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 (출 32:25~29)

  • 잡초 잡초
  • 655
  • 0

첨부 1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 (출 32:25~29)

아프리카 얼룩말에 관해,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원래는 얼룩말이 아니고, 까만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불만이 많았어요.  “왜 나는 이렇게 새까맣고, 못나게 태어났을까?”  늘 자신의 모습을 불평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원숭이가 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뒤에 언덕 위로 올라가면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동굴 속에 들어가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까만 말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언덕 위로 달려가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동굴에 들어가서 소원을 빕니다. “나는 하얀 말이 되고 싶습니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소원을 빌고 동굴 밖으로 나와 보니까, 진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꼬리 끝까지 하얗게 변해져 있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온 들판을 뛰어 다니며 다른 동물에게 뽐내며 다녔습니다.  이렇게 몇 일을 지냈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까만 말이었을 때는, 밤에   어두울 때 숨기도 좋았는데, 하얀 색이 되다보니까, 밤중에 잘 숨을 수도 없고, 자칫하면 맹수의 밥이 되겠구나.”  또 까만 말이었을 때는, 아무데나 뒹굴어도 별 상관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잘못해도, 때가 묻고, 목욕을 해야 하고,  귀찮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까만 말이 더 좋은 것이구나.” 다시 언덕에 올라가 동굴에 들어가서,  까만 말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소원대로 까만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까만 말이 되어 며칠을 살다보니, 흰말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며칠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동굴에 올라가, “까만 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또,  흰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반복을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이냐?  결단을 하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흰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나갈려다 생각해 보니까, “아니야,  또 까만 말이 되고 싶으면, 다시 오는 것 귀찮으니까, 까만 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또 생각해 보니까 아닙니다.  “흰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자꾸만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데, 갑자기 동굴이 무너져 내립니다.    놀라서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동굴은 무너졌고, 자기는 보니까 알록  달록한 얼룩말이 되어져 있더라. 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꾸만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을 살아도,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약하고,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괴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신앙의 중심이 자신의 삶에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세상과 신앙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왔다갔다 하다보니까, 세상에서도, 신앙에서도 어느 쪽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늘 어정쩡한 상태,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태로 늘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돌이키고,   또 결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에, 일어난 사건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두 돌 판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 산에 불러 올리셨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간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지내게 됩니다. 
그 때에 산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지금까지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회고하면서, 이제 곧 받게 될 십계명을 생각하면서 신앙으로 준비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없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는 불신앙과, 불평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신앙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39일째 되는 날에,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와서, 외칩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사람 모세,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냐?  어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라.”  
아마 아론이, 백성들의 위협에, 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모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녹여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소는 애굽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섬긴 신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가졌던 그 신앙, 그 모습 그대로,  지금 밖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주변에 둘러  서서, 이 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공포를 하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춤을 췄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론이 총 지휘를 하는 가운데, 백성들은 엎드리고 일어나고, 뛰고, 춤추고, 뒹굴고 땅을 굴리면서,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어떠한 모습입니까?  애굽의 우상 섬기는 자들이,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행하는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연출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다음 40일 째 되는 날, 모세가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아 양 손으로 들고 내려오다가 이러한 모습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모습을 본 모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저들 앞에 하나님의 계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십계명 돌 판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금 송아지를 전부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 백성들로 하여금    다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진의 문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백성들을 향하여 엄숙하고,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다 내게로 나아 오라.  거기 있는 자들 중에,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지금 당장 다 나에게로 나아 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죄악의 유혹을 받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때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죄악에 물들어 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다 내게로 나아오라.”  우리는 이 명령 앞에,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금송아지 편에 설   것인지,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편이냐?  금송아지 편이냐?  양자 택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청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이냐?  금송아지, 세상, 죄악 편이냐?”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쉽게 내리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최종적인 결단입니다.  이 결정에 의해, 우리의 생 자체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인생에 있어서, 결단이라고 하는 것이, 피라밋 형태를 이루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래에는 많은 결단들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결단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결단은 어떤 결단이겠습니까?  일상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옷을, 무슨 옷을 입을까?   결단해야 합니다.  
넥타이는 무슨 색깔을 맬까?    주부들 반찬을 뭘 할 것인가? 
수도 없는 우리의 일상적인 결단들이 있습니다. 
이는 가장 많은 결단이기 때문에, 피라밋의 제일 아래에 있는 결단입니다. 

