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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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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17)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오늘은 사랑하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을 읽으실 때, 이미 감을 잡으셨지요? 저로서는 그 동안 사랑에 대한 설교를 여러 번 했었기에, 너무나 뻔한 주제인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 신선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치셨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제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교회 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느냐?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교인들이 분명히 아느냐?’ 제가 사랑에 대하여 너무 적게 설교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가 얼마 전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만한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선 빌하이벨스 목사가 먼저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천지가 진동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지난 32년 동안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영적 성장의 기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교회 생활을 오래하고 열심인 사람이 오히려 영적 성장은 더 낮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예배, 성경 공부, 소 그룹, 자원 봉사, 전도 등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을 돌렸고, 거기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설교, 교회 모든 프로그램 등 전반적인 점검에 들어갔습니다. 그 교회 뿐만이 아니고 우리 교회도 심각하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연한이 길어지게 되면서 점점 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교회 안에서 중직이고 오랫 동안 교회 생활하신 분들이 사랑이 더 식어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오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가 호들갑을 떤다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 사이에 이상한 믿음이 퍼져있습니다. 구원받는데 믿음은 필수이지만 사랑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 사랑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 좀 듣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믿게 되었지요?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 조차 싸우고 비난하고 화내고 갈라지는 일을 너무나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하셨지만 교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간증보다 불화의 소식을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도 되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저렇게 싸워도 천국에 가는데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래서 믿기는 “어떻게 다 용서하고 다 사랑할 수 있어?” 라고 믿습니다.  ‘다 그렇게 하고 사는 걸, 뭐.’ 그래서 사람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돼도 그것이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경고를 들었습니다.
 (계 2:5) “...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배소 교회는 칭찬 받을 일이 많았던 교회입니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교회도 사랑이 없는 것 하나 때문에 촛대를 옮기는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다 용서하고 사는가? 어떻게 사랑하고 사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열매가 맺혀진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사랑의 열매가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과 죄사함은 함께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 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발에 향유 옥합을 쏟아 붓는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낭비한다고 펄쩍뛰는데 이렇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속죄함을 받았는지는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랑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천성은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크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마음으로 판단하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저는 언제나 그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눈에는 들보가 있을텐데,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섰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얼마나 허물이 크고 많겠습니까?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했을 때, 주신 말씀이 사랑하면 모든 허물이 다 덮어진다는 것입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우리의 모든 허물이 다 덮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4절)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과 친구라 할 만큼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사랑으로 하는 기도는 다 응답받습니다.

“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절)

우리가 사랑하는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에 대하여 정학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악한 자라도 자식은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라도 그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자가 있으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자가 있느냐. 
그러나 같은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람의 사랑은 자기 눈에 좋은 사람을 사량하며 제 눈에 싫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본능일 뿐이고 여기에서 시기, 질투, 정욕, 집착, 독점욕, 지배욕, 기대, 실망, 복수심, 원한 등 온갖 악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이 우리 삶에 오는 대부분의 고통의 원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의 열매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께서 명하신 용서와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탄식하는 이를 만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겐 도무지 참 사랑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자녀와의 사이에도 그렇고 부모와도 그렇고 교우 사이에도,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기적인 사랑만 했었지, 하나님, 제 속에는 참 사랑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절대로 흘러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때, 사라가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이 죽은 몸과 같이 되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 후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너무나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하면 “아닙니다. 제게는 결코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김요석목사님이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한 교수님이 “여러분 중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김요석목사님이 손을 드니 혼자였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온 학생이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당신,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을 만나나 보았습니까? 만났다면 하나님과 악수해 보았습니까? 그 손이 차가웠습니까? 뜨거웠습니까?” 연속적으로 묻는데 대답을 못하겠더래요.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목사님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강의를 했는데 세미나 도중에 나이 지긋하신 목사님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것 같군요.” 자기는 독일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외쳤는데 여기서는 목사님들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것 같다.”고 하니.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목회를 한 번 했으면 좋겠소.”하더랍니다. 그래서 소개해준 교회가 전라도에 있는 나환자 촌에 있는 영호교회였습니다. 

