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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찾아다니시는 사람 (요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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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찾아다니시는 사람 (요 4:20~24)

우리는 공간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입니다. 보십시오. 주일마다 우리 교회가 빌려 쓰고 있는 이 건물 전체는 음악당으로 불립니다. 여러분이 앉아 계신 이 곳은 음악공연장 겸 대강당입니다. 이곳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로비가 기다리고 있고 화장실도 있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보시면 소강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층에는 방송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 밖으로 나가면 운동장과 주차장도 있습니다. 

각 공간은 용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어기면 참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화장실에서 강의 하거나 음악 연주하는 것은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또 화장실에서 보아야 할 일은 화장실에서 보아야지, 대강당이나 로비에서 보면 이건 대형사고요, 무질서이며, 일대 혼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각 공간과 공간 사이에 경계를 정하고 공간마다 서로 구별된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일정 질서에 따라 공간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성격을 띤 공간은 더 조심스레 사용합니다. 종교적 공간은 흔히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신전, 사원, 사당, 절, 예배당 등은 그 몇 예입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이 성전에서 절대자를 만난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성전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가 아니라 절대자의 것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전은 대단히 성스럽고도 극진히 대해 왔습니다. 

절대자의 것으로 구별된 성전을 넘나들 때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곤 합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성전을 드나들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어떤 내부 공간은 일반 대중들이 접근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대개 이런 곳은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 할 수 있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전 경계를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갈 때는 각 종교마다 일정 격식을 갖추게 합니다. 성전은 일반적인 공간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릴뿐 아니라, 절대자에 대한 합당한 예의를 표하게 하는 것이지요. 불교는 절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도록 요구합니다. 발리섬의 힌두교는 사원에 들어가려면 남자도 치마를 두르고 허리에 띠를 매도록 합니다. 유대교는 키파라고 하는 빵떡모양의 모자를 착용하도록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아예 물로 몸을 씻도록 요구합니다. 세상 때 다 씻고 절대자 앞에 정결하게 나가도록 하는 것이지요. 

절대자에 대한 개인이나 집단의 신앙은 흔히 이 성전을 둘러싸고 평가되곤 합니다. 과연 최상의 장소에다가 성전을 모시기 위해 힘썼는가? 최고의 재료를 성전건축에 사용했는가? 뿐만 아니라 최선의 예물로 성전제사를 드리고 있는가? 등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척도가 됩니다. 지금도 세계도처에 존재하는 웅장한 성전들을 바라보면 그 규모나 화려함에 압도를 당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성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며, 또 어떤 성전예배를 요구하고 계실까요? 본문에는 유대인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등장합니다. 본문 앞서 우물가에 앉은 예수님께서 먼저 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을 꺼리지 않고 말 걸어 온 유대 청년 예수님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고 상종을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그 폭정으로 인해 히브리인들은 신음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10개 지파의 사람들이 북쪽으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남쪽에는 유다지파가 남았습니다. 결국 왕국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된 것입니다. 남 유다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고, 북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본 따서 사마리아 땅 그리심 산에 별도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중 최초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 바로 그곳,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라고 믿어지는 바로 그곳,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 나타난 곳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곳에 성전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곤 이 그리심산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합법적인 원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제사 드리러 남 유다 땅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한 때 선민이었던 그들의 피는 차츰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너무도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유대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협조는커녕 방해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원수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우호적으로 대할 수 없었지요. 이런 배경을 알면, 누가복음 9장 51절 이후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고자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하는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 강도만난 유대인을 한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소위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어리둥절하였겠습니까? “아니 유대인이 나에게 말을 걸다니?” 뿐만 아니라, 5번씩이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지금은 남편도 아닌 사람과 동거하고 있다는 은밀한 수치도 예수님은 환히 꿰뚫어 보십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틀림없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종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자신의 수치가 지적되자 희생제물 드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찾는 성전이 따로 있고, 유대인이 찾는 성전이 따로 있으니 어느 성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지, 사마리아의 그리심산 성전이 옳은 예배처소인지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이 합당한 예배처소인지,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지? 여쭌 겁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도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내년도에는 어디서 예배드려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성전관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21절 상반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 이 그리심산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드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는지는 하나님께 그다지 중요한 것 아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사는  고정식 성전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선민들에게 처음 허락하신 예배공간도 고정식 성전이 아니라 이동식 성막이었습니다. 이동하던 히브리인들이 멈추어 장막을 치게 되면, 그 한복판에 성막이 세워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동할 때 성막은 접혀 눈에서 사라집니다. 성막은 필요할 때 잠시 보이다가, 이동할 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막은 붙박이 고정식 성전과 달리 초라했고, 매번 접었다 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 한참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붙박이 성전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고, 마침내 솔로몬 왕 때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건축했지요. 예, 히브리인들은 성전을 건축해놓고 성전 제사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착각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신다고 믿었고, 성전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성령충만하여 이 착각을 통렬하게 지적했습니다. 행 7:46-50,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사마리아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답변처럼,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의 설교처럼 어떤 성전에서 어디에서 예배드리는가는 하나님께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어떤 자세로 어떻게 예배드리는가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23-24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 교회는 영과 진리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인 뜻이 빈민자활, 통일사역, 인재양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요 산 제물이 됨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껏 편리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고정식의 보이는 성전을 지금 당장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예배 처소조차 연말까지 해결될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뒤돌아 갈 수 없습니다. 비록 옮기고 또 옮기는 이동식 예배처소라 할 찌라도, 그래서 지금보다도 더 큰 불편을 우리가 겪을지라도 계속해서 참된 예배, 산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히 11:13-16을 통해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사실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건축헌금을 최대로 드리고, 성전 가까이로 이사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 날마다 성전을 찾고, 성전에서 열심히 봉사한다면 이것도 아름답고 참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는 성전과 성전 예배를 귀하게 받으시는 것은 결코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나, 고액 헌금이나 값진 헌물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초라해 보이는 이동식 접이식 예배 처소라 할 찌라도, 드리는 예물이 동전 몇 닢 되지도 못할 찌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최대 사랑과 헌신 봉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귀하게 받으십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미 떠나온 본향을 다시 생각하고 뒤돌아가려는 분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 보이지 않는 성전을 사모하며 앞을 향해 가는 분들입니다.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심으로써 살아있고,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시길 원하는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 것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남편으로부터 버림 받고, 온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사마리아 여자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찾아다니시는 사람, 즉 <하 찾 사>되어 갔습니다. 우리 교회나 우리 각자도 <하 찾 사>되어 하나님께서 친히 한 성을, 가장 아름다운 한 성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 모두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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