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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 (사 5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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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 (사 55:1~13)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선교사님이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청어장수 아저씨가 청어를 한 판 지고 “싱싱하고 물 좋은 청어 사려! 청어 사려!” 하고 외칩니다. 선교사님이 “그 청어 한 마리에 얼맙니까?”라고 물었더니 한 마리에 한 냥이라고 합니다. 청어의 마리수를 세어보니 27마리였습니다. 선교사님은 27냥을 내고 청어를 몽땅 샀습니다. 그리고는 청어장수에게 “나는 두 마리만 필요하오. 그래서 내가 두 마리 가지고갈테니 25마리는 그냥 돈이 없어서 청어를 먹고 싶지만 못 사먹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시오”라고 말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청어장수가 정직한 분이라 그걸 다시 팔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듣도록 외쳤습니다. “물 좋고 싱싱한 청어 공짜로 줍니다. 가져가시오” 그런데 한 사람도 곶이를 안 듣고 내다보지도 않더랍니다. 

사 55장은 성경에서 ‘초청의 장’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풍성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시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청어장수의 외침을 듣고도 믿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그럼 돈 없이 거져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1절).

목마른 자는 삶에 지치고 허덕이는 자들, 인생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생의 갈증은 돈이나 명에나 쾌락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소금물과 같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면 더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인생의 갈증을 돈이나 명에나 쾌락으로 풀려고 하면 그것들은 사람을 더 지치고 허덕이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생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 4장에 보면 인생의 갈증으로 목마른 한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불행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요7장에 보면 주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3:37,38) 

혹시 삶에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내면에 목마름이 있습니까?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십시오. 속이 시원하도록 생수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2)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자를 부르십니다(1절)

1절에 보니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인생을 참으로 만족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참으로 만족케 하는 것을 돈도 없이 거저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싸구려이기 때문에 돈도 없이 값도 없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갚을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은혜로 거저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공짜입니다. 대가를 치루고 받는 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보상입니다. 선물은 그냥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물을 주면 받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됩니다. 엡 2:8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3) 헛된 수고를 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2절)

 2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묻습니다. 양식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할 것, 참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참 만족이 아닌 거짓만족을 위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동물 나라 한 연못가에 입 큰 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자신의 입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가를 헤엄치고 있던 입 큰 개구리는 새로운 목욕탕이 연못가에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목욕탕에 걸려진 안내판에는 “입 작은 동물은 입 큰 동물의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입 큰 개구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위풍당당하게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누가 등을 밀어 주려나’ 하고 탕 안을 둘러보던 입 큰 개구리를 저 편의 다른 개구리가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입 큰 개구리보다 입이 훨씬 컸던 것입니다. 열심히 그 개구리의 등을 밀고 나온 입 큰 개구리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결국 입을 더 크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성형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이 개구리는 의기양양하게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목욕탕 안에는 하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 큰 개구리는 다시 하마의 등을 밀어야만 했습니다. 이 개구리는 또 한 번의 결심을 하고는 입을 더 크게 수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연의 미소를 띠고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탕 안에 들어서자마자 땅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악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개구리는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갔고 의사는 개구리에게 입을 더 이상 크게 한다면 단 하루밖에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꼭 다른 동물에게 등을 밀도록 해야겠다는 허세로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입이 크다는 허세를 가지고 다시 목욕탕을 신바람 나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도착한 개구리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문에는 “금일 휴업”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헛된 일을 참된 일인지 알고, 헛된 만족을 참된 만족인지 알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큰 부자 이야기 아시죠? 풍년이 들어서 창고가 부족해서 창고를 하나 더 짓고 곡식을 쌓아놓고 만족하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4) 악인과 불의한 자를 부르십니다.(7절)

7절에 보면 주님이 악인과 불의한 자도 부르십니다. 이 말은 사실은 주님이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롬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입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1)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7절).

