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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여 내 영혼을 (눅 23:46) : 가상칠언(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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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내 영혼을 (눅 23:46) : 가상칠언(Ⅶ)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번째 하신 말씀은 운명하시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한 소절씩 나눠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리 형벌을 받는 동안에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형벌을 받는 대속자의 관계로 있었습니다. 구속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공적인 관계요 사법적인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버림 받으실 때에 “엘리 엘리”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부르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신분 관계에서 버림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구속 사역이 완성되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다 이루어지자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여.” 그 한마디 호칭 속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 주님의 신뢰와 애정과 친밀함이 느껴집니다. 무서운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겪었지만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애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친밀함 역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어색함이나 서먹서먹함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아버지여”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부자 관계라는 것은 인간 세계의 부자 관계에 맞대어 비교한 표현입니다. 상호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한 유비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아버지는 아들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성부만 존재하고 성자는 존재 하지 않으셨던 적이 결코 없습니다. 아들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아버지보다 한 계급 아래에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분 자체가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와 동등합니다. 이를 ‘동일본질’이라고 하지요. 다만 성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분명히 구별되시기 때문에 성자라 할 뿐입니다. 그분과 동일한 본질이시면서도 구별되시는 이런 독특함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 곧, 독생자라 불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내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하던 피조물을 양자로 삼아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후사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남자를 형제라 부르고, 여자를 자매라 부르는 까닭은 같은 아버지를 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집사님’하고 직분 명칭을 부를 때보다 ‘○○ 형제’ ‘○○ 자매’라고 부를 때 한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이라는 애정과 신뢰와 친밀감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참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며 살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 핏방울이 땀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양자인 성도들 또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대속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하면서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탄식할 만큼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나를 정금같이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인가 보다 해석하며 인내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임했는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슬픔이 생겼는지 도무지 해석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친밀함을 유지하셨기에 저주의 형벌을 다 이겨내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힘이 됩니다. 그분께 대한 신뢰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분을 향한 애정은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감사하며 기뻐하게 만듭니다. 

한 번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사람은 그 신분이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게 하셨습니다(롬 5:6, 8, 10).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답게 살기 원하고 이를 위해서 애쓸 때, 얼마나 그분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내 삶에 슬픔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의 친밀함을 항상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에 언급하신 “내 영혼”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임종 순간이 되면 중요하게 여기면 살았던 많은 문제들 중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눈이 열린다고 하더군요.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문제임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목적으로든 영혼을 사단에게 팔아버린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비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살고 있는 동안 영혼의 문제는 뒷전에 밀쳐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몰입된 채 살아갑니다. 

요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보면 예쁜 스티커를 모으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은 닌텐도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외모와 이성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겠지요. 철이 들면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과 좋은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집니다. 결혼 후에는 좋은 차와 좋은 집에 관심이 많아지고, 자녀가 생기면 자녀 양육과 자녀의 성적표에 관심이 많아집니다. 자녀가 자라면서 노년의 안락함에 대한 관심도 많아집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고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만, 문제는 그러한 관심들이 ‘영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쉽게 매몰시켜버린다는 점입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벅찬 현대 사회의 현실 때문에 영혼의 문제는 일단 잠시 접어두고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종교로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문턱을 낮추어 진리의 수호자로서보다는 행복의 안내자로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 활동들이 개인 행복 추구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교회에서조차도 영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혼의 문제를 뒤로 제쳐놓는 동안, ‘영혼 구원’ ‘영생’ 등의 문제로 미혹하는 이단들의 세력이 가라지처럼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비틀거리며 이단들이 가르치는 무료 신학원을 전전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했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 현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관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영혼은 보이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무관심하게 됩니다. 단지 먹고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에 더 무관심 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두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도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들 역시 영혼의 문제를 뒷전으로 던져버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관찰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 역시 미혹하는 이단 사상들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께서 지옥의 형벌을 감내하신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교회가 ‘내 영혼’에 대한 관심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환경들이 마련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내 영혼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으며, 언제 내 영혼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어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완벽한 남성과 완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이상적인 커플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온전한 사랑이 있었으며 환경적으로도 최상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그들이 여전히 에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수치심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를 보면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인간 조건이 영혼의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에덴도 지옥이 됩니다. 

첫 번째 아담과는 달리 두 번째 아담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최악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만족이 있었던 에덴과는 달리 십자가는 온갖 인간들의 모욕과 멸시와 조롱이 쏟아지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살피심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육체적인 만족이 있는 에덴과는 달리 숨 한번 쉬기조차 힘든 곳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평안히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는 십자가라도 평안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아버지의 손에 영원한 안식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애정과 친밀함, 영혼의 안식과 참된 소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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