  처음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들이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눈길을 피하더랍니다.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까?’ 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는데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구멍 다섯 개뿐이었다. 눈도, 코도, 입술도 없었다. 양손조차 다 끊어져 나가고 없었다. 예배 시간 내내 '어떻게 하면 여기를 떠날 수 있을까?' 한 가지 생각만 했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사람들이 전부 돌아가기를 바라며 일부러 천천히 설교 원고를 정돈하다가 교회 문을 나서려는데 얼굴 없는 그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다가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하면서 손가락이 없는 손을 내밀더랍니다. 내민 손이니 안 잡을 수도 없고 할머니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그냥 올려놓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 때 그 할머니가 우시더랍니다. “할머니 왜 우세요?” 했더니 "목사님, 전 열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건강한 손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이 이렇게 제 손을 잡아주시니 너무 기뻐서......" 이렇게 울먹이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목사님은 너무나 부끄러웠답니다. 그 때 갑자기 깨달아졌습니다. 독일에서 들었던 교수님의 말이 다시 귀에 들려왔대요.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봤소? 악수를 해봤소? 체온을 느껴봤소? 따뜻합니까? 차갑습니까?’ 그 순간에 ‘아! 지금 내가 우리 주님 손을 잡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김요석목사가 사랑이 많아서 나환자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까? 그는 도망가려 한 목사입니다. 누가 은혜를 끼친 것입니까?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계속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절) “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은 용서하려고 사랑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존심 싸움을 하고 상황이 어렵다고 낙심하고 이단에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인생 대부분의 고통은 잘못된 목표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 기쁨, 만족은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주 잠깐 즐거움이 온 후에 길고 긴 좌절의 고통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표는 오직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함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누리면 예수님 한 분이면 정말 충분합니다. 
전에는 내가 돈도 필요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도,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갈망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더 잘나야 되고 다른 사람에게 좀더 강하게 보여야 되고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했는데,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다 필요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부어지니까 이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에 유일한 목적이 되기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정말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잘 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련하고 부족하고 불쌍하고 한심하고 바보같고 멍청해서 하나님은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겠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거듭하여 두 번씩이나 부인을 팔았습니다. 야곱은 치사한 잔꾀를 부리며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기드온은 열등감과 패배의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도, 삼손도 인간적으로는 별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강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부족하고 한심스러우니까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크게 쓰임받는 것을 보고 화내지 마세요.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편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프로포즈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편할 때보다 자기 한계에 부딪힐 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기가막힌 수렁에 빠졌을 때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약할 때 오셔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함을 통하여 오십니다. 그러므로 강한 척 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자기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교인들 보기가 창피해서...” 아닙니다. 그것이 은총의 통로입니다. 
엉망이고 부족한 자기 모습을 다 드러내십시오. 상처로 인하여 아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며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의식하고 살았기에 은혜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기는 “나는 더럽고 못된 사람입니다.” 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힘들어도 답답해도, 두려워도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만 바라보십시오. “주님 .. 받아들일께요 ... 감사해요.” 할 때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도라고 하는 존하이드선교사는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변명하거나 따지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 속에서부터 흘러 넘치기 까지 기도하고 속 뒤집어놓는 사람을 만났답니다.
   
‘‘사람을 고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빠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역자입니다. 속의 중심이 주님으로 가득히 채워지면 누구나 사역할 수 있습니다. 사역은 주님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풍성하신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사랑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다 미워해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고, 다 사랑해도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역사입니다. 

어제 김영광전도사님 결혼식이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이고 혼인 서약이 맺은 것을 아십니까? 혹시 기억이 없으시면 오늘 다시 혼인 서약을 하십시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삼아, 이제부터 평생토록 / 괴로우나 즐거우나 /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 예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여 / 오늘의 이 약속을 굳게 지키기로 하나님과 / 여러 증인들 앞에서 /다짐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나를 신부로 맞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순종함으로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우리를 통하여 사랑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우리 이 시간에 기도하실까요. 여러분, 이 시간에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마음이 심히 메마른 사람이 있으십니까? 정말 사람 때문에 미칠 지경인 사람이 있숩니까? 너무너무 괴롭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 이 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신랑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한 몸되는 시간 되게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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