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요 14:16~24)

  • 잡초 잡초
  • 808
  • 0

첨부 1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요 14:16~24)

  제 아들 영은이가 미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 백인 여자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서로 사귄지 한 반 년인가 지났을 때 갑자기 그 애가 다른 주(state)로 아주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이사 가는 바로 당일 아침에 영은이가 갑자기 "아빠, 걔가 가기 전에 한번만 더 보고 싶은데 저 좀 데려다 줄 수 있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어제 저녁까지 실컷 작별인사 해 놓고서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으니까 그 애 집으로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순수한 풋사랑(puppy love)에 어찌하든지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그 집에 데려다 주고서 저는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둘이 현관 앞에서 만나더니 서로 꼭 부둥켜안고서는 한 5분 동안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쓰라린(?) 작별을 한 아들을 다시 차에 태워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참 이럴 때 아버지로서 뭔가 한 마디 적절한 조언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뭐라고 해 줄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애에게 썩 호감이 가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잘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나니 제 아들이 생전 처음으로 사귄 이성친구와의 이별 때문에 큰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고 오히려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그 애가 이사 간 이후 얼마 동안은 우리 집 장거리 전화요금이 갑자기 오르게 되었는데, 두말할 것 없이 제 아들이 그 여자친구와 틈만 생기면 전화하느라고 그랬던 것이고 그것은 또한 제가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소위 말로만 듣던 '원거리 교제'(long distance relationship)가 제 아들과 그 애 사이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서로 볼 수 없는 먼 공간의 간격을 '장거리 전화'로써 대신 메우면서 유지되던 그 둘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한 석 달 쯤 지났을 때 제가 "너, 요즘 그 애하고 어떻게 됐니?"라고 저로서는 좀 걱정이 되어서 물어 보았더니, 제 아들이 그저 싱긋 웃으면서 "우리 사이 끝났어요.(We broke up.)"라고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그렇게 '눈물의 이별'을 하던 사이라는 것도 '원거리 교제'라는 현실 앞에서 겨우 세 달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사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만날 수 없는 먼 거리를 사이에 둔 관계라는 것은 참 지속되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과 우리 신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지상'과 '천당'이라는 먼 거리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장거리 전화도 통할 수 없으며 제트기를 타고 주말마다 오갈 수도 없는, 정말 까마득히 먼 거리요 현실적으로 어떤 교제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거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까지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당신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어떻게 그들이 주님과 가깝고도 친밀한 교제를 계속할 수 있는지를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말씀을 통하여 이 명실 공히 '최장의 원거리 교제'인 예수님과 우리 신자들 사이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님의 내재'가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성립시켜 줍니다. 

  본문 16절부터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선 "또 다른 보혜사"를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보혜사'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자면 '곁에 불려온 자'라는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 위로자, 도우는 자'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우리나라말에서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분'이라는 뜻에서 '보혜사(保惠師)'라는 단어로 번역해 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 '보혜사'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예수님만 쓰셨고 또한 항상 '성령'을 뜻하실 때에만 사용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 다른"이라고 하신 것은 보혜사가 여러 명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보혜사가 바로 '예수님 당신과 같은 또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성령님을 친히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하셨으며 그러면 그 성령님을 "그(성부)가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와 함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씀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신자의 심령 속에 내재하게 되심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처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있도록 '구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그 결과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오직 성부시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의 내재(內在) 또는 내주(內住)하심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이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본인의 역량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님을 마치 사람이 마음대로 오라 가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슨 목사가 입으로 '쉬'하고 바람을 불면 성령이 임하고 부흥사가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면서 소위 안수기도라는 것을 하면 그 때문에 자빠지는 순간 성령이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쇼들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역시 어디까지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그런 성령님을 그토록 무슨 귀신 부르듯이 임하게 해 준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성령은 결코 목사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께서 '보내어 주시는' 것이며 내가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 쪽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선택에 의하여 친히 '내 속에 오심'으로써 그 결과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게' 되시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17절에서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를 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성령은 "세상은 능히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오직 신자는 "저를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그처럼 성령이 한 신자의 심령 속에 찾아오셔서 내재하시게 되면 그런 성령의 방문을 받은 본인은 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임하심은 달리 증명하거나 설명할 길이 없는 것으로서, 오직 스스로 체험한 신자에게만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복음이 내 속에 들어오고 그것이 믿어지고 그것이 깨달아지는데 무슨 다른 증거나 복잡한 설명이 필요 있겠습니까?
  성령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일이며, 반면에 성령 받은 신자에게는 '저를 아는' 이 확실한 현실은 스스로 부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런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예수님 승천 후의 기독신자들이 마치 부모 잃은 '고아'처럼 보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에게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하신 것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고' 우리가 그 주님을 '보게' 된다는 것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만남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그 '성령의 내재'하심을 통하여 성도가 우리 주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20절의 "그 날에"라는 것이 바로 그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되는 날을 뜻하며, 그 성령 강림과 함께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신자의 심령 속에 내주하심으로써, 바로 그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실제로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거동행하는 삶, 그야말로 예수님을 직접 '보고'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 사귐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한 교제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양쪽 다 살아 있어야만 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라도 죽어 있으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시고 중생 받은 신자 역시 이미 새 생명을 받아 살아 있으니, 이 두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교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만남이 바로 성령님의 내재를 통하여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신자만이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과 이런 '생명의 교제'을 나눌 수 있으며 이런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를 보십시오.
  석가모니도 죽었고 마호메트도 죽었지 않습니까?
  이미 교주가 죽어 있는데 그런 교주와 신도 사이에 도대체 무슨 만남이 있고 교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바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내재하심을 절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보혜사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작동을 일으키실 때 우리는 절로 예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되며 '믿게' 됩니다.
  그런 교제는 그 어떤 '장거리 전화'보다도 더 확실하게, 그 어떤 '화상전화'보다도 더 분명하게 그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성령이 임하신' 성도만이 맛보아 알 수 있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체험인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비록 우리와 공간적으로는 지극히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바로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이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와 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주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기쁨을 꼭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순종'이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계속 공고히 유지시켜 줍니다. 

