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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 서편을 공략하라 (민 3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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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서편을 공략하라 (민 32:6~9)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땅이지요. 그 가나안 땅은 그 백성들에게 있어, 거룩한 비전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이루기가, 참 만만찮았지요.   왜입니까? 
그 가나안 땅에는, 이미 정착하고 있는 기존의 부족들이 있었고, 또 그들이   가나안의 땅 대부분을 차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기도 변변찮았고, 사람의 수는 많았지만, 군대라고 하기는 너무나도 엉성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하고서, 그들이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보통 믿음을  가지고서는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땅을 정복하고, 개척해 나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그 땅을 향해 전진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나안의 정복 사업이 어디까지 진척되어져 나갔습니까?  가나안 땅, 요단 동편까지  정복해 들어갔던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 하나로, 이런 업적을 이루어내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이런 승리의 결과 때문에, 그들이 진군할 때마다, 그들의 정복 대상이 되었던 그 땅 거민들이, 두려워 떠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수 2 : 9절 말씀을 보세요.  여리고 성의 백성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할렐루야!!!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요단 동편을 정복한 승리에 도취되어, 더 이상 나아가질 않고,  이미 정복한 땅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계속해서 나아가질 않고, 요단 동편 땅으로 만족해했을까?  땅의 비옥함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이미 그들이 차지한 요단 동편의 땅은,   그야말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땅이  무엇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런 비옥한 땅을 차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나갈 필요성을 못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에 머물기는 소원했고, 더 이상 전진해 나가려고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4절과 5절 말씀을 보세요.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이제 여기 머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일언지하에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한 마디로, 택도 없다는 겁니다. 
이런 요청을 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을 오히려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세가 이런 요청을 하는, 이 두 지파 자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모든 지파들 가운데 먼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가나안 정복 사업에도,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자들이었고, 또 그 결과로, 먼저 요단 동편에 있는, 물과 초목이 넉넉한 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결과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아직도 땅을 분배받지 못한 열 지파의 자손들이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지파가 먼저 땅을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룩한 정복 사업에서 빠지겠다고 하면,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위였냐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을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발생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모세가 그들을 책망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이런 요청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흐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그들만의 노력이었겠습니까?  합력해서 이룬 결과였다는 겁니다.  열 두 지파 자손들의 공동의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열 두 지파가 똘똘 뭉쳐서, 이미 정착해 있었던 가나안 거민들을 몰아내며,   요단 동편의 그 비옥한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의 연합에서, 자신들은 이제 빠지겠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나는 얻을 것 얻었느니, 이제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는 식인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그들의 발상,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이제까지의 연합의 목적을, 의심케 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연합 이었습니까?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자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입니까?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외치고, 또 거룩한 사명을 외쳤지만,  실상은,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파 간의 연합도, 거룩한 정복 사업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용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에게 이런 이기심이 작용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고 나니까, 그 이상 고생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안주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준 생각입니까?  사단이 준 생각인 것입니다.  연합을 깨뜨리고, 욕심이 사로 잡혀, 결국은 전체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사단의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빠진 상태에서,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힘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이 두 지파,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가장 용맹스럽게 싸웠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빠지면, 나머지 열 지파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들이, 이런 요청을 하며, 두 지파는 남겠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만 살고 보겠다는, 철저한 이기주의의 극치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행동을 보면서, 여러분도 나름 분노를 느꼈을 줄 압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참 나쁜 놈들이다.  그런데 보세요.  그 나쁜 놈이 누구이겠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나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상이, 싹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참 인정하지 싫은 이야기지요.  그러나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보세요.  이런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같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언제든지 연합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연합이 아닌, 공동체가 아닌, 개인주의, 나아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제는, 마치 현대교회의 특성인 것처럼까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이제는, 오늘날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설교 중에 연합과, 공동체를 강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각 자가 하는 것이지, 왜 더 이상 연합과 공동체가 필요하냐?  자기가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으면 될 것 아니냐?  

오늘 본문에,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까?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를 게 있습니까?   똑같다는 거지요.  
모세는 그들이 이런 요청을 할 때에, 그들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책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개인주의 신앙 또한, 하나님께 책망들을 수밖에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남들보다 더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없고, 평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이 지금 남들보다 더 축복 가운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복을 받아 앞길이 풀리고, 남편의 사업이 잘 되고, 건강이나, 물질이나, 명예, 이런 것들을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풍성하게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은혜를 누리고, 이런 축복을 누리는 것,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잘 해왔기 때문에 누리게 된 분복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것은,  이런 은혜와 축복이, 단순히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해왔기 때문에 얻게 되어진, 분복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바로 교만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 생각, 지금 이 순간부터 버리시길 바랍니다.  
