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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 (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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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모든 죄인들의 마음속에는 공통된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발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자하는 열망이 없다면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우물가에 유명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내연의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이 여자의 관심은 더 이상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질문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했는데, 당신 유대인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참으로 경배하고자 할 때, 그것은 예배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예배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예배를 말하는데, 하나는 넓은 의미의 예배이고, 또 하나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우리 삶 전체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 전체를 포괄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우리의 모든 생활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정신의 작용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넓은 의미의 예배와 함께 좁은 의미의 예배도 말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 예배는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로 나뉩니다. 사적인 예배는 가정예배나 또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은 모두 훌륭한 사적인 예배입니다.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식적인 예배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사적인 예배보다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을 훨씬 더 강조합니다. 공적인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곳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으로서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공간과 시간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성은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약 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전해도 절대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중요성은 파괴될 수 없는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세가 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어떤 습관같이 하지 말고 오직 그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더 격려하고 모이도록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한 곳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신자로서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삶으로서 넓은 의미의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관계는, 저수지와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논밭의 관계와 같습니다. 즉, 저수지의 물이 마르면 아래에 있는 모든 산하의 논밭들이 결국은 가물게 되듯,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 또한 하나님 앞에 올바로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넓은 의미의 삶의 모든 예배는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훌륭한 제사입니다. 그런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일주일동안 분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승리한 사람들은, 모든 승리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고 감사함으로 예배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된 후에 비로소 그가 드리는 정성스러운 좁은 의미의 주일 예배는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의 표현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 하늘 문을 열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다시 한주일 동안 삶의 예배를 승리하며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될 때, 하나님 앞에 훌륭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영적인 예배의 훌륭한 모형이었습니다. 이 제사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밖으로는 제사에 관한 모든 법도를 준수하는 것이었고 안으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정성스러운 제물이어야 하며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의 마음과 제물의 정성스러움이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심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이 되어 예배당을 나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처럼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는 떼어 놓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에 있고 어디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순환하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두 예배가 서로 교통하고 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하나를 먼저 택할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제사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로 꽉 차지 못하고 마음은 거짓과 하나님께 대한 싫증으로 가득 차있는데, 예배만 아주 아름답고 예쁘게 드리기 위해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 정도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피할 수 없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사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순교를 불사하며 주일을 지킨 것을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지 모른 다는 불안감이나 마음이 찜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 방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배는 의무입니다. 즉, 마음이 바쳐지지 않아도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이 의무를 내팽겨 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막 대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맡았는데 마음이 그 사명을 못 따라가면 회개하고 분발해서 마음이 그 사명에 합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사명을 못 따르기 때문에 사명을 버려야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한번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그 마음이 따라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보이는 예배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나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예배 나오기 싫어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뵈옵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향해 권고하시는 진리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이 들고 있다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태도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몸은 여기 나와 있지만 졸고 있는 사람, 영혼은 집의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어쩌다 한번 조는 것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계속 조는 것은 영혼이 심각한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돌이켜 서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결국 예배에 있어서 실패는 반드시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사라지고 식어지기 시작하면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농사지어도 열매 맺지 못하고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고 몸부림쳐도 전대는 뚫려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이 생깁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의 영혼에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를 승리하고 온 사람들만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지치고 실패하고 죄 지은 사람들은 잘 살 때까지는 하나님 못 만나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속에서 실패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공적인 예배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잘 살았으면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통회의 제사, 감사의 제사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주께 드린다고 해도 모두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드린 사람은 모든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배의 목표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태도와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예배드리는 태도와 마음이 올바를수록 예배를 거듭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는 말씀은, 뒤집으면 이렇게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찾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 방식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생활 전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깊이 회개하고 방종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어디 가서 주님을 섬기든지 간에 예배자가 아닌 사람의 모든 섬김은 자기만족입니다. 선교의 위대한 비전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도 믿지 않는 그들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싫증 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람을 교회에 불러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까? 깊이 돌이키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으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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