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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목자 (요 2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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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요 21:14~17)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아마 복음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패기 만만하던 제자들은 에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에 절망 중에 숨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여전히 제자들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호수 근처가 고향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모여 고기를 잡기 위해 호수에 배를 띄웠다.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이 밤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3년 동안 그물 던지든 실력이 녹슬어서 그랬을까? 이와 같은 현상은 3년 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때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새벽녘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소리치셨다.
-고기 좀 잡았냐? 
-아니요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봐!

제자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른체 신비한 힘에 이끌려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 그 순간 베드로가 직감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호수로 뛰어 들어 헤엄쳐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 다른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세어 보니 153마리였다. 

새벽에 날이 서늘한데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예수께서 친히 차려 주신 감동적인 조찬을 마쳤을 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베드로를 부르셨다.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다. “시몬”이란 이름은 베드로가 사명을 받기 전, 자연인으로 불리던 이름이었다. “베드로”란 “반석”이란 뜻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께서 친히 부여하신 이름이다. 

(마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는 지금 이름에 걸맞지 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대화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답변과 세 번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은 15-17절에 걸쳐 3차례 반복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3번의 질문이 같아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1)15절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특징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비교급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라는 말은,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원문의 의미로는 사람 뿐만아니라 사물도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이것들보다”라고 해석한다면 밥 벌이를 위한 여러 도구들 곧 고기잡이를 마치고 올라온 후 호숫가 널부러져 있는 어구들 - 그물, 배, 노등 -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사랑”이란 단어인데, 원문에 보면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점이다. 헬라어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보통 네 가지로 표현된다. 남녀 간의 이성적 사랑을 말할 때는 “에로스”, 부모들의 자식 사랑을 말할 때는 “스토르게”, 친구 간의 우정을 말할 때는 “필레오”, 조건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할 때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질문의 내용은 네가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너의 생업을 위해 아끼는 물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의 정도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2)16절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때는 비교급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사랑을 말씀하실 때 “아가페”란 단어만 사용하셨다. 두 번째 질문의 의미는 네가 너 자신을 포기하고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3)17절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두 번째 질문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페” 대신 “필레오” 곧 친구간의 우정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바꾸어서 질문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가페”라는 단어 대신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가?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로서는 현재 자신이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사랑할 용기가 있었다 해도 감히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기에 희생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란 단어 대신 낮추어 “필레오”로 물으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세 번의 연속되는 질문에 퇴로를 차단 당해 코너에 몰린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그를 몰아 다그치지 않으셨다. 따뜻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사랑을 확인하시면서 그의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물으셨던 것이다. 


2.베드로의 답변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세 번의 답변을 하였다. 첫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내가 아가페합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첫 번째 대답과 같이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세 번째 대답에서도 역시 “필레오”로 대답했다. 베드로는 왜 똑같이 “필레오”라고 대답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아가페”라고 대답할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은 후 감람산으로 나아갈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마 26:33)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렇게까지 단언했던 베드로, 그러나 그날 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다.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맹세했던 그가 배신한 입장에서 어떻게 주님 앞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는가? 

지금은 목숨을 바쳐 사랑할 만한 자세가 되어 있다할지라도 그의 입술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는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에서 “아가페”란 단어 대신 “필레오”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네가 나를 필레오하느냐?” 우정을 나누는 정도의 수준으로 내려 질문하신 것이다. 그때야 비로서 베드로는 “예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 신학대학에 다니던 시절, 온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기숙사에서 추위에 떨면서 지냈던 시절, 성령 충만해서 이런 상태라면 순교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그 때 이런 복음성가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주님 나는 오늘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위해 나는 살고, 주님 위해 일하며 주님 위해 고생하며 주님 위해 죽겠네.”

신앙이 좋을 때, 사명감이 투철할 때는 이런 고백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은 후에 그 복음성가를 자주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해야 할 다른 대상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랑, 아가페란 단어는 쉽게 부를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다. 갈라지는 것, 나눠지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고난의 자리에도 함께 가는 것이고, 사랑하면 아픔도 함께 하는 것이다. 