7절에 보면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물을 마시려면 물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갈증을 해갈하고 참된 만족 속에서 살려면 인생의 갈증을 풀어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조건이 있다면 악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욕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하고, 수술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씻김을 받고 고침을 받고 참된 만족이 보장된 인생을 살려면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방법 중에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2)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2절).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3절에 보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들을 때 육신의 귀가 아닌 마음의 귀, 믿음의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말입니다. ‘귀를 기울이고’라는 말을 히브리어 성경에는 신기하게도 ‘너희들의 한 귀를 펼치고’라고 나옵니다. 이 한귀는 얼굴에 달린 귀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세계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준비된 귀를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셔야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희들의 한 귀를 펼치고’라고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펼치다’의 의미를 가진 이 ‘나타’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텐트를 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된 영혼의 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중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작은 소리를 들으려고 할 때 귀에 손을 펴서 대면 소리가 모아져 들어오면서 더 잘 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집중해서 들으라는 말입니다. 

“들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에서도 의미심장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단지 듣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청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기울이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말씀을 들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8,9절에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생각과 말씀이 일치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위대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내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라는 책에서 “사람이 행복한 일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비참한 일을 생각하면 비참해 진다. 무서운 일을 생각하면 무서워지고 실패만을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롬8:5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롬8:5을 약간 변형시켜볼 수 있습니다. “사단을 따르는 자는 사단의 일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나니”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음을 집중하시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생각 속에서 씨앗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6절).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백성에게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운데 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아갔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가 있고 그 안에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가장 깊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임재 하셨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같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방인의 뜰이나 여인의 뜰 혹은 이스라엘의 뜰에 있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어도 성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풍성한 지성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눈에 사람만 보입니까?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을 때에 아무생각 없이 앉아있거나 단지 윤리적인 교훈을 얻거나 무엇인가 찌릿찌릿한 체험을 원하는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4)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6절). 

6절에 보면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합니다. 입으로 소리쳐 부르짖으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0: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합니다. 렘 29:12에서는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라고 약속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 사이에 기도가 있습니다. 행 1:4-8에 보면 성령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2:1-4에 그 약속이 성취되는데 약속과 성취 사이에 행 1:14에 보면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성취 사이에 항상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겔 36:37).

우리교회 김 집사님 간증입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희한하게도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경기도 성남에 있던 학교에서 이번에는 서울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어서 서울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가능성은 거의 0%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전근신청을 하게 되었는데 원래 광진구 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집사님의 실수로 강남에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강남에 자리가 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강남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고 마치 강남에 자리가 나서 강남으로 전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기도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1) 만족한 은혜를 주십니다(2절).

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할까요? 돈이 별로 없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정답은 만족해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돈이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돈이 없어도 만족하면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큰 비전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현재 주어진 환경에 족한 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복음화라는 엄청난 꿈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감옥생활에도 만족했습니다. 요셉은 총리의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살이 옥살이에도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는 불평이 없었던 것입니다. 빌 4:11,12에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자신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불쌍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자기 내면의 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바깥의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쁨이나 슬픔도 바깥의 것에 의해서 생깁니다. 일의 결정도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합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환경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내면에 주님이 거하시고 모든 것이 내면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내면에 계시는 주님 때문에 남들이 품을 수 없는 엄청난 비전을 감히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 때문에 환경이 어떠하든,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만족하고 행복하며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2) 영혼의 은혜를 주십니다(3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나는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말합니다. 육체는 옷과 같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육체의 옷을 벗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3:4에서 베드로 사도는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엡3:16에서 사도 바울은 ‘속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속에 숨은 사람, 속사람이 영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죽어 있는 영혼이 살아납니다. 잠든 영혼이 깨어납니다. 병든 영혼이 치료됩니다. 이 영혼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영혼의 상태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주 튼튼하고 멋지던 사람도 영혼이 그 몸에서 떠나고 몇 시간만 지나면 몸이 썩기 시작합니다. 며칠만 지나면 몸이 부패해서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영혼의 상태가 우리의 인생에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삼 1:2에서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예수의 은혜를 주십니다(3-4절).

