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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인생 (시 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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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복을 받는 인생 (시 67:1~7)

여러분은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제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마른 막대기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왜 마른 막대기인가?  마른 막대기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나 혼자만의 인생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여러분 그렇잖습니까?   이 세상을, 어디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만,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그에 대한 결과를 보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튼 열심으로 치면, 전 세계에서 1등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줄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지런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민족이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10년 전에 IMF의 큰 위기를 맞았었고, 지금도 그 여파는 계속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여러 가지 환경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 민족이 이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의 불신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까지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런 삶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신앙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질 못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바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향해,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구원의 줄을 던져 주고 계십니다.   아멘!!! 
그러면 그 줄을 우리가 견고하게 꽉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세계로, 축복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실제로 보면,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우리의 신앙이 연약해서, 그 구원의 줄을 온전히 붙잡고 있지를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줄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대로, 우리의 신앙이 연약한 대로, 그 구원의 줄 또한 약해지기 시작한다는 거지요.  그 줄의 마디마디가 삭아지면서, 아주 위태롭게 그 줄을 당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힘이 있겠어요?   거기에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겨우 자신의 신앙만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 성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를, 다른 데서 해결해 나가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 속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는 만큼, 우리의 신앙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얼굴을 돌리고, 또 우리의 손을 들 때에, 그만큼 우리의 신앙은 강해지게 되고, 능력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을 찾고, 또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 무슨 별 볼일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재능과 배경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전 1 : 26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다시 말해, 세상 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할렐루야!!  
누가 우리를 택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생활하게 될 때에, 세상의 강한 자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 성도들을 향한,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 나와 예배하며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실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적으로 보잘 것 없고,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이지만, 이런 마른 막대기와 같이 메마른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만 되면,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모세에게 지팡이가 하나 있었지요?  그 지팡이는 자신이 치는 양떼들을 모는 지팡이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자신의 양떼를 지키고, 때로는 덤벼드는 들짐승들을 물리치기도 하는 무기로도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목자들의 삶을 보면, 이 지팡이가 별로 큰 쓰임새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한 몸 지키기에도, 급급한 무기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되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홍해를 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손길에서부터  구원해 냈고, 또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만들어 그들의 갈증을 해결시키는, 기적의 지팡이가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놀라운 능력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그 능력이 지금도 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비록 마른 막대기와 같이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저를 붙잡아 주셔서 장차 모세의 지팡이와 같이 능력의 지팡이, 기적의 지팡이와 같은 인생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반드시 제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소원, 여러분도 가지시고, 장차 이런 능력의 인생, 여러분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소원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원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소원을 가진 다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타내야 할 신앙이 모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감나무 밑에 가만히 누워서,  그저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 11 : 12절에서, 말씀하지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는 자, 어떤 도전입니까? 
천국의 축복을 향한 도전, 하늘에서의 축복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이런 영적의지가, 하늘의 축복을 향한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하늘의 신령한 축복, 또 이 땅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의 현재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왜 복을 주시는가?   긍휼함을 입었기 때문에 복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먼저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긍휼” 이란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고, 동정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과연 어떤 성도들이, 이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현재의 신앙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항상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긍휼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아니,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어찌 믿음이 부족하고, 신앙이 연약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밥 한 그릇 사먹을 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지만, 한 사람은 그저 방에만 들어 앉아 있으면서 누군가가 먹을 걸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창피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거리에 나가 구걸이라도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거리에 나가 구절을 하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사람들의 긍휼함을 입겠습니까?   구걸이라도 하면서, 비록 창피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사람들로부터 긍휼함을 입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 우리가 그냥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허락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신앙여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신앙적 노력을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내어 보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질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열심이질 않습니다.  
