하더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 세상을 고칠 수 있느냐,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사례들을 살펴보면 우선 아픈 사람 본인의 믿음으로 고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혈루증 여인이나 두 맹인의 경우입니다. 혹은 병든 자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9장의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 15장에 나오는 딸의 질병을 안고 나온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처럼 병을 고치는 사역자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람들, 교회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늘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V. 우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없음이 문제더란 말이지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다가 몇 년 전에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노만 빈센트 필 박사 이야기입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께 찾아와서 “목사님 내게는 문제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닙니다. 문제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대답을 합니다. 제가 문제없는 한 마을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는 1만 5천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마을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땅 어디에 가도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마을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길래 약도를 그려주어서 꼬부랑 꼬부랑 찾아갔더니 1만 5천구가 누워있는 공동묘지였습니다. 공동묘지 말고는 이 세상 어디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지요.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고칠 수 없음이 문제더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 보면 퍽 재미있는 기사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었더니 사도 바울의 앞치마만 갖다가 병약한 자에게 얹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이것을 부럽게 생각했던 한 유대인이 귀신들린 자를 만납니다. “내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 너에게 명령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랬더니 귀신이 하는 얘기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9:19)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 아니겠습니까? 기도도 안하고 적당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으면서도 보혈의 능력도, 복음의 능력도, 말씀의 권능도, 성령의 치료하는 광선도 알지 못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악한 귀신들린 자가 바울 흉내내는 이 유대인을 때려 엎어놓고 옷을 벗기고 할퀴니까 발가벗고 도망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흉내 내는게 아닙니다. 무당도 배운 학습무당하고 신이 내린 강신무당하고 다르더라구요. 예수믿는 사람들도 성령의 능력에 접속되어진 사람하고 어디서 예수 믿는 것처럼 흉내낸 사람하고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성령충만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에 접촉되어졌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홍수가 나도 물은 마셔야 갈증이 해결되듯이 우리교회에 아무리 많은 능력이 있어도 내가 구체적으로 만난 예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권세를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배신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니까 사단에게 순종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아담은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도록 주신 권세를 사단에게 양도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던졌던 한 가지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6절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누가 사단에게 넘겨주었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권세와 영광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상실하고 사단에게 이 권세를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부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되찾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바로 이 권세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이 권세가 제대로 행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V. 권세를 사용하라.

신자에게 주어진 이 권세는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선포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호받고 축복받고 치유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나는 이 세상에서 범죄하고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나는 사단에게 빼앗겼던 모든 권세를 회복했고 이 땅을 정복하는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내 안에서 회복되어졌느니라.

이 땅의 부모들과 교사들과 목회자들과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권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예요. 왜 구경만 하고 있으십니까? 사단이 다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입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전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 전에 올 때마다 여러분들은 강력한 성령의 나타남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적인 상태를 스스로 돌봐야 합니다. 권세는 이미 내 것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후원을 비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서 오늘부터 그 권세를 행하십시오. 교회 와서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집에 가면 부부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밥 먹을 때는 재미가 있는데 집에서 밥 먹을 때는 자꾸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공부방에 사단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전화기를 타고 사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컴퓨터 안에서 아이들을 점령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집안에 있는, 우리 가정을 괴롭히는, 우리 남편을 방황하게 만드는, 우리 자녀를 괴롭히는, 우리 아이들을 유혹하는 모든 사악한 영들은 물러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추방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입니다. 그러나 인터넷 강국이 인터넷 천국은 아니예요. 우리나라처럼 초등학교 아이들에게까지 자살 사이트와 폭력 사이트와 음란 사이트가 무분별하게 노출된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컴퓨터 앞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십시오. 이 컴퓨터를 주님의 주권에 돌려드립니다. 이 컴퓨터를 통하여 내 아이의 가치관이 건강해 지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지능이 발달되어지고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자녀가 될지언정 이 컴퓨터로 말미암아 우리 아이가 사탄으로부터 공격받지 말지어다. 사단은 떠나갈지어다. 추방하고 모든 잘못된 사이트들을 차단하십시오. 여러분 이 아이가 성장된 다음에는 이미 늦습니다. 

사탄을 추방하고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간구기도를 하지 않고 언제나 명령기도를 했습니다. “열병이 떠나라.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귀신아 떠나라. 일어나 걸어라. 달리다굼!” 주님은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명령하십시오. 당당한 권세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명령할 권위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녀들을 맡길 때 육체덩어리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맡겼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축복하십시오.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선포하십시오. 온전히 그들의 삶에 주님의 주권이 나타나도록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이 교회를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셔서 이 교회를 맡기는 겁니다. 제가 위임하는 부교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권위를 그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탄이 결단코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무 나도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지금까지 저는 이 말씀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기를 원할 때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님이 내 안에 찾아오신다. 그렇게만 받아들였습니다. 잘못된 적용 아니지요. 