3-4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가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고 우리는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이제는 그분과 내가 하나입니다. 갈2;20에 보면 이제는 내 안에 그분이 사십니다. 엡 1:19, 20과 엡2:6에 보면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앉아계신 하늘 보좌 우편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신 후에 둘이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주님과 신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비유요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신랑이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이듯이 주님과 믿는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은혜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이 외국에서 돌아와서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제가 농담으로 “평균 85점을 맞으면 큰 선물을 줄께”라고 말했습니다. 제 아들이 기대감을 갖고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빠 무슨 선물을 주실건데요?” 제가 웃으며 말했지요. “아빠” 우리 아들도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저를 가지면 저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는 자는 질 그릇 같은데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말했습니다. 

  4)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를 주십니다(5절).

5절에 보면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오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선교하고 전도하는 일을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뭐가 할일이 없어서 남의 집 노크하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러고 다니냐”고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을 영광이요 은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여러분, 내 손에 있는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잡는다면 버린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 잡은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 잡은 것이 중요하지요. 사도 바울이 변화되기 전에 그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도 돈도 명예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고 보니 과거에 자기가 손에 잡고 있던 것들이 영원한 것에 비교하면 분토와 같고 배설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영혼을 건지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세상부귀가 가치 있어 보이지만 영적인 눈이 열리고 보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일이 큰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비록 작을지라도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5) 용서의 은혜를 주십니다(6,7절).

7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못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을 갈 수 없고, 기도가 응답될 수 없습니다. 용서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도 되고, 천국도 들어가고 기도도 응답됩니다. 
죄인의 신세로 도망 다닌다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지나가는 경찰차만 봐도 가슴이 뛰고 불안하고 초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스를 보니 대통령이 사면해준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그 때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지겠습니까! 용서 받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고 나면 얼마나 속 시원합니까? 용서의 은혜를 받아야 인생이 행복합니다. 

  6)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다(10,11절). 

10절- 11절에 말씀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자연과 추수의 법칙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린 후에 그 비가 그냥 다시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적시고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추수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고 또 다시 파종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그냥 다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사람들에게 역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고 하나님이 보낸 일에 형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있는 사람과 말씀의 은혜가 없는 사람은 말씀으로 인한 결과가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회개하고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말씀의 은혜가 없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여러분에게 실제가 되십시오. 영혼구원을 설교하면 영혼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병 고침을 설교하면 병 고침의 은혜를 체험하고, 축복의 설교를 하면 축복의 은혜를 체험하고, 승리를 설교하면 승리를 체험하십시오. 말씀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7) 변화의 은혜를 주십니다(13절).

13절 보면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합니다. 가시나무보다 잣나무가 좋다는 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합니다. 찔레는 창 3:18에서 엉겅퀴로 번역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엉겅퀴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화석류는 관상목이므로 보기에 좋은 나무입니다. 잎은 짙은 녹색이고 꽃은 희고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남빛이며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만한데 아주 향기롭습니다. 날 것으로 그냥 먹든지 말려서 먹기도 합니다. 가시 대신 잣나무가 찔레 대신 화석류가 날 것이라는 말씀은 변화의 은혜, 창조의 은혜를 말합니다.

메마르고 상처가 많은 인생,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인생,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될지 모르는 인생, 생의 아무런 보람도 없고 아무런 열매가 없는 인생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푸른 나무, 열매 맺는 나무, 기름진 나무, 향기로운 나무, 아름다운 나무, 열매가 풍성한 나무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변화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 정도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13절 하반절에 보면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랑이 될만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절망하고 있는 분들 걱정 마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가시나무가 잣나무로 찔레가 화석류로 변화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적절한 예화도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꾸만 바나나 생각이 나더군요. 제가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가게를 했습니다. 우리 가게는 영세해서 바나나를 갖다놓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집 가게는 가게도 크고 장사도 잘 됐습니다. 그 집에는 바나나를 팔았는데 그 집 아들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나 먹을 수 없던 바나나도 날마다 먹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장사가 잘 안 되니 자식들 간식을 마음대로 먹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몰래 훔쳐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트럭에서 한 다발에 2천 원씩 파는데 저는 바나나 파는 트럭을 보면서 옛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은 제가 원하기만 하면 바나나 원도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지쳤습니까? 소망이 없습니까? 되는 일이 없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돌아오셨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요셉 보세요. 그가 종살이 옥살이 할 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냥 하나님 바라보고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받으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금은 무시당해도 앞으로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작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벅차지만 곧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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