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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공의 (살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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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 (살후 1:5~10)

세월이 변함에 따라 사회의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30년 전만하더라도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경범죄로 처벌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니 조선 시대 말에 단발령 즉 상투를 자르라는 포고령이 내렸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불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라가 불효를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머리는 짧게 해야 당연한 것이요 그렇기에 장발족 다시 말해서 귀 밑으로 머리가 내려오도록 기르고 다니면 경범죄로 처벌한다고 하는 법률이 만들어져서 경찰들이 가위를 들고 장발족을 찾아다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을 하면 모두가 웃습니다. 아니 머리를 길게 기르던 짧게 하도 다니던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치마 길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는 여인네가 종아리를 내보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무릎 아래까지 치마 길이가 짧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미니스커트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죠. 그래 장발족 단속처럼 무릎 위 20센티 이상 되는 치마를 입으면 처벌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미니 스커트까지도 자유롭게 입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언제라도 변할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살아가는 모습 역시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그 모양은 좀 달라졌다고 해도 성도로서의 근본은 결코 달라질 수도 없고 달라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것 역시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결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고 해서 어둠으로부터 시작해서 빛이 있는 아침으로 하루가 이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침으로부터 시작해서 저녁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그렇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이는 곧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로 지으셨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도록 함으로 사망의 덫을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지으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복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지으셨지만 악한 마귀는 결코 사람이 복을 누리도록 놓아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 순간 사람들은 번성하며 충만하고 다스리는 삶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더 이상 수고하는 것이 저주에 허덕이는 삶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이 이렇게 저주 가운데 죽어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보고 계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저주로부터 다시 복된 인생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다시 말씀되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이 사망의 덫에서 사람을 빼내기 위해서는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만 대신 할 수 있기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죽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로 6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죄를 지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시편 51편 5절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우리가 했지만 그래서 아무런 삶의 희망도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망의 굴레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사망의 굴레를 다 멸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리를 악한 마귀가 어찌 눈꼴사나워서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욥을 시기한 악한 마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욥을 시험하던 것 같이 오늘 우리들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누구로 말미암았습니까? 악한 마귀가 그렇게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람이 잘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덫을 우리 앞에 펼쳐놓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전서 4장 1절로 2절의 말씀처럼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죄를 그치고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을 때를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 전서 4장 13절로 14절의 말씀처럼 이 고난이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이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금보다도 훨씬 귀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라고 하신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이 고난이 있음을 알아 순수한 믿음을 지키심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그대로 거두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말들을 합니다. 어째서 악한 사람들이 잘 살고 선한 사람들이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입니까?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같으시고 환난을 받는 우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몰라도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도리어 환난을 당할 것이요 우리들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베드로전서 3장 8절로 9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하거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물론 누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나도 그 사람에게 똑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는 나도 똑같이 망하는 자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복을 받아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그러니까 누가 우리를 저주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 스스로 멸망의 웅덩이를 파는 것이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코앞에 저주의 구렁텅이가 놓여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그리로 달려가고 있으니 정말 딱한 노릇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우리도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우리도 그들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이런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날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을 따라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게을리 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나는 내 이웃 아무개가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내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고 항변할 때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에 지금 예수를 전하다가 그로 인해서 욕을 먹고 심지어는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또한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요 그 복을 빌어주는 것의 제일은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언제든지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곧 그 문이 열려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만 입니다. 

그런데 아직 열려져있는 그 문을 내가 닫아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포기해 버리고 만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복된 자가 되어야지 결코 심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어떤지 잘 알고 계시다고만 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능력을 힘입으라고 하는 것이요 그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는 것은 결국 주님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 이제 우리 또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축복하고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해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줌으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다시 오시는 그날 모든 성도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는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온각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여전히 멸망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시고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된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의 복음을 알게 해 주신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멸망의 자식으로가 아닌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 성도들이 주님께 돌려드릴 영광은 바로 우리 성도로서의 바른 삶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섭섭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대접하여야 합니다. 

또한 말을 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가 섭섭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누가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하는 말은 삼가고 그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하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격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이 힘이 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껴도 칭찬만은 아끼지 마십시오. 정말 수고했다, 정말 고맙다고 하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트집만 잡으려고 하지 말고 잘못된 것만 들추어내려고 하지 말고 안 좋은 일은 좀 그냥 넘겨버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제일 마음 상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무엇이 안 좋고 무엇이 부족하고 하는 말들 아닙니까? 

사람마다 다 입장이 다르고 수준이 다릅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모르냐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실수를 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들어도 모르겠는 걸 어떡합니까? 배웠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어떡합니까?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지치지 않고 할 수 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그런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 때 그렇기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우리 모든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다시 오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선을 행하십시오. 항상 하나님만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했고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을 보상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도록 항상 선을 베풀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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