10년 전, IMF 금융위기 때 가정이 많이 깨졌다. 이혼하는 가정이 늘어났고, 가장들의 가출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노숙자란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깨지기 전까지 그 가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돈 때문이었다. 돈이 가정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재정 문제가 생기니까 이혼을 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했던 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감정적으로는 “아가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위기 닥쳐왔을 때 도망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나눈 후 다른 제자도 아닌 바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세 번씩 반복되는 질문을 던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진실한 고백을 듣기 위해서 였다. 세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과 배신했던 과거의 후회가 그의 마음을 짓눌렀을 것이다. 17절의 말씀을 보면 그의 입장이 심히 난처한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된다. 

(요 21:17)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강한 압력을 느끼면서 그는 겸손히 그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필레오”한다고 대답했다. 비록 “필레오”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었다. 


3.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신 후 그의 답변을 들으셨고, 그리고 난 후에 사명을 부여하셨다.

15절에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고, 16절에서는, “내 양을 치라”하셨고, 17절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비슷한 내용이면서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여기서 말하는 어린 양이란? 주님의 교회 안에 약한 지체들, 믿음이 약한 신자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 약한 어린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여 그들의 신앙이 견고하게 잘 자라도록 도우라는 것이다. 

2)내 양을 치라(16절)
“치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take care of my sheep” 나의 양들을 보호하라, 보살피라. 여기서 말하는 “양”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신자들을 거짓 교사들과 이단, 그리고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않도록 잘 다스리고 보호하라는 뜻이다.

3)내 양을 먹이라(17절)
“먹이라”는 말은 성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했는데, 먹이는 것은 같으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양은 믿음이 허약한 신자요, 양은 기존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린 양은 말씀으로 양육하여 건강하게 만들라는 것이고, 건강한 양은 말씀으로 가르쳐서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본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양무리를 치는 목양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먼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언제든지 사명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 . 

요즘에는 신학교에 가는 사람들이 70-80년대 처럼 많지 않다. 한 때 은혜 좀 받으면 신학교로 몰리던 시대가 있었다. 언젠가 합동신학대학원 교수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입학 면접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지원 동기가 무엇입니까?
-조용기 목사님 같이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그 지원생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학과 성적과 관계 없이 그런 사람은 탈락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목자가 된다면 그는 삯군 목자가 될 것이다. 주님의 교회를 치는 목자가 되는 기준은 지능이나 학력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님을 사랑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그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다. 십자가의 고난이 무서워 베드로는 사명도 버렸고, 선생님도 버렸다. 자기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만 남은 것은 후회와 통곡, 두려움과 무기력뿐이었다. 

그때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베드로는 감히 얼굴조차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 메시지는 “선한 목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제는 도망치지 말고, 나를 부인하지 말고 나와 같은 “선한 목자”가 되라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후로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양무리를 치며 선한 목자로 사명을 감당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다고 한다. 

나는 1992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식 장소를 제공한 서울 염광교회 박범룡목사님으로부터 안수 기념으로 성경을 선물 받았는데 열어보니까 잠언 27:23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잠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나는 참으로 부족한 목사다. 그래서 늘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한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선한 목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그리고 맡겨주신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는 나를 돕는 3명의 교역자와 27명의 목자, 27명의 부목자, 청년부 5명의 목자들이 있다. 그리고 30여명의 교회학교 교사들이 있다. 나는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치기 위해 60여 분의 목자 부목자들과 30여분의 교사들과 함께 주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치는 사역을 감당하길 원한다. 

나는 목자, 부목자, 교사들이 사랑 가운데서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바란다. 억지로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 동안 예배에 참석치 않는데도 방관한다면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하였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 평안의 모든 교우들에게 부탁드린다. 
내가 아직 목자나 교사로서 직분을 맡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사랑의 실천을 통해 목자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그 일은 어렵지 않다. 

처음 교회 나온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연약한 지체들을 붙들어 주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당 안의 물건들을 아끼고 잘 관리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현관의 화분, 옥상의 화단 관리.

그렇게 할 때 목자, 부목자로 세움을 받은 분들이 힘을 얻어 더욱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우리 교회가 사랑 가운데 선한 목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한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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