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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유산 (창 24: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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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유산 (창 24:31~36)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지난 설 연휴 때부터 몇 차례에 걸쳐 [성서적 재정교실]이라는 교육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Crown Financial Ministries]라는 것입니다. 2시간씩 10주간에 걸쳐 받는 이 교육과정을 현재 장로로 피택 되신 다섯 분의 집사님들도 부부가 함께 밟고 계십니다. 앞으로 이 교육과정은 우리 교회 중직자들은 물론 전 교인에게 단계적으로 실시할 계획입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자체 재교육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 교육과정은 우리의 물질적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성경적 원리를 깨우쳐줍니다. 물질적 삶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앙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서적 재정교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든 신자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교육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신학자나 목회자의 안목에서 볼 때는 다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미국에서 개발된 교육과정이기 때문에 한국적 실정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다소 부적절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교역자반에서는 몇몇 성경구절에 대해서 그 의미이해와 적용의 문제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가운데 들어있는 35-36절입니다. 일단 그 부분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교재에서는 먼저 이 35-36절을 읽으라고 한 후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물질적 유산을 남기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그리고 지도자 지침서의 모범답안은 “예, 부모는 물질적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36절 끝에서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한 말씀을 근거로 유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이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선 오늘 본문의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노복이 나중에 주인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과 주고받은 말 중 일부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졌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 간청하기를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했습니다(창24:1-4). 

   그래서 그 종은 아브라함의 소유 중 좋은 것들을 골라 열 마리의 낙타에 싣고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사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갔습니다(창24:10). 나홀 성에 이르러서 그 종은 저녁 때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들 가운데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그때까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그 소녀는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인 리브가였습니다. 그러니까 촌수를 따지자면 아브라함에게는 손녀뻘 되고 이삭에게는 조카뻘 되는 소녀였습니다(창24:11-16). 그 종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유숙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창24:23-24). 리브가는 달려가서 이 일을 집에 알렸고 그녀의 오라버니인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에게 달려옴으로써(창24:28-29) 이삭과 리브가의 혼담이 시작된 것입니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종과 그 일행에게 극진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며 반겨 맞았습니다(본문 31-33절). 재물욕이 많았던 라반은 아브라함의 종의 일행이 낙타 열 마리에 실어 가져온 예물보따리를 보고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보다 한 세대나 젊고 아름다운 리브가야말로 주인의 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처녀라고 믿고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종은 라반에게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진술하기 전에는 라반이 베푼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본문 33절). 라반이 말하라고 하자 그 종은 먼저 자기가 아브라함의 종임을 밝히고는(본문 34절) 주인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첫 마디 말이 바로 오늘 본문의 35-36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그 종은 먼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엄청난 부자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의 그 엄청난 재산은 모두 그가 노년에 얻은 외아들 이삭의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젊고 아름답고 순결하며 눈에 쏙 드는 리브가를 주인 아들의 색시감으로 데려가 주인을 기쁘시게 해야겠다는 일념에서 리브가의 재물욕 많은 오라버니 라반의 환심을 사고 그래서 리브가의 결혼승락을 얻어내려는 그 종의 지혜로운 환심사기작전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결코 모든 유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종이 한 말이 유산상속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그의 소유를 이삭에게 물려준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일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다면 유산상속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유산상속에 관한 법정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식이 아비에게서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재산을 물려받을 때는 재산의 소유권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아비에게 속한 모든 가솔들을 책임지는 의무까지 함께 물려받는 것입니다. 아비가 직간접으로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일가친척과 나아가 그 마을의 모든 사람을 다 먹여 살릴 의무를 다하라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지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정신을 잘 반영하는 것이 성경에서 “기업을 무르는 일”이라고 봅니다. 

  레25:23 이하에 보면 기업을 무르는 일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중요한 곳 몇 군데만 봅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25:25),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레25:35-37).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25:39-43)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레25:47-49), “그가 이같이 속량하지 아니하여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라”(레25:54).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동족 가운데 누구든 땅을 팔아 잃든가 돈이나 양식을 꾸든가 자유를 잃고 종의 신세로 전락하든가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 중에 누가 그런 처지에 놓일 때는 그의 빚을 대신 물어주어서 형제의 기업과 생존권과 자유를 지켜줄 일차적인 책임 즉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장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를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은 그런 책임 때문인 것입니다. 장자 다음에는 차자 그 다음에는 삼자 순으로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형제 중에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들로부터 점점 더 먼 친척들이 차례로 기업을 무를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투철한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5:38)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5:55)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당신의 종 삼으시고 당신의 땅에서 살게 하신 백성이 그 땅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 외의 다른 그 누구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누구나 다 자기에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대대로 그 책임을 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유산이 물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적 재산,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유산의 의미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책임성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유산상속의 법 속에서 개인주의적인 이익승계라는 사고가 설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재벌 그룹의 총수를 비롯해 그 경영진의 최고 책임자들이 줄줄이 특검에 소환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혹을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 가운데 편법 혹은 불법으로 이루어진 재산상속과 경영권승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재벌이 자기가 번 돈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공동체적 재산,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유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사람은 그 청직이일 뿐이고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근본사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이 진리를 터득한 서구의 전통적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이 공동체적 재산,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유산의 의미를 법으로 제도화해서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로 환원해야 하는 책임이 커지며 자손에게 물려줄 때는 어떤 사람은 전체 유산의 절반이나 혹은 삼분의 이까지도 나라에 상속세로 다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깝게 여기는 사람은 아예 미리미리 공익적인 사회사업단체나 문화예술진흥사업에 희사하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에게는 자녀양육의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엿한 성인이 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구실을 하며 살 수 있게 될 때까지 뒷받침을 해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녀들이 독립하고 난 다음에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책임지게 해야 하며 그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 남기고 갈 모든 것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었으며 자기가 성공하는 발판과 배경이 되어준 사회에 환원하고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양식 있는 지성인들이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운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보다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거부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은 결코 자랑스러운 유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유산상속은 결코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하는 유산이 아닙니다. 공짜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기뻐하고 행복해할지 몰라도 그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값지고 지속적인 것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유산상속문제로 부모자식 간에, 형제자매들 간에 질시와 의심과 경계와 견제와 갈등이 발생하고 법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화목해야 할 가족들이 갑자기 경쟁자가 되고 적수가 되며 심지어 평생원수로 돌변하기까지 합니다. 

  자녀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주는 것으로 부모로서의 큰일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으면서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부모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녀들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성공이며 최고의 유산이고 복된 유산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에게 이 복된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희사를 받아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집행하는 단체나 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곳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를 힘쓰는 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유산을 헌금하는 일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습니다. 할 일 많은 교회가 그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힘을 공급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죽을 때는 전 재산을 각자의 교회에 바치기를 기뻐한다면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산은 자녀가 아니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바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진정 복된 유산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된 유산을 남기는 위대한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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