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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가 있는 인생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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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있는 인생 (고후 12:7~10)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사람들은 바울을 꼽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후 신약성경과 교회역사를 주도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과 활동이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바울은 목회자중의 목회자이고, 선교사중의 선교사요, 또한 신학자중의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은 성도중의 성도입니다.  그는 성도라 부르기를 가장 즐겨했고,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늘 자기를 살피면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인격과 삶이 예수님을 잘 닮은 구별된 사람, 참 성도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보면서 우리는 부러움을 가집니다.  그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마치 완벽한 사람 같이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나무랄 데 없던 바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시’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처럼, 바울에게도 남모르는 고통과 아픔을 지니고 살아야 할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가시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육체의 가시라고 했기에 바울이 가진 안질 병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학설에 의하면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날 때 하늘로서 강렬한 빛을 받아 3일 동안 시력을 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뒤에 다시 회복되었지만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누군가가 늘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가시를 왜소한 체구로 보기도 합니다.  바울은 외모가 조금 작고 약한 체질이었습니다.  이런 왜소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주눅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언변이 없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말에는 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뛰어난 문필가 였습니다.  하지만 말은 잘 못했습니다.  표현력이 부족했고, 어눌했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 서기를 늘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가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시를 육체보다 영적인 의미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가시는 유혹, 의심, 갈등, 혹은 끊임없이 누르고 있는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바울의 가시를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사실 바울에게 가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었고,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던 가시처럼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눈물도 있고, 풍랑도 있으며, 아울러 가시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드러나는 약점이 있고 때론 자기만이 아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 가시가 그냥 나에게 있다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때론 그 가시가 나를 찌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합니다.  가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가 찌르면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속으로 앓는 것이 가시의 고통입니다.

 바울은 가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3번 기도는 꼭 3번이라기 보다 가시로 고통을 당할 때마다 간절히 탄원했다고 뜻입니다.  바울은 잠잠하던 가시가 그의 삶에 불편과 고통을 줄때마다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없애달라고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도했건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만 하실 뿐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시가 있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바울에게, 우리에게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 남겨 두실까요?  본문은 바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고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만할 수 있는 요소가 너무도 많은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갖기 힘든 것을 그는 여러 개 갖고 있었습니다.  교만의 위험수위가 절정에 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감이 있었고, 늘 당당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고, 그의 앞에서 누그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책망했고, 평생 은인은 바나바와도 대립할 수 있었던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그것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점은 달랐습니다.  전에 그는 그가 가진 것을 자기의 노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는 순간순간 고백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바울이 받은 은혜들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기 전에는 그것을 몰랐지만 믿은 후에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력하지 않고도 과분한 것을 얻으면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기 쉽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가 좋아서 노력하지 않고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여자 중에서 교만한 사람은 부모 덕분에 어쩌다가 미인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임을 모릅니다.  수고 없이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은혜로 알고 더욱 감사하며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많은 은혜를 받았기에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만을 막는 길은 가시를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믿음의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시 때문에 바울은 자고하지 않았습니다. 가시를 볼 때마다 자꾸 높아지려는 고개가 숙여지고, 가시가 찌를 때마다 바울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자세를 떨어뜨리며 겸손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지, 그 하나의 대표적인 예를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는 셋째 하늘을 다녀왔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같으면 살아생전에 천국을 본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한 뒤에 14년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가시를 설명하기 위해 ‘부득불’ 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경험을 말할 때도 그는 분명 자기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라는 3인칭을 사용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가시가 이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남겨둔 가시, 그것은 때로 고통스럽게 하지만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약할 때 강함을 주려는 것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가시를 주신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합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강하게 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 가시는 분명 고난입니다.  그것은 분명 풍랑이요, 캄캄한 터널이요, 장벽이요, 난관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영광이 함께 가기에 끝날 고난, 피할 길이 있는 시련을 보면서 우리는 위로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가시는 다릅니다.  분명 가시도 아프지만 이 고통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평생 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기에 가시는 참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위해 더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가시 앞에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바로 약한데서 오는 강함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강한데서 강한 것이 나오는 것은 세상의 원리이지만, 약한데서 강한 것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시로 아파합니다.  가시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때론 괴로워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약한데서 강함을 주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장 약한 것에서 하나님은 끌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두 우리의 약함에서 크게 나타납니다.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의 강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시고, 그 약한 자리에서 강한 능력을 펼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가시가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모릅니다.  가시가 없으면 하나님의 강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약한 곳에서 주님을 향한 눈물이 있을 때 그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합니까?  바로 가시 때문입니다.  가시가 우리를 하나님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생은 어쩌면 그 자체가 가시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문제 앞에 우리의 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 약한 우리들, 하나가 해결되면 더 힘든 문제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약한데서 옵니다. 가시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강함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라는 소설가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빙점’ 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글도 잘 쓰고 행복했던 사람이지만 그녀에게도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약한 육신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아파하며 살았고, 그 아픔 때문에 주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평생 마음에 새기며 고백한 기도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아,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수 조차 없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주님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분이시요, 그래서 나의 보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는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내 인생의 가시를 통해 약할 때 강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풍성하게 경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약점보다 강점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던 가시는 분명 그의 삶에 약점이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던 바울은 그것만 없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아 처음부터 거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한가지의 약점보다 더 많은 강점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이제 그는 주님을 알아가면서 약점보다 강점을 보기 시작합니다.  약점에 메이지 않고 강점에 승부를 건 것입니다.  언제까지 가시를 보며 신세타령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에게서 보는 참으로 건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바울이 가시를 안타까워하는 측면에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가시보다 더 귀한 믿음이 있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가시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시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극복된 상태였기에 언급한 것입니다.  가시를 극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말하는 것은 극복되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가 가진 강점이 가시를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지만 가시에 메이거나, 초점을 두지 말고 오히려 강점에 개발하고, 초점을 맞추면서 살라는 교훈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거의 완벽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이라면, 구약에서는 다윗입니다.  아니 다윗은 바울이상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실수를 통해 약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윗의 약점을 긁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다윗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그가 가진 강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의 믿음과 삶이 약점을 덮은 것입니다.  약점이 있었지만 강점이 그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허물이 드러났어도 더 존경받았습니다.  결국 약점이 문제가 아니라 강점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은 강점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데 늘 약점에 메이면 발전이 없고,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소모적인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약점보다 더 소중한 강점을 찾고 개발하면 분명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탁구를 대변하는 양대 산맥은 중국과 유럽입니다.  하지만 탁구는 동양인의 체구에 맞는 운동이기에 아직까지 중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습니다.  중국탁구의 약점은 백핸드에 있습니다.  백핸드는 유럽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탁구가 세계를 평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은 그들의 약점인 백핸드를 보완하려고 수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빠른 순발력에서 나오는 포핸드에 승부를 겁니다.  그것을 유럽 선수들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만약 중국이 약점을 보완한다고 백핸드에 치중했더라면 아마 유럽에 밀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점에 승부를 걸었던 것입니다.

 약점이 있지만 약점에 메이지 말아야 합니다.  가시가 있지만 신경 쓰지 말고,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강점을 살려야 합니다.  강점이 살아나면 약점은 덮어지기 마련입니다. 가시가 있지만 두텁게 강점으로 덮어야 합니다.  강점만 살리면 가시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강점을 살려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기 바울이 사용한 ‘가시’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십자가’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바로 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십자가를 가시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이요, 영광으로 여기며 삽니다.  가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시는 아프게 하지만 유익도 있습니다.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하고, 약한데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그리고 우리의 강점에 더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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