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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아픔을 아시고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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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아픔을 아시고 (마 9:35~38)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본문에만 표현되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마4:24절에 보면 이들 대부분은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사람들이요, 어떤 면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이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자들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이들을 보는 주님의 마음은 편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리들을 보실 때 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36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은,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깊은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눅 6,39에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무리들을 고생시키고 기진 하게 만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왜 소경입니까?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경 됨은, '잘못된 눈' 곧 '잘못된 시각'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고, 기진 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로 그 다음 말씀, 마태복음 10,1-4절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언급된 12제자의 이름은, 그저 단순한 12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12 사람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시의 소경 같은 목자들, 소경 같은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던 '새로운 목자'라는 겁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말합니다. '새로운 일꾼'을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 12 사도라는 겁니다. 이 제자들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심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 역시 제자로 한 생을 부름 받은 자로 살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한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시각'이 있다는 겁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 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 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이 기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다 가지고 있어야 되고 분명히 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사명은 너무나 황홀한 것이기에 이 사명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나실인처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장애인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인류가 농경사회를 벗어나서 산업사회화의 과정을 겪는 동안에 우리의 삶이 무척 편리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삶의 편리 대신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환경 파괴입니다. 이 환경 파괴와 산업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역기능적 산물이 뭐냐하면 수많은 장애인의 발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산업 재해, 교통 사고, 약물 복용, 의료사고, 분만사고 등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많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양산하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수가 한국의 경우 한해에 10만 여 명에 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우리는 장애인 회복운동, 장애인 치유운동에 관해서 같이 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괄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장애인 선교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 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7% 정도에 불과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원인도 분석에 의하면 가난, 환경오염, 식품 오염, 약물중독 등 불의한 사회적, 환경적 문제가 주요 원인입니다.

그리고 선천적 장애인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중도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이상은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화가 촉진될수록 우리의 사회가 문명 사회가 되고 더욱 과학화되는 사회가 될수록 산업 재해가 더욱 많아지고 교통 사고가 더 증진하면서 더 많은 후천적 사고가 일어나면서 후천적 장애인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의 발자취를 보면 그 분과 장애인의 접촉이 그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장애인들은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eh현재 우리는 실로암 대학을 세워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사역을 교회가 펼쳐가고 있지만 사실 교회가 여기에 관심을 갖는 일은 매우 미약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적 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70-80여명의 장애우들이 모여 토요일 날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희망입니다. 열악한 시설이고, 어느 것 하나 그 분들을 위한 시스템이 없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3부 예배를 집례 하실 신용태 선교사님이 얼마 전에 1000만원을 헌금을 했습니다. 돈 한 푼이 아쉬운 분인데, 아마 그 돈은 보통 헌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전화를 했어요. 아니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많은 액수를 헌금하냐고?. 샬롬의 전당을 위해 드린 것이랍니다. 당신 아이들 등록금도 절절 매고 또 이 돈이 매우 필요한데 하나님은 당신 마음을 아신다고 그냥 그 헌금 드리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갑자기 집에서 혼수 상태가 일어나 병원에 실려 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퇴원을 했고 또 우리 교회에서 병원비를 지급을 해 드렸습니다. 그 때 보험이 나왔는데 그 돈이 자시의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몽땅 다 드린 거랍니다. 뭐, 어떤 말을 해야할지, 당신도 시각장애로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또 생활도 어렵습니다. 이는 자기 재산을 다 드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헌금 속에는 교회가 연약한 사람들을 세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옥합을 깬 줄로 압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유방암 연구 기금 조달을 위한 마라톤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은 저마다 달리는 이유가 다 달랐을 것이라 표현합니다. 그 가운데는 사랑하는 사람을 추모하며 달린 사람도 있었고, 암 생존자를 기리며 달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날 2만명이 거리를 달렸고 대 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 한다는 마음으로 5km를 달리고 십시일반 그 일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달리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그녀는 눈 주위가 시퍼런 암 환자였습니다. 자신과 몇몇 일행은 호의로 뛰었지만 그녀는 암환자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소망을 갖고 확신을 가지고 뛰었던 것입니다. 아마 목사님도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면에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그 만큼 경쟁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절망은 아닙니다. 여기 이 아침! 주 앞에 모인 여러분과 제 자신이 대안적 시각을 가지고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고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관심 가운데 하나가 사회 복지 공동센터를 갖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세상이 치료하지 못하는 상처들이 치유되는 그 일에 더욱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육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의 영적 회복을 돕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한국의 장애인들 가운데 크리스챤은 5% 미만이라고 합니다. 인구대비 25%가까이가 예수를 믿는데 이는 실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부끄러워서 못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아직 건강한 우리들이 이처럼 소외되고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잇는 일은 그들의 영의 눈이 열려질 수 있도록 그들을 끌어 앉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1997년에 세상을 떠난 테레사를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잊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그가,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수상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시는 대로, 그가 인도에서 50년이 넘도록,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어서, 빈민가에 들어가서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쉼 없이 행한 그의 수많은 봉사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섬긴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가치관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시각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인 시각을 가지고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위대하게 하였고, 아름답게 한 것입니다. 그가 행한 일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온 세계가 떠들 만큼 위대하고, 대단하고, 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는 하였지만, 인도의 가난한 사람 중 극히 소수에게 한 것뿐인데,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과장평가 되었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평가하는 그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한 일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가 그 작은 일을 할 때 가졌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 그 어떤 인물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넓은 바다 속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바닷물은 그 한 방울만큼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때에 한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나는,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언제나 하나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정신, 그가 가진 예수님의 그 마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하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저녁 예배 때 장애인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게 됩니다. 우리 역시 부족 하지만, 그 날 모아진 헌금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익한 일에 쓰여지는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있는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장애인 주일을 맞아 이웃을 좀더 배려하는 사랑을 가지고 섬겨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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