  21절 이하 24절까지에서 "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성령님의 내재로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시작은 되었다 할지라도 그 예수님의 재림까지는 오랜 기간이 또 있습니다.
  이 세상 연인들 사이의 '원거리 교제'도 시간이 흐르면 깨어지기 쉬운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주님과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까지 그 관계가 과연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그 점에 대하여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말씀 순종'을 통하여서만 그 '사랑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주는 대로 받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명'을 스스로 만들 필요는 전혀 없으며 오직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기독교는 무슨 '득도 종교'가 아니며 '참선 종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깨달아야 되는 종교'이며 그런 까닭에 결국 '인본주의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있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기독신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완성된 성경 말씀'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 규범으로 따르고 있는 개혁주의 기독교회는 오직 주님께서 '주신 대로 가지기만 하면' 아무 쓸데없는 고생도 할 필요 없고 성경을 가감하는 죄를 범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계명을 받고 나면 이제는 "지키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원래가 '계명'이라는 것은 순종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결코 외우거나 깨닫기만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내리는 '명령'은 부하가 "그 말씀 참 옳습니다."라고 맞장구치라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종, 그것도 즉시, 그리고 완전히 복종하라고 내리는 것일 따름인 것입니다.
  또한 '명령'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이 명령이 과연 무슨 뜻일까?'하고 골머리를 싸매고 곰곰이 생각해야 깨달을 수 있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어디로 전진하라, 앞으로 돌격하라, 적군을 향해 사격하라.' - 이런 명령을 듣고서 '과연 우리 상관께서 내리신 이 명령 속에 깊이 담긴 숨은 진리가 무엇일까?'하고 무슨 도를 닦는 사람처럼 참선에 들어갈 부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믿어라, 예배 드려라, 기도해라, 헌금해라, 전도해라.'는 말씀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고려해 볼 것'이 있으며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가지게' 된 자는 즉시, 그리고 완전히 '지켜' 순종할 순서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 군대에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것은 그저 엄격하기만 한 계급사회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명'과 그에 따른 신자의 '순종'은 그런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를 유발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계속되는 21하반절에서도, 그처럼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자"가 된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그 사랑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강력해진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게 되며 그 관계는 더욱 가깝고 돈독한 것으로 계속 발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정말 '인간적'이면서도 '솔직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희들, 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앞에서 간질거리는 웃음이나 띄우고 점잖게 인사만 하지 말고, 정말로 날 사랑한다면 내 말을 순종해라."고, 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서로 딱 까놓고 말하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이런 예수님 앞에 정말 솔직하게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사랑'이란 말만 입에 발린 미사여구로 하지 말고 정말 좀 구체적으로 그 사랑하는 표를 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라고 사도신경을 매주일 아침에 한번 외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고, 그 예수님 정말 사랑하고 있는 증거를 '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삶을 주중에도 교회중심의 예배와 봉사와 충성을 통해서 제발 좀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일 목사님 설교 정말 좋은 말씀이라고 고개만 끄덕이고 끝나지 말고 그것이 정말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그 말씀을 생활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외식적인 '사랑 고백'만 듣고 속으실 분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진솔한 말씀을 해 주시는 중에 "갸룟인 아닌 유다," 즉 제자 다대오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로 끼어들었습니다.
  "예수님, 어째서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요점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세속적인 메시아로 기대하던 잘못된 사상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23절에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라고, 바로 21절에서 하셨던 말씀을 표현만 다를 뿐 꼭 같이 반복 강조해 주심으로써 그 유다를 다시 대화의 요점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세상 앞에 나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참된 메시아로 계시했고 세상은 그런 내 말을 순종하기만 하면 나를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처럼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 대하여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말씀 순종함으로써 유지되는 사랑의 관계는 바로 '거처를 함께 하는' 관계, 곧 이 현세에서는 앞에서 나왔던 '성령의 내재'로써 그리고 내세에서는 '주님과 천당에 동거'하게 되는 영원한 관계가 될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말씀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이며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성자를 보내신 성부 "아버지의 말씀"인 것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앞서 15절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 '계명 순종'이 바로 16절 이하에서 보았던 '성령의 내재'와 또한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아멘'이라는 