미약할지라도, 지금 내 옆에 있는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줬고, 아멘!!  미약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우리 성천 공동체의 많은 성도들이 새벽마다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고, 또 중보기도를 통해 날마다 간구하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믿습니까?  내가 남들보다 먼저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어찌 개인의 신앙 운운하며, 남을 돌아보지 않고, 교만하게 자기 신앙을 자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겸손하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늘 섬기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고백했지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할렐루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먼저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나는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교회와 너희를 얼마나 핍박했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고, 또 나를 위해 기도로 후원해 줌으로, 내가 지금 감히 사도라 불리우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고 있다.  
성도들을 향한 감사의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또 성도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기주의 신앙, 개인주의적인 신앙, 이제는 버리시고,   교회 안에 아직까지도 축복의 분깃을 얻지 못한 형제와 자매들을 돌아볼 줄 알고, 여러분의 남은 생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섬길 줄 아는, 아름다운 신앙의 삶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자손들을 책망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지금 만족하고 머물러 있고자 하는 땅은, 정작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한 땅은, 요단 동편이 아닌, 요단 서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단 동편에서 그냥 머무르겠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이 명령하신 정복 사업이 끝이 나질 않았는데, 어찌 이곳에   머무르며 안주하려고 하느냐?  
그러니 그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모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요단 동편의 땅도,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차지할 땅은, 이 땅보다 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될 것이다.  아멘!!!   

그 남은 땅, 요단 동편의 땅까지 계속해서 진군하라.   이것이 모세의 주장이고,  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적인 상태, 계속해서 주의 깃발을 들고 전진해 나가질 않고, 현재에 주어진 은혜와 축복에 만족하고, 더 이상 영적 싸움을 하려고 하질 않는, 오늘날 한국교회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 은혜와 축복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가 이렇게 선진국 부럽지 않게 잘 살고, 부요한 나라가 되었을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앞선 신앙의 선배,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으로 무장하며, 힘써 세상과 싸워 이긴 까닭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70년대부터 시작된 믿음의 역사가, 80년대,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놀랍게 성장하고 부흥하며, 교회가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마다 부흥하기 시작했고, 또 성도들의 삶에도 무한한 복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때 받은 은혜와 축복이, 지금도 지속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옛날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이 싸웠던, 거룩한   신앙의 싸움을, 이제는 하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그들이 이룩한 업적 속에서, 그들이 취한 축복의 땅에서, 그저 만족하고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현재 머물고 있는 자기 땅에서, 교회를 성처럼 높이 쌓아가려고 하고 있고, 또 성도들 개개인도 현재 머문 그 축복의 땅에서, 그저   자기 이름만 높여 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더 이상 전도나, 선교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말이냐?  선교와 전도를 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느냐?   너무 지나친 판단 아니냐?  예, 맞습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선교와 전도를 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애당초 교회와 성도들에게 명령하신 그 목적과, 또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바라시는 그 역량의 크기만큼, 오늘날도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져가고 있느냐?  이런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분명 전에 와는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교회의 모습과, 또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낸 신앙의 모습과,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의 모습은,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에 신앙의 선배들이 이룩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건물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높이 쌓는 것이, 그들의 신앙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신앙의 목적은, 오직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복음의 증인 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신앙목적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았고, 헌신할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명령이라면, 그들은 주저 없이 순종했습니다.  
