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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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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소금과 빛

우리 교회 이름은 ‘빛과 생명’ 교회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 교회를 ‘빛과 소금’ 교회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이름을 가진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이 ‘빛과 소금’ 교회면 얼마나 부담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빛으로 살기도 어려운데 여기에 소금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정말 힘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 교회는 ‘빛과 생명’ 교회이니까요?

유명한 기독교 월간지 중에 『빛과 소금』이 있습니다. 이 책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중도에 『소금과 빛』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순서대로 보면 13절에 소금이고 14절에 빛이니 ‘소금과 빛’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가 다시 책명을 『빛과 소금』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도 ‘소금과 빛’이라는 말보다 ‘빛과 소금’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순서대로 ‘소금과 빛’이라 할 때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은 뚜렷이 부각된다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금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것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빛의 삶을 사는 것보다 오늘날 더 필요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신앙인은 그 본질상 그 정체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소금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합니다. 모든 음식에서 소금이 빠지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김치의 염분도 3-4%이고 아주 짠 김치라도 5%를 넘지 않습니다. 아주 적은 양으로 맛을 냅니다. 바닷물의 농도는 3-3.5%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양으로도 능히 부패를 막아냅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자체로 세상에 맛을 내고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게 만듭니다. 

신앙인들은 또한 빛과 같습니다. 빛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있으면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15절 말씀대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불을 끄는 도구입니다. 옛날에는 등유나 기름으로 불을 밝혔는데 그냥 불어서 끄면 위험하기도 하고 냄새가 심합니다. 그래서 됫박 같은 것으로 덮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꺼지고 냄새도 덜 합니다. 그때 사용하는 것이 ‘말’입니다. 불은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비유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산 위에 서 있는 동네가 많습니다.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소금처럼 은밀하든지 빛처럼 공개적이든지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신앙인들은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신앙인임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전혀 신앙인인줄 모르다가 주일에 교회 가는 모습을 보고 “당신도 교회 다녀?” 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 말씀 하시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라는 말입니다. 주머니에 송곳을 넣고 있으면 주머니가 구멍이 나던지 하며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런 존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토스 코스무)”고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 빛과 같은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소금과 같은 존재,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 달라는 호소도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아니었던 적이 없고 빛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소금과 빛 된 제자로서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제자로의 부르심이요, 제자의 삶은 소금과 빛으로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마치 한류를 대표하는 드라가마 된 “대장금” 대사의 한 부분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린 대장금의 미각을 테스트하기 위해 음식맛을 보고 그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알아맞추는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어린 대장금은 맛을 보고는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합니다. “왜 홍시 맛이라고 생각하였느냐?”고 물으니 그때 어린 대장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하였는데 왜 홍시라고 생각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리이까?”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데 왜 소금이어야 하고 왜 빛이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는 본질을 무시하는 격이 됩니다. 소금과 빛이 아니라면 그는 제자도 아닙니다. 

이 말씀 때문에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소금이요 빛이 될 수 있나?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선포할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주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많이 배우지 못했던 어부들이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다투던 자들이었습니다. 3년 동안 합숙훈련하며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제자중 하나는 예수를 팔았고 다른 한 제자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에 비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이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소망은 제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미래 또한 이 초라한 열두 제자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이것이 저는 믿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믿고 맡기면 그 일을 해냅니다. 항상 아이 취급하면 영원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믿었고 제자들은 그 믿음대로 세상을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빛은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은 태양이시고 우리는 달과 같습니다. 달은 자기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을 냅니다. 달이 태양을 정면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보름달이 되고 온 지구를 환하게 비춥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처럼 우리 마음이 주님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또한 빛의 존재가 되어 갑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전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교회에서 오랜동안 봉사하고 많은 예배를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치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계속 반복되는 경고이지만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대신 물질적 축복과 성공만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아니면 예수는 사라지고 그 안에 죽고 메마른 교리만 가득했을는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에게 자기의 사상과 신념을 덧 씌웠을는지 모릅니다. 흔히 개혁자나 세상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오류중 하나입니다. 아무 편견 없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예수를 닮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7:22) 할 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는 예수님의 경고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늘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자기 안에 예수는 사라지고 빈껍데기만 남든지, 인간의 욕망으로 치장된 거짓 예수만 남아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처럼 소금과 빛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기 전에 빛과 소금의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빛과 소금 하게 되면 내가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빛과 소금이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산상수훈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 어떤 구절도 우리가 성공했다고 해서, 능력 있다고 해서 빛과 소금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왕들과 부자들이 다 빛과 소금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묵상했던 팔복을 보세요. 빛과 소금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긍휼의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평화의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능력과 성공이 있습니까?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성공하고 승리할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할 때 영광이 됩니다. 성공과 실패는 착한 행실과 관련 없습니다. 착한 행실이 없는 성공도 있습니다. 착한 행실을 하고도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착한 행실을 했으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성공입니다.