내가 현재 충분히 예배드릴 수 있는데도 예배에 빠집니다.  내게 충분히   기도할 시간이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충분히 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봉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신앙생활을 남들과 똑같이 해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만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내면에 감취어진   신앙의 모습만을 바라보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지를 않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열의 능력이 있음에도, 다섯만 내어 놓는 정도의 신앙, 사람들은 남들보다 많이 내어 놓은, 외형적인 다섯을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녀가 5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50점은 뭘 의미합니까?   낙제를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괜찮은 신앙 같애도,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낙제점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에게, 그 은혜의 얼굴을 비춰 주시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 대단할 걸 요구하시겠습니까?   우리 형편과 처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역량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그것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헌신이요 봉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헌신과 봉사를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습니다.  그저 동전 두 닢이지만, 그 과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넣었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주님이 그 가치를 더 인정을 해 주시고, 더 귀하게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가 벌써 절반 이상이 지나가고, 또 8월 달도 절반  가까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 있지만, 남은 한 해 동안이라도, 우리의 흐트러진 신앙을 다잡아서, 현재의 신앙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귀한 신앙으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속에 놀라운 축복을 덧입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는, 전도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 본문 2절, 3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전도였습니다.  믿습니까?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전도였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목적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이 전도가 빠져 있다면, 그런 신앙생활로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으며, 복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모세의 지팡이를 예로 들었는데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쥐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폼 잡으라고요?   그 지팡이로 자기 양떼를 치라구요,  또 그 지팡이로 자기 자신을 지키라구요?  아닙니다.  왜 지팡이를 주셨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자신도 아닌, 양떼들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학대와 압제에서 벗어나게 만들라는 사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할 때, 그의 앞에 가로막힌 홍해가 갈라지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메마른 광야에서도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좀 더 쉽게 질문할까요?  신약에서 가장 많은 능력을 나타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까?  
베드로는 주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수제자지요?  그러나 실제 성경을 보게 되면 신약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능력을 많이 행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제치고 가장 유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다른 제자들이나 사도들보다 훨씬 더 전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날도,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오늘날도,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축복해 주십니다.  아멘!!  그냥 우리의 삶에 필요한 정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충만한 은혜입니다.  충만한 축복입니다.  삶에 은혜와 축복이 흘러  넘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백배의 축복을, 우리가 소원하는데요.  이러한 축복이 누구에게 나타  나겠습니까?  특별히 전도하는 성도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명기 28장을 우리가 “축복장” 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3절을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를 합니다.  성읍이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한 곳에서는 무엇을 해도,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사업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많은 곳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들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러한 들판이 아닙니다. 
사막과 같은 광야입니다.  인적은 고사하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 볼 수 없는 황량한 땅입니다.   어찌 이러한 곳에서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없는 곳에 사업을 한들 잘 될리 있겠습니까?  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도하는 성도들의 삶에는, 이런 들과 같은 상황에서도 복을 받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왜입니까?  전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 그들의 삶의 복의 지경을 넓혀 주시는데,  특별히 사업의 지경을 넓혀 주셔서, 다른 성도들보다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누리게 해 주시고, 부요한 가운데 살아가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 28 :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이 약속의 말씀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동일한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도 보니까,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이 말씀도,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동일하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 원초적인 명령인, 전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힘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잘 한다고 자부해도, 전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앙꼬 없는 찐빵인 것입니다.  물 없는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전도하는 신앙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넘치는 은혜와 축복 받으시고, 그것이 삶에 능력이 되어서, 여러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도를 넘어, 선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5절 말씀을 보세요.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지금 이 시편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속한 민족을 넘어, 열방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주님이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물들에게 나타난 공통된 특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 선지자, 그가 간절하게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민족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였습니다.  영적 부흥과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은 민족의 복음화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꿈은 더 크고 위대했습니다. 
여러분, 합 2 : 14절 말씀을 보세요.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할렐루야!!!!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이 최종적으로 하박국 선지자가 꿈꾸는, 위대한 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바나로 가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생각했습니다.  왜입니까?  그 당시에 서바나는 땅 끝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아니하고, 로마의 감옥에서 결국 순교하고 말았지만, 그는 결국 그 당시 세계 중심지였던 로마를 복음화 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순한 전도자라 불리지 않고, 선교사로 불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왕 우리가 전도하는 것, 이제는 열방을 품고 선교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나라도 보세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선교하는 나라가,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유럽이, 또 현재의 미국이, 왜 강대국이 되어져 있습니까?  선교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만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도 보세요.  어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까?   선교하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아멘!!!  
선교하는 교회는, 부흥의 맥이 끊기 질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교회의   젊은이들이 더 불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를 지원할 뿐 아니라,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어찌 복을 받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집니다.  선교하는 개인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 축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자녀들에게 나타나게 되어진다는   겁니다.  자녀들이 복을 받아, 세계로 진출합니다.  재능이 뛰어나게 해 주셔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 6절과 7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우리에게 나타난 축복으로, 세계가 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 성천 교회는, 이제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형식적인 선교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교, 나는 가지 못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마음은 그 선교지로 보내고, 나는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곳에서 필요한 물질은 후원해서 보낼 줄 아는 신앙, 

이런 신앙이 어느 특정한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가운데 편만하게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우리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 교회가 복을 받아 부흥하고,   또 선교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여러분의 자녀들과 자손들이, 장차 세계적   인물이 되는 축복, 다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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