노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예스, 예스, 예스, 아멘!!!  순종했습니다.  아니 복종했습니다.  무조건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맹목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삶에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해, 지금까지 그들이 받은 은혜나, 축복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시고자한 은혜와 축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더 큰 은혜를 향해, 더 큰 축복을 향해, 오직 순종과 헌신을 통하여   그렇게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서, 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이런 신앙의 모습이 별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정체된 느낌이 듭니다.  아니, 이미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이제는 17%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 여러분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이 수치도, 그나마 고령화 사회가 되어,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 그들이 이제 얼마 후에 떠나게 되면, 아마 급격하게 이 수치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도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형식적인 전도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다하는, 그런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니 나 한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몸까지 다 버리셨는데,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려 하지를 않습니다.   교회의 예산, 교회의 재정, 이것이 우리의 선교와 전도를 위한 희생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거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공적인 재정 만으로가 아닌, 사적인 물질을 동원해서라도, 우리에게 맡겨진 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해 나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딤전 5 : 16절에 보세요.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구제와 관한 부분이지만, 전도나 선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다시 말해, 교회의 재정만 가지고 구제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니가 해라!!   내가 너에게 준 물질의 축복이 있지 않느냐?   그 물질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나는 니가 그 일을 헌신해서 하기를 원한다.”  아멘!!!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제가 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여, 제-가  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아닌, 남이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해도, 남이 하기를 바라고, 전도를 해도, 선교를 해도 내가 아닌 남이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칭찬 듣고, 부흥하게 되면, 마치 자기도 한 몫 한 것처럼 생색을 내지요.   손도 안대고 코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안 속습니다.  다 평가하십니다.  다 저울질 하십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내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믿음이 부족하다.  순종이 부족하다.  헌신이 부족하다.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채운 공력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하고 헌신한 사람들, 무슨 일에요?  하나님의 일에, 특별히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전도와 선교에,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기의 소유를 희생하면서까지 헌신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더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과거 지향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현재에 안주하며 머무르는 신앙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전진하고 달려가는, 미래지향적인 신앙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갈렙과 같이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비전을 향해 주저 없이 나아가는 신앙, 이런 신앙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보세요.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얼마만큼 이루었습니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요단 동편 땅의 넉넉한 소산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분명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열둘의 축복 중에, 겨우 둘을 얻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인생의 만족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래 주시고자 하는 만족이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에서 누릴 더 큰 만족과, 더 큰 기쁨이 예비 되어져 있는데,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를 못하고, 지금 현재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더 이상 사명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현재에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다면, 어찌 하나님이 계속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겠으며, 여러분의 장래를 인도해 주시길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이런 성도들과는, 동행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행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맞아야,   길도 같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니까, 그의 일생을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그의 삶에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 마음에 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는 인생은 어찌 되겠습니까?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면 그 때부터, 인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소유하고, 자랑했던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져 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사라지게 되니, 결국 그 인생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 사실 그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물 없는 오아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앙꼬 없는 찐빵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그들을,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인생이 다시금 대적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게 되고, 노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금 영적인 긴장감을   갖추는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으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대는 경쟁력의 시대입니다.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결국 도태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에게 지고, 세상에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갖추어야 될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오직 신앙의 힘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조건 사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  그 신앙의 힘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는, 아직까지 땅을 차지하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모두가 출애굽한 구원의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축복은, 모두가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불과, 두 지파만이 받았을 뿐입니다.  아직도 남은 열 지파 사람들은,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아직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질 않고, 또 하나님의 축복을 확실하게 체험하지 못한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부터라도, 내게 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 사모하면서, 신앙생활 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 하시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회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사명, 사단과의 영적전쟁인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꼭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의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왜요?  그것이 그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들과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땅을 차지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얻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아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신 직분에 충성하고, 또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런 사명이 없이, 이런 충성이 없이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은 마치 광야에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죽은 출애굽 1세대와 같이, 허망한 인생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기름진 요단 동편의 축복의 땅을 얻은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성도들을 위해, 우리 성천 공동체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축복의 땅을 다 얻을 때까지, 그들을 섬기며, 후원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누구보다 열심으로 앞장서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요단 서편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세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에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세요.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그들이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 소리에, 모세가 실망해서   그들을 책망하고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이런 개인적인 섭섭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에 미치게 될 영향력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다른 지파 사람들을  낙심케 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한 것은, 이런 모세의 책망에,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을 굽히고, 모세의 뜻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롭게 자신들의 신앙을 일으켜 세워, 남은 정복 사업에 앞장서  나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  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  할렐루야!!!  
바로 이런 신앙을, 하나님은 일찍이 그들에게서 원하셨다는 것이지요. 

신앙이 앞 선 자, 먼저 은혜를 받은 자, 먼저 축복을 받은 자들이, 아직 땅을  차지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끝까지 수고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신앙,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원하시는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이들의 신앙, 얼마나 위대하고, 용감한 신앙입니까?  이들은 이미 얻어진 육신의  평화로운 정착 생활을 포기하고, 남은 땅인 요단 서편을 정복을 위해, 하나님의 전사가 되기를 소망하며, 자신들을 헌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자녀들과 아내, 그리고 자신들의 재산을 오직  하나님의 지키심 속에 두겠다는 믿음의 선포였으며, 40년간 고대했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겠다는 각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동참한, 모든 백성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결국 정복하지 못했던 요단 서편의 땅도 다 정복하게 되었고, 그 정복한 땅을 모든 지파들이 고루 분배 받아, 정착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들이 이런 믿음과 신앙으로 완전하게 정복한 가나안 땅이 어디입니까?  
지금의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 세계 중에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어떠합니까?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어디 영향력이 미쳐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이런 그들의 위대함과 강인함, 이런 놀라운 경쟁력이 어디서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 특별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과 사명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이룬 그 신앙이, 바로 그들의 경쟁력이었고, 그들의 강인함이었고, 그들의 위대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들도, 각 자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을 향해 함께  나아가면서, 영적인 축복의 땅 가나안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온전히 성취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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