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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수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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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수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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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해와 오해는 행복과 불행을 낳게 하고 이 차이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이해가 있는 곳은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요, 오해가 있는 곳은 그 자리가 바로 지옥이다.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가?이해는 내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것이고 오해는 타인의 입장보다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다. 오해는 도무지 상대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 오해는 서로를 등을 돌리게 하고 싸우며 결국은 단체는 분쟁으로 국가는 전쟁으로 내몰리게 되고 이 엄연한 현실이 내 중심으로 가득 찬 오해 때문이 아닌가?당신은 그래도 이 오해를 계속 고집하며 살아갈 것인가? 

오해는 50% 이상 사실이 아니며  설령 사실이라 해도 묵묵히 모른 채하며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으면 화가 복이 되고 불신이 신뢰가 되며 어느덧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만다.그래도 당신은 오해의 주인공이 되어 지옥 생활을 하며 살겠는가? 아니면 서로 용서하며 서로 용납하고 서로 이해하여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며 살겠는가?

이렇듯 오해는 이해를 상실하게 만들고 모든 관계를 식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심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더 나가 신앙인들의 가슴에 생겨난 오해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도 큰 타격을 줍니다.  

 
첫 번째 / 성경 본문 속에서의 문제 : 하나님 백성들의 상처, 고통, 문제

“하나님! 왜? 하필 지금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격하여 여리고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이지 “모든 것을 중단하고 할례를 시행하라”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기상으로 따져 봐도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40년간 광야 기간에 할례를 행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말 할례받는 것이 중요하다면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할례를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여리고성을 정탐한 정탐꾼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침없는 승리의 진군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있습니다. 모두 기가 죽어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명령을 내려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여리고성으로 진격하여 그들을 쳐부술 사기로 충천하여 있습니다. 자신만만합니다. 

그런데 왜 그 긴 시간동안은 잠잠하시다가 이제 와서야 그런 명령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또한 위치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면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요단강을 건넌 후 코 앞에 적을 두고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할례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만약 남자들이 할례를 행한 정보가 적군에게 흘러들어 간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생쥐가 되고 맙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이 당장 쳐들어온다면 할례의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가 전쟁을 수행할 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조상 야곱의 두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누이동생인 디나가 강제추행을 당하자 이에 격분하여 세겜 족속 하몰과 그 부족 모든 남자들을 할례를 받게하여 죽인 사건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겨우 시므온과 레위 두 사람은 할례를 행한지 3일쯤 되는 날 할례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세겜족속을 엄습하여 쉽게 모든 남자를 죽이고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이렇듯 할례는 싸울 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여리고성 남자들은 한 두명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땅에서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루며 살아오는 동안 잘 훈련된 군대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조직력도 뛰어나며 무기도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발달했습니다. 만약 그런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아무리 사기가 충천할지라도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수고와 가나안땅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한번 이방백성에게 죽고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 세상속의 문제 : 세상속에 있는 유사한 문제

오늘 날 세상 속에도 오해는 도처에 넘쳐 납니다. 이 오해 때문에 부부가 갈라서고 친구관계가 무너지며 교회는 깨어지고 심지어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재산을 잃어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오해”라는 작품에서 이런 내용을 소개합니다. 
한 어머니가 남매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린 시절의 가난한 생활을 못 견뎌 집을 나갔습니다. 가난 때문에 아들을 떠나 보내야만 헸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강변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모녀는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가족 생이별의 아픔을 경험했던 두 모녀는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릅니다. 두 모녀는 투숙객에게 수면제를 먹여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간 아들이 성공하여 오랜만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는 마을로 와서 자기 신분을 감춘 채 여관에 투숙합니다. 그 어머니는 그 청년이 자기 아들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날 밤에도 수면제를 먹여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발견된 그 청년의 짐 속에서 나온 신분증을 보고 두 모녀는 자신들이 살해한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며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아들을 던져 버렸던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합니다. 딸도 자살합니다. 

이렇듯 오해는 때로는 인간의 무덤이 되기도 가정 파괴의 주범이 되기도 하며 심하면 한 나라의 종말을 가져 오게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오해라는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속에 파고 들어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데 큰 장애물을 만들어 놓는데 있습니다. 


세 번째 : 성경속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위험한 적들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격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는 속 시원한 명령대신에 “모든 행동은 멈추고 즉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여러분!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란“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는 언약의 표시를 영원히 몸에 지니는 의식입니다.“하나님! 우리는 주님께서 택하신 족속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스런 일입니다. 목숨 건 일입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이제 살고 죽는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맡깁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불과 40년전 만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노예들이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몸에 베어버린 애굽의 문화와 습관, 생각과 우상숭배의 잔재들을 깨끗이 잘라내고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의 문화와 습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가리라는 결단이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낫기를 기다리면서 불합리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오해대신에 이런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오해가 풀리면 예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경험을 해보셨지요? 오해대신에 확신이 찾아들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나를 믿고 따르니 잘했다. 장하다. 이제서야 비로소 너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었다.” 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풀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길갈에서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리고성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무너졌습니까? 아닙니다. 말과 병거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을 오해없이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습니다. “너희는 아무 말 말고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뀌씩 돌아라.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 일곱바뀌를 돌고 다함께 외쳐라 그러면 무너질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불합리한 명령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 말없이 하나님이 어떻게 이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실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돌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명령은 오해거리가 아닌 이해거리이고 순종거리이며 최상의 축복거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 세상속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신실한 신앙인인 어떤 교수님이 대학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대학 첫 강의 시간에 교수님은 제법 똑똑한, 하지만 괴짜인 남학생을 만났습니다. 강의시간마다 입실하는 학생의 머리카락은 늘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한번도 신발을 신고 오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진눈깨비가 내리건 이 학생은 언제나 맨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학생의 마음속에 종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대학 맞은 편에 현대식으로 깨끗하게 잘 지어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이 교회도 대학생 전도에 힘쓰고 있어서 대학생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드디어 이 남학생은 생애 처음으로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남학생은 헝클어진 머리에 청바지와 티써츠를 입고 맨발로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당돌하고 예의없는 태도에 사람들은 약간 언짢아하는 기색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남학생은 빈자리를 찾아 통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날따라 교회에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아 앞자리까지 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당 맨 앞 양탄자 바닥에 그냥 웅크리고 않았습니다. 이것이 대학생 모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정말 이상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남학생 때문에 예배당 안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나이가 지긋한 신사 한분이 통로를 지나 그 학생에게로 걸어갔습니다. 웅성대던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예배당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신사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그 신사는 그 남학생에게 다가가 몸을 구푸리더니 그 학생 옆에 앉았습니다. 

그날 그 신사와 남학생은 함께 바닥에 앉아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예배시간에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교수님과 온 회중 가운데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신사야말로 오해가 가득한 예배당에 따듯한 이해를 심은 작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주일날 신사가 보여준 행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모두 알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이해와 사랑의 행동이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바로 그 남학생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그런 식으로 주어집니다. 받는 사람은 그 선물이 그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한 채 우리의 오해를 뚫고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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