팔복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여섯 개의 반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다. 그러니 서로 화목하라.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다.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해라.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 진실만 말하고 거짓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 편 뺨을 맞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 이 모든 것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성공과 승리는 몇 사람에게만 주어지지만 이런 일은 하고자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6장과 7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 이 모든 것에서 외식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하라. 빛과 소금의 삶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리서치 센터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는 정도 되어야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나 하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리서치 센터의 결론은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40%정도 앞서갈 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 평균치가 100명중 20명이 착하다면 교회는 60명이 착해야 그것을 선한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인정할만 합니까? 그 중에 한두 명만 물을 흐려놓아도 “교회는 썩었어.”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제가 보면 신앙인들이 일반 세상 사람들보다 약간 더 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기대수준이 높습니다. 빛이 어두움보다는 밝기는 하지만 희미하다면 당연히 욕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들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긍정적이며 기쁜 얼굴로 살아가는 것도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요즘 모두가 경기가 어렵다 살기 힘들다하는데 오히려 늘 감사하고 만족하며 기쁜 얼굴로 살아가면 그것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 한사람만 있어도 모임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고 왕따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허물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어 그랬어 하며 감싸줍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의 편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이익을 좇아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갑니까. 이런 때에 자기가 먼저 희생하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곳에서 먼저 용서하고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관행이라 하며 불의를 저지르는 곳에서 정직과 원칙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저는 “그 가게 주인이 예수쟁이냐 그러면 믿을만 하겠구만.” 이런 말이 나올 때 비로소 한국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만약 빛이 빛답게 살지 않고 소금이 소금답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본질을 벗어나서 살면 비참해집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 잃은 소금이 있나요? 짠맛을 잃은 것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맛 잃은 소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금의 대부분은 사해 바닷가에서 암염 형태로 발견됩니다. 그래서 정제된 소금과는 달리 그 안에는 여러 불순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이처럼 소금기가 빠지고 남은 찌꺼기라 할 것입니다. 이런 소금 찌꺼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길에 버리고 사람들이 발로 밟고 그 위를 지나갑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가 바로 그렇다 할 것입니다. 교회는 많아지고 물질적으로는 부해지고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을 배출했지만 한국 사회는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터넷에서는 한국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도덕성 면이나, 경건성 면에서 결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국 교회를 대한민국의 빛이요 소금으로 세워놓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이기주의와 경쟁, 물질주의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은 3% 소금 농도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냅니다. 우리는 지금 적게 잡아도 20%입니다. 20% 소금이면 사해바다 수준입니다. 부패도 조금도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한국 기독교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근대화와 독립운동에서 크리스찬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기미 독립 선언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만세운동으로 구속된 19,525명중 3,426명이 기독교인으로 무려 17.6%에 달하고 대부분 시위 주도자들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구속자 수 471명 중 65.6%인 309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 인구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20-30만 명이었습니다.  당시 2천만으로 전체 인구를 잡으면 1-1.5%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일들을 했습니다. 결코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는 곳곳에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한국 교회가 빛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실업과 비정규직의 고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때 정말 사람을 중시하며 사랑으로 선 그런 신앙 기업 하나 없습니까? 그런 모델 기업이 있다면 한국 사회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학교 교육이 문제고 등록금으로 각 가정의 허리가 휠 정도입니다. 이 때 교육 문제에 대해서 또는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신앙적인 학교가 하나 없습니까? 온 국민이 부동산 투기와 자기 아파트 값 어떻게 올려볼 수 없나 하고 광분하고 있는데 이때 무언가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말하며 정직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경제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이 민족에 평화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설 수는 없습니까? 한국교회가 이런 대안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족의 새 길을 제시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빛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대형화와 세습, 배타적 태도와 이념적으로 우경화됨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가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한국사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쓰신 글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교회당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궁핍에 우는 농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의 가슴 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야 정말 종교인데 이 교회는 그와는 반대이다.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단계다. 신라 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고려 시대에 송도 안에 절이 수백을 셌는데 그 후 불교도 나라도 망했고, 이조 때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굽도 그렇고 바빌론도 로마도 그랬다. 그럼 성전이 늘어가면 망할 것은 누구인가?”

요즘 보면 저희도 개척교회를 하지만 교회 정말 많습니다. 많은 만큼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로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였는데 세상으로는 나가지 않고 교회 안의 빛이 되어 서로 높은 직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사회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습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비움의 삶’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유교는 인간관계의 원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야 할 종교는 무엇입니까? 저는 한참 성장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을 향하여 사랑과 나눔, 공동체, 건전한 이성과 정직의 삶,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정신을 심어 놓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한국사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교회가 밟히고 외면당할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여러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어 사회를 개혁하자는 데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첫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사회가 아름답게 개혁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에 변화가 있든 없든, 그것이 희망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빛과 소금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우리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16절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빛을 비출 때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결국 누구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 때문에 찬양을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릇되는 원인 중 하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할 터인데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인정을 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착한 행실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일주일에 여러 번 가난한 자를 구제했고, 율법 대로 살려고 열심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를 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겉으로만 잘 보이려고 하는 태도가 외식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 하였으면 겉으로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람의 평가, 사람의 인정, 사람의 인기에 연연해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사람의 눈치나 보며 자신감 없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본질을 찾기 보다는 형식에 매이며 자기를 찾기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는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 선한 행위의 모든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선한 행실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선을 행하고도 겸손하며 또 아낌없이 많은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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