화답도 바로 그 '진리의 영'이 내도록 하시는 소리이며,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도록 시키시는 분 역시 오직 그 '보혜사'께서 그렇게 '가르치시고 밀어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감동'은 곧 '성경 순종'과 동격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결코 '벙어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해 주시는 인격체이며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분명하게 이루어지게 해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성령에 감동'되는 것은 결코 무슨 몽롱한 환각에 빠지거나 신들린 상태가 아니라, 오직 '정신을 차려 그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순종하는' 반응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신사회는 흔히 목사가 마치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독재자나 되는 것처럼, 교인들은 그 강압에 못 이겨서 할 수 없이 돈을 갖다 바치는 피해자나 되는 것처럼 비난을 합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보지도 않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 시청료 억지로 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강제수금'이지, 목사가 무슨 재주로 교인들로 하여금 하기 싫은 헌금을 억지로 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아무 법적 구속력도 없는 교회 헌금을 본인이 정말 싫어한다면 그 누가 미쳤다고 하겠습니까?
  오직 성령이 그 신자의 마음을 감동해 주셔서 예수님 사랑하게 되니까, 절로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뿐 아니라 신자의 예배생활, 회개, 기도, 봉사, 서원, 이 모든 것들이 다 오직 성령 충만하게 된 성도에게서는 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말씀 순종'의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같은 지붕 밑에 살아도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부자관계는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에 유학가 있어도 늘 국제전화를 하면서 부모님께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근면하게 사는 자식은 설혹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까운 부자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 성경은 국제전화보다도 더 우리 귀에 똑똑히 들리는 예수님의 육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아무 잡음도 없이 주님과 직통으로 통화하고,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하여 몸으로 의사소통함으로써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 예수님과 날마다 더 가까이 사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지금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무슨 교제가 전혀 불가능한 '원거리'로 벌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처럼 주님 쪽에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써 그 관계는 확고부동하게 정립되고 우리 쪽에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관계는 더욱 끈끈하고 깊어지게 됩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아주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가까운 관계'를 우리 주님과 지금도 여전히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는 다른 종교인들은 어떠합니까? 
  이슬람교 신자들은 매년 12월 중순부터 말에 있는 소위 '메카 순례'라는 것을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꼭 참석해야 합니다.
  이미 죽은, 그리고 지금쯤은 썩어도 한참 썩어 있을 그 마호메트의 시체 위에 시꺼먼 돌덩이를 올려놓고서는 그 주위를 뱅뱅 도는 것을 두고 그 이슬람교 신자들은 그들의 교주를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그저 자기네 교주의 장례식을 매년마다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야말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례지내는' 허례허식이지 그게 무슨 '은혜로운 체험'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눈으로 직접 보고 발로 그 근처를 도니까 아주 '근거리 교제'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인격적인 교통이 있을 수 없는 헛된 의식만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받은 사람'으로서는 부인할 길 없이 느낄 수 있는 '성령님의 내재'를 통하여 지금도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신비한 교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수천수만 명의 중들은 새벽 3시마다 일어나서 소위 '참선'이라는 것을 하면서 무언가 '득도'를 하겠다고 몸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말씀이 그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기에 그의 제자들은 아직도 그런 고생들을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저 '내가 곧 진리요'라고 자신 있게 선언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만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또 그 불교 신자들은 그들의 교주와 교제하기 위해서 기껏 한다는 것이 바로 돌을 다듬거나 나무를 깎아서 그 죽은 부처의 상을 만들고 그 위에 화려하게 금박을 입혀 놓고서는 그 앞에 절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우상 앞에 아무리 제물을 차려 놓아도 그것 다 식을 때까지 부처가 밥 한 톨이라도 먹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향단 앞에서 무슨 삼천 배를 한다 해도 그 죽은 신이 그 무릎 아픈 것을 가상히 여겨 줄 수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무슨 사랑은커녕 그 어떤 교감도 전혀 없이 오직 의례와 가식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실제로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축복의 말씀을 체험함으로써 그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실로 뜨거운 관계를 점점 더 발전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기독신자들은 저 높고 높은 보좌 우편에 계신 우리 예수님을 진짜로, 실제로, 현실적으로 바로 내 곁에, 아니 바로 '내 안에' 모시고 사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대로 보내어 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주님과 교제하며 그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며 말씀 순종을 통하여 그 주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됨으로써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친밀한 관계를 그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 뵙게 될 그날까지 더욱 굳게 지키고 뜨겁게 영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