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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져 주심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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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 주심 (마 8:1~4)

여러분, 혹시 「터치 운동」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후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캠페인입니다. 심리학자와 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터치(touch) 즉 접촉(接觸)이 인간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조산아의 경우 마사지를 해 줄 경우 해 주지 않은 아이에 비해 50%나 더 빨리 발육한다고 합니다. 또한 피부 접촉이 어린 아이의 두뇌발달에 큰 효과가 있고, 정서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만일 어린 시절 접촉이 부족하면 지능지수도 낮아지고, 성장한 후 사회 적응력도 떨어질 뿐 아니라,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의 접촉 결핍이 암이나 난치병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고아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갔는데, 나중에 연구한 결과 ‘접촉 결핍증’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접촉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이 인식되면서 터치 캠페인이 벌어지데 된 것입니다. 갓난아기를 혼자 방치하지 말자, 우유를 먹인다고 고무젖꼭지나 빨게 하지 말자, 우유를 먹이더라도 자주 안아주고 접촉을 해 주자, ... 이런 것들입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도 부부끼리, 친구끼리 접촉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뿐 아니라 면역력이 증진되고, 더 나아가 난치병 치료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 강남성모병원의 유방암센타의 의사 선생님 기사가 실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소 지론은 환자 치료를 위해서는 수술이나 약으로만 부족하고 마음의 치료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20년째 환자 안아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실제로 많은 효험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접촉 즉 터치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터치(Human Touch)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터치(Divine Touch)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므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터치가 있을 때 더욱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함께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터치, 영적 터치가 저와 여러분에게 경험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 보면 한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만져주심 즉 터치를 통해 그 몹쓸 병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나병은 문둥병으로도 불렀는데, 최근에는 환자들을 존대하는 의미로 대개 ‘한센병’으로 바꿔 부릅니다. 노르웨이 사람 ‘한센’이 처음 이 병을 발견했다고 해서 한센병이라 명명한 겁니다. 

나병은 현대에도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불치병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천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도 신체 부위가 문드러지고 고통스러운데,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격리 수용되는 치욕을 당하는 심적 고통이 컸습니다. 레13:45~46을 보면 당시 나병 환자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케하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여러분, 혹시 영화「벤허」를 보셨나요? 얼마 전 벤허 역을 맡았던 명배우 찰턴 헤스턴이 작고했죠. 거기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러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 격리 수용되어 나병환자들과 같이 지내게 됩니다. 벤허가 수소문하면서 찾지만 숨고 피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나병 환자들의 고통과 치욕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외롭게 살아갑니다. 온 몸이 썩어갑니다. 악취가 나고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이 문드러지고 ...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피해 다니고, 멀리서라도 사람이 지나가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겁니다. 이제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겁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그분을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당시 율법으로는 일반인들에
게 접근 금지입니다. 심한 경우 돌에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이 없기에 그는 용기를 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습니다. 기적의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할 게 바로 예수님의 손입니다. 3절 보면,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십니다. 만져주신 겁니다. 그리고 고쳐주십니다.


[1] 예수님의 손 : 사랑과 능력의 손 

본문의 사건을 마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만져주신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 ”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동정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나병을 즉시 고쳐주십니다. 능력의 손이요 기적의 손입니다. 
여기서 사랑과 능력이 겸비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사랑만 있고 능력이 없다면 무기력하고 값싼 동정에 불과합니다. 능력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겸비하고 계셨기 때문에 능히 치유해 주실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만져주심 : 위로, 치유, 회복의 터치

예수님은 만져주심 즉 터치는 단순히 병만 고쳐주신 게 아닙니다. 그 만져주심은 단순이 육신의 치유를 넘어 그의 인생을 온전히 구원해 주신 겁니다. 말하자면 전인 구원(全人救援)을 베푸신 겁니다. 그의 육체와 더불어 그의 영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 그의 인생이 온전히 회복됐습니다. 

① 위로의 터치 :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그 나병 환자는 육체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심령이 받은 상처는 더욱 컸을 겁니다. 죄의식, 괄시, 천대, 고독, 소외감, 원망, 증오, ... 예수님은 그의 손길을 통해 그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일화입니다. 생전에 그가 설립 운영했던 ‘사랑의 선교회’ 봉사자들이 어느 날 거리에서 행려병자 4명 데려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상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을 돌봐 주세요. 제가 가장 심각한 이 사람을 보살피겠습니다.” 이미 의료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그 병자의 몸을 주물러주면서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병자는 평안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고, 얼마 후 마더 테레사의 손을 꼭 잡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남긴 한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록 육신의 병을 고쳐주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손길을 느낀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습니까? 그 소외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상처 많은 영혼이 테레사의 손길을 통해 나타난 ‘사랑의 터치’로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세속화되고 개인화되면서 점점 하나님과의 접촉,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고독하고 외톨이가 되어 갑니다.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친구가 없습니다. 가족이라도 불화와 갈등으로 혹은 멀리 떨어져 살다 보면 남남과 같이 외롭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중에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은둔족’(隱遁族)이니 ‘외톨이 증후군’(loner syndrome)이니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신문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면 사랑의 터치로 만져주십니다.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마음 속의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② 치유의 터치 :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져주시자 오래동안 온 몸에 고통을 주던 나병이 떠나가고 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이런 치유 사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을 보면 치유 사건의 여러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8:15 보면 베드로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심방을 가서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오늘날 얼마나 많은 병원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의학이 발달되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못 고치는 병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의학은 병을 고치는 게 아닙니다. 치료 행위(cure)를 할 뿐입니다. 치유(heal)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수술을 받습니다. 의사는 칼로 째고 꿰매 놓을 뿐입니다. 그 이후에 아물고 치유되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크리스천 의사들은 치료하고 하나님이 치유해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합니다. 

