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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미워하면 오히려 축복하라 (요 1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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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워하면 오히려 축복하라 (요 15:18~27)

여러분,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우선 우리 변화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변했다는 소리를 들으십니까? 들으실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당신이 정말 놀랍게 변했습니다.” 감탄하기도 하고 대부분은 칭찬을 받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똑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났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분명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하셨습니다. 


 목사님도 거듭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전에는 그저 잘 모르고 목회를 하다가, 목사가 복음 안에서 거듭나면 교인들이 너무나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 안에서 거듭난 목사님이 사역하던 교회에서 사임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유는 목사님이 증거하는 십자가 복음과 삶에 대하여 불편하게 여기는 교회 중직들이 사임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목사님은 교회 분란을 원치 않기에 조용히 사임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십니다. 

  웨슬리목사님이 감리교회를 세우실 때도 그러했습니다. 웨슬리목사님은 본래 영국 국교회 목사였으나, 영국 국교회에서 쫓겨나셨습니다. 영국 국교회 지도자들이 웨슬리목사님의 죄를 꾸짖는 설교, 위선적인 신앙 생활에 대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자신들의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설교단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웨슬리목사님과 성도들이 감리교회를 세울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움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18절-21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이 왜 미움을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25절)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이유가 없습니다. 당시 총독 빌라도가 확인한 사실입니다. 

“대제사장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19:6)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가 둘 있었는데,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3:42~43) 

그러나 똑같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또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께서 이 행악자에게 이런 비방을 받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강도
에게 어렵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그냥 예수님이 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유없이 미움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없이 미움을 받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문제라는 뜻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 잘 믿는 것 때문에 미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를 마귀가 미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 7절에서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는 까닭이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되어지는 일이 하나님 보실 때는 정말 심각한 악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악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 죄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만 그것을 보여주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어느 날 자신이 그렇게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는 한 남자 성도를 상담했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성경을 찾아 주었습니다.

  (마 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했습니까?” 그러자 그 남자는 무척 괴로워하다가 겨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내가 왜 죄인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 모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정말 내가 죄인이구나.’ 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가 드러날 때 모든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화가 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기독교는 전혀 인정할 수가 없어!” 이런 사람이 많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죄를 죄라고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 때문에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똑같은 문제로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빌리그래함이 어느 날 골프장에 갔었는데. 그 날 함께 골프를 치던 어느 사업가가 빌리그래함 일행을 보고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골프채를 던지고 가버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화를 낼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 일행들에게서 풍기는 경건의 분위기가 그저 비위에 거슬린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아드님 주광조 장로님이 간증 중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친 주기철 목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인 조선을 사랑했지만 단 한 번도 공개 석상에서 `조선 독립' `조선 광복'이란 구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고, 일본 천황을 비난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아버지를 일곱 번이나 가두어 갖은 고문을 다했고, 끝내는 감옥에서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잡아 들이면 잡혀 오고 때리면 맞았던 약하기 짝이 없었던 주기철목사님을 왜 그렇게 고문하고 죽였을까요?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두려움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모습이 일본 경찰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난 다음 사람들이 미워하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16장1-4절에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지 밝혀주셨습니다.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부터 제자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될 텐데, 그 때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순종]이란 책을 쓰신 존비비어목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형이 자기보다 많이 가진 것을 보고 둘째가 엄마에게 따지더랍니다. “엄마, 이건 불공평해요!" 그 때 아내가 가만히 대답했다. “얘, 인생이란 원래 불공평한 거야!" 아들은 ‘엄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하는 눈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어이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때 아내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벌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공평한 일이니?" 아들은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입을 다물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일이 공평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일을 당할 때 내가 합당한 대우를 못 받았다고 느낄 때 이유없이 미움을 받는다고 느낄 때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었지.’ 그렇게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면 즐거운 일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길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 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일을 겪으셨잖아!” 

이것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분별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 거듭났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사람들이 알 정도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은 미움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러분, 미움을 안 받을 수 있습니다.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 사는 자가 아니면 미움을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을 왜 비난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기준이 됩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는가?‘ 

우리가 믿는 십자가 복음은 검증되어야 합니다. 

(고전 4:19-20)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스탠리죤스 선교사가 인도 선교를 하면서 천민 계층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만, 상류 계층 인텔리 지도자들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하다가 그들과 대화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때 “선교사인 당신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원합니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올바른 방식이 무엇일까?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선교사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인도의 상류 계층 사람들이 전도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엄청난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가 부흥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고 사셨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안 믿는 예수를 우리에게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화 되었는데, 그는 체면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권위를 세워달라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대주교에게 예물을 헌정해야 했는데, 그것이 아까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정벌한 다음 대주교로 하여금 세례식을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러시아가 기독교화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에 어떤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유럽의 호전적인 색슨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오른 팔만은 물 속에 담그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색슨족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싸움과 살육의 오른쪽 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간 청교도 개척자들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건너갈 때, 바로 그 옆에는 흑인 노예들이 가득 실려있는 배가 함께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돛단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났던 이들이 노예를 사고 파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원수도 축복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미워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내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오히려 감사할 조건이요 복받을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당신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향하여 중보하셨습니다.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미움을 받으신 것만 아닙니다. 미워하는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집사가 이렇게 축복하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집사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입니다. 그는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자신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결국은 사울도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빌립보에 가서 전도하다가 붙들려 억울하게 매를 많이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스데반을 생각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의 찬미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린 순간에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도망가면 간수장은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때리고 가둔 간수장 걱정은 왜 합니까? 스데반집사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장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스데반집사가 자기를 미워하여 죽인 자들을 축복한 열매입니다.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가지 마음 밭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마음이 돌밭인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13:20-21)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살 때 오는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음이 돌밭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도 축복의 말씀 능력의 말씀이 임하지만 은혜는 받을런지 몰라도 결코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받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고난을 겪을 때 더욱 함께 하십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던 때, 코리텐붐 여사가 월남에 미군들을 위문하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글 속의 어려운 환경과 치열한 전쟁 중에 있던 미군 병사들은 평화가 있는 나라로부터 온 한 늙은 여자의 방문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었다. 먼저 나는 그들 앞에서 내가 영어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익살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에 나는 ‘ 여러분, 나는 이제 우리가 처한 정말 현실적인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살아있거나 아니면 전쟁 중에 죽거나 할 것입니다. 이 두번 째의 경우가 발생했다고 잠시 가정해 봅시다. 당신들은 의로운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만약 자신할 수 없다면 이 시간 예수님께로 오세요. 예수님은 당신들을 준비시켜 주기 원하시며 또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후에 어떤 여인이 그녀의 아들이 월남에서 편지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압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며 내 마음 속에는 큰 평화가 있습니다.’ 3주 후에 그 병사는 전투 중에 전사하였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월남전 당시의 미군 병사들과 다른가? 의로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뒤로 미루어도 되는가?’   
 
여러분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어제 딸 하영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빠, 우리 중등부 안에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교우들에게 또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순히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서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일을 감사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뜨겁게 사랑하며 축복했던 일이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전에는 편하고 쉬운 길만 찾아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을 알고 영생을 알았습니다. 고난의 길, 비난받는 길이라도 그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가겠습니다. 예수님만 동행하신다면 어떤 고생도 비난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미워하는 자를 만날 때 감사하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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