그러나 본문을 가만히 연구해 보니까 본래는 그 얘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라오디게아 목사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마지막에 그렇게 맺어지고 있습니다. ‘아하~ 이 말씀은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이구나.’ 저는 그 순간 깜작 놀랄만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시간을 아까워하지 아니하며 교인들을 돌보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목회를 부지런히 했습니다.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우리교회 밖에서 “종아, 나는 네가 기도하는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 네가 설교하는 그 자리에 함께 가서 설교하고 싶다. 네가 심방하는 그 자리에 내가 함께 동행하고 싶어. 네가 찬양하는 그 자리, 오르간을 연주하는 그 자리, 드럼을 두드리는 그 자리, 차량안내를 하고 예배 안내를 하고 방송사역을 하고 식당에서 봉사를 하는 그 자리에 나는 들어가고 싶은데, 예수없이 봉사하고 예수없이 찬양하고 예수없이 설교하는 구나.󰡓”주님 그랬군요. 나는 여기서 부지런히 일한다고 일했는데 예수님은 정작 교회바깥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군요.󰡓

그때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는 미지근한 교회가 되고만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찬송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러분들이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여러분의 심령이 식어진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한다 하면서도 축복한다 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비틀거리고 여러분의 남편들이 방황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 바깥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문밖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는 여러분 방문을 여십시오. 사업의 문을 여십시오. 재물의 문을 여십시오. 교회의 문을 여십시오. 목장의 문을 여십시오. 예수님 여기 계셨군요.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여러분의 목장으로 여러분의 가정으로 여러분의 교회로 여러분의 사역터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업터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오면 예수 믿는 사람인데 사무실에 가면 왜 예수 믿는 냄새가 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 없는 봉사, 예수 없는 사업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사업터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도 “볼찌어다 지금도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너희 사업을 내가 책임지리라.” 할렐루야. 권세를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VI. How?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라.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한 제자들, 사람들 앞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사람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 조용히 찾아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천년전 제자들의 이 신음소리는 오늘 우리신자들의 신음소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왜 안됩니까? 2천년전 제자들의 한탄은 우리교회의 한탄소리는 아닙니까? 우리는 왜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이 능력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이 어려운 것입니까? 우리는 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이 어려운 것입니까? 왜 능력있는 기도꾼이 어려운 것입니까? 왜 우리는 이토록 복음을 전하는데 무력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주님의 대답은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였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가정을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안나타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정복하고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 땅을 정복할 권세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지막 20절을 보십시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 “산을 옮기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성경은 믿음을 두고 「있다, 없다 / 살았다. 죽었다 / 작다, 크다」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겨자씨”란 아주 작은 것 그러나 그 안에 생명력이 있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관용어입니다. 또 “태산을 옮긴다”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 극히 불가능한 상황을 표현하는 관용어입니다. 

그렇다면 “산을 옮기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 작은 믿음이 살아 역사할 때, 믿음으로 사역할 때,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 이런 뜻입니다. 

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는 이미 나무가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천국비유에서는 겨자씨 한 알에 그 엄청난 천국이 들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생명력이 작동될 때 천국의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작다고 나무라실 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라”는 말씀이 “겨자씨”의 관용어적 사용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해석의 관점입니다.
․큰 믿음이란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란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란 그 예수님과 함께 내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신앙의 연조가 크지 못해도, 내 경험이 크지 못해도 내 신학적 지식이 대단하지 못해도, 내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믿음을 사용하면 태산이라도 옮겨집니다. 귀신은 떠나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사역하면 오늘도 역사는 일어납니다. 

우리는 왜 할 수 없었습니까? 퍽 재미있는 내용이 다음절에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 성경 21절에 보면 (없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다른 사본에 보면 재미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9장 29절에 보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금식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다른 것 아무 것도 안해도 우리는 밥은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코드가 빠져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찬송과 우리의 사업과 우리의 가정생활과 우리의 교회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하면 이것은 밥 먹고 잠자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우선순위 No.1 - 내 신앙생활의 최우선순위는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기도로 당시 거대했던 천주교 교권과 맞서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칼빈은 금식기도로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 성지로 바꾸었습니다. 
모니카는 금식기도로 방황하는 아들을 성자로 바꾸었습니다. 

실패가 있을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많은 사역들을 이루지 못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사십시다 “내 신앙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꿈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비전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아이에게 족집개 과외 선생을 붙여주지 않아도 내 아이의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사업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 목장의 모든 목원들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민족과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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