③ 회복의 터치 :

4절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후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으니 감사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율법 규정을 따르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 중심 사회입니다. 제사장들이 거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나병 증세가 나타날 때 나병환자로 진단하고 격리시키는 것을 제사장이 결정합니다. 
그 후에 혹시라도 치유되면 그것은 최종 판단하고 가족에게로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도 제사장이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은 제사장을 통해 종교적으로 공적으로 판결을 받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난 후에 가족에게, 사회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는 겁니다. 모든 것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병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겠는가! 그의 자리도 없어졌을 겁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신 겁니다. 정말 그렇잖아요. 병만 고쳤다고 끝나는 게 아니죠. 마음의 상처만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사려가 깊은 사랑을 베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만져주시면 모든 게 잘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거부하고 인간이 모든 걸 다 하겠다고 고집하면 오히려 인생이 엉켜버립니다. 

여러분, ‘미다스’(Midas)를 아시죠? 미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리기아의 왕입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가 그에게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신이 났습니다. 모든 게 황금으로 변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후회합니다. 음식도 금으로 변합니다. 자기 딸도 금으로 변합니다. 미다스의 손이 축복의 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주의 손입니다. 

인생 만사가 정말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어디 생각대로 잘 되나요? 오히려 일이 꼬입니다. 엉켜버립니다. 해결할 수 없도록 ... 비근한 예로, 자식 교육도 그래요. 부모가 해 보겠다고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망쳐놓은 거예요. 주물러 터뜨리는 겁니다. 사업도 자기가 머리를 짜내고, 노력하고 애쓰고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망할 짓을 하고 만 거예요. 여러분, 그런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손은 마치 미다스의 손과 같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엉킨 게 풀립니다. 망가진 
게 다시 회복됩니다. 

학창 시절 수학 문제를 얼마나 비비 꼬아서 출제했는지 도저히 풀 수가 없습니다. 끙끙거리다 선생님에게 갖고 가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허무할 정도로 금세 풀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쉬운 걸 갖고 낑낑거렸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낑낑거리지 말고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면 모든 게 해결되고 회복되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만져주심을 기대하십시오! 그래서 위로와 치유, 회복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기억해야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이 만져주셔도 100%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가 관영하고, 우리 자신도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예수님의 만져주심으로 살아가되,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결국 완전한 위로, 치유, 회복은 장차 천국에서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수년 전 우리교회를 방문했던 선교사님이 그림 한 점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림이라야 A4 용지에 복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예술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것도 아니지만, 코팅을 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가 그린 그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때 영접해 주시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겁니다. 

작은 그림이지만 자세히 보면 큰 감동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의 신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늘 위험한 가운데 고통스런 삶 살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천국을 소망합니다.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갈 것이다, 그때 주님이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 그때 주님이 나를 만져주실 뿐 아니라 나를 꼭 안아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안아주실 것이다, 그 좋은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다, ... 이런 생각을 담아 그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만져주심을 날마다 체험하시고, 더 나아가 언젠가 천국에 들어갈 때 주님이 안아주실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만져주심’의 축복을 받는 비결 : 믿음의 기도 

그러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어떻게 하면 늘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한 마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합니까? 절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인사 정도가 아니라 경배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부릅니까? 주여! 주(主)라는 말은 랍비라는 말보다 더 큰 경칭입니다. 랍비는 상대방을 극도로 존경하난 칭호입니다. 그러나 주라는 말은 존경 이상입니다. 그것은 경외의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구세주로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조건 가지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는 차별하십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아무든지 받아주십니다. 단, 믿음이 없으면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이 만져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본문 뒤에 있는 구절을 보면 또 다른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년 된 혈루병자 이야기입니다. 마9:20~22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의 모습은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믿음이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과 더불어 내가 만져야 합니다. 즉 믿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육중한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꿈쩍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치 버튼을 터치하면 순간 전류가 흐르고 그 큰 기계가 윙~ 하고 돌아갑니다. 버튼은 내가 눌러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8장을 보면 또 한 가지 치유 사건이 있죠. 백부장의 하인 치유 사건입니다. 마8:8,13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 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 보면 백부장의 믿음이 아주 귀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직접 만져주시지 않아도 치유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마친 이런 겁니다. 전선으로 직접 연결하지 않아도 무선 리모콘의 버튼을 터치하면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습니다. 무선 터치(wireless touch)인 셈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를 만져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적으로 직접 만져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얼마든지 만져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간절히 기도할 때 안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수를 하든지 안 하든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만져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만져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님의 만져주심, 주님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만져주심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주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도 이 복음 전해서 그들 역시 주님의 만져주심을 체험하고 승리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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