좀 더 위로 올라오면, 더 중요한 결단들이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갈 것인가?  어떤 친구를 사귈 것인가?  무슨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이는 일상적인 결단보다는 더, 중요한 결단입니다.   이 결단은 우리의 생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행복을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되면 큰 아픔과 고통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많은 결단이 아니기 때문에, 피라밋의 중간쯤 되는 결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피라밋의 정점에, 최종적 결정과 선택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영원을 거는 선택입니다.  이 결단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앙적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세상 편에 설 것인가?  이 결단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가전제품 선전할 때에,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이 신앙적 결단,  이것은 십년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자 택일의 문제입니다.  여기는 두 진영, 하나님의 진영이   있고, 금송아지 진영이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원수를 위하느냐?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중간 지점에 머물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하나님의 원수의 편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밀리고 당기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섞여서 전투를 할 때에, 남군과 북군이 서로 옷을 보고,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구별해서 총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북군은 군복이 청색이고, 남군은 군복이 회색입니다. 
이렇게 군복이 다르니까, 서로 옷을 색을 보고,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을 하는데, 어떤 강도 떼가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강도 떼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칫하다가는 남쪽 북쪽 다 총에 맞아, 이게 성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얕은 꾀를 썼습니다.  양쪽으로부터 다 보호를 받자, 그러니 우리는 위에는 북군의 청색 옷을 입고, 아래는 남군의 회색 옷을 입자.  얕은 꾀를 써서, 위에는 청색 옷을, 아래는 회색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북군은 우리 편인 줄 알고, 안 쏠 것이고, 남군도 회색 바지를 보고,   우리 편인 줄 알고 안 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지나가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양쪽에서 다 총을 쏴 가지고, 다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삶에 있어, 중간 자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눅 11장에 말씀하셨지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중간 자리는, 하나님의 반대편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편이냐?  세상의 편이냐?   여러분, 분명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선택의 결단은,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책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고   있을 것입니까?   어느 때까지 그렇게 끌려가듯이 살아가시겠습니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새로운 신앙의 출발을 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모든 만물들이 새 봄을 맞이하는 이 때에, 우리도 이제 새로운 신앙으로의 결단이 필요한데, 아직도 죄악된 세상의 구습을 끊지를 못하고, 하나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다면, 결코 여러분은      이 2008년도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점점 세상에 깊이 빠져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죄악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갈 수가 있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우리의 인생에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 철학자, 키엘 케고르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철새가 겨울이 다가오기에, 따뜻한 곳을 향하여 날아가게 됩니다. 
막상 날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먹을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철새가 생각하기에, “내가 먼 여행을 해야 하니, 영양보충을 좀 해야 하겠다.” 생각하고는, 실컷 먹었습니다.  다음 날 떠나야지 생각하면서도, 하루만 더 먹고 떠나자, 또 먹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먹었습니다.  이렇게 며칠 간을 계속 먹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철새는 이제는 떠나야지,  힘차게 날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쪄서 몸이 무거워져,  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미루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늦기 전에, 지금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는 모세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히브리 원문의 의미는, 이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가 누구냐?   내게로 나아오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단을 했으면, 하나님 편으로 나아옴으로, 행동으로, 그 결단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해서, 마음 속으로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 결단하고 끝내는 것,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우상의 집에서 빠져 나와, 자기 스스로 걸어서 하나님의 진영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들아,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같은 집에서 맛있는 것이란 맛있는 것은 다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호의호식하며 살았지만, 죽어서는 그 끔찍하고   비참한 지옥에 갔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거지로 살고, 불쌍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갔단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중에 누가 되고 싶으니”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용감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요, 살아서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어서는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단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부자처럼 살겠다는 것입니다.세상 것 조금 더 즐기겠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더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편에 나와야, 나중에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모습으로, 당당하게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편이 아닙니다.  

은밀하게 세상을 즐기고, 쾌락을 즐기며, 아직도 세상 것 아직도 끊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편으로 결정했으면, 이제는 거기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의 결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하시기 바랍시다.  행동없는 결단은, 결단이 아닙니다.  
지금 나오십시오.  끊어야 할 것은 끊고, 정리할 것은 정리 하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끌려가듯이 살 것입니까?   결단을 했으면,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이 변화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가 있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단했으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모세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단하고 하나님 편으로 나오면, 이제는 끝났다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살 것이다.  주님 품에 안겨서 천국까지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내가 하나님 편에 서 할 일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 드리고, 은혜 받으면 그저 행복하고 좋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본문에,  하나님 편에 나아온 레위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편에 나온 것으로 끝이었습니까?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각각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문까지 왕래하면서, 그들은 금송아지에 속한 자들을 다 죽이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이 일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향해 헌신하는 모습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왔으면, 하나님이 이제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실 할 때 비로소, 내 결단이 온전한 결단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할 때에, 우리가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헌신하고 있습니까?  헌신해야 합니다.  아셔야 할 것은, 이 헌신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입니까?   방금까지 이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형제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칼을 가지고 다 죽여야 했습니다.  

얼마나 이것이 힘들고 가슴 아프고, 괴롭고 쓰라린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어떠한 희생을 각오  하고서라도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헌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를 너무 쉽게 믿으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희생하려 하지를 않습니다.  아무것도 헌신하려 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내 모든 것을 요구하고, 네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를 위하여 살으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의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자원을 해서   가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청년들이 독립군에 입대를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질문 앞에 분명하게 “예” 라고 대답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이 이렇습니다.  첫째,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세 가지 질문 앞에 분명하게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입대를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르는데, 우리는 무슨 각오를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각오를 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헌신합니까?  무엇으로    충성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을 따를 때를 생각해 봅시다. 성경을 보니, “이에 저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주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도 포기하고, 방금 잡은 물고기도 포기하고, 심지어는 집도 포기하고, 가족도 포기하고,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바치므로, 비로소 그들이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드려, 주님을   위하여 살아드려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 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데, 29절에 보니까,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들이 생명을 걸고, 주신 사명   감당하며 헌신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면,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을 나는 모른다 하시는, 그렇게 냉정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와 영화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의 일을 생각하고,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에게, 기어코라도 우리 하나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제 생각하십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여러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결단했으면 행동으로 나타내십시다. 
세상에서 나와 주님을 따르고, 주님 주신 사명 감당하며, 주의 일에 봉사  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신하기 시작할 때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 새로운 축복이 함께 시작됩니다.  모든 만물들이 새 봄을 맞이하고, 열매 맺을 준비를 하고 있을 이 때에, 우리도 새롭게 신앙의 헌신을 다짐하고, 결단하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이 놀라운 은총, 반드시 누리시며 살아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