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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마음에 찔려 (행 2: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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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마음에 찔려 (행 2:36~42)
 
질서와 조화를 세워야 할 정치가 무질서와 타락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계절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4월 9일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치 지망생들이 당회 공천을 받기 위해서 줄서 있었습니까? 그런데 또 이제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을 하고 선거에서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가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합니까? 아마 가장 비호감도가 높은 직업이 정치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권력과 맞물려 있는 정치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본래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질서와 조화와 풍요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정치처럼 무질서와 타락을 조장하는 행위가 또 어디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이익과 탐욕과 이권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이합집산을 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인 집단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때로는 서로 거짓과 비방을 서슴지 않아서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치인들을 비방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의사와 건축사와 철학자와 정치가가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자기 직업이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직업이라고 자랑하면서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의사가 먼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간 역사는 외과수술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들어내고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던 일은 바로 외과 수술에 해당되는 것이다.”     

  건축가가 이 말을 듣더니 반박했습니다. “아담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기억하신다.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은 설계행위이고 건축행위다. 그러므로 의료행위보다 앞서 있다” 
  이 주장에 철학자가 나섰습니다. “뭘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 앞에 있을 때 먼저 치밀한 사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행위인 사유와 생각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 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정치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창조 이전은 정말 완전한 혼돈상태였지요. 그렇다면 세분께서는 이 혼돈과 혼란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혼란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바로 우리와 같은 정치가 밖에 없지요” 

  정치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질서와 조화, 덕과 풍요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가의 말은 자기 승리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과 미움과 부정의 언어들로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전략을 통해서 남이 왜 안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정치적인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총선 때 나라와 국민을 위한 멋진 정치가, 좋은 정치가를 기대하면서 투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언어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했고 수사학을 썼던 인물입니다. 그는 언어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모든 언어에 담겨 있는 것인데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입니다. 

첫 번째, 로고스라는 말은 언어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뜻합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논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파토스는 언어 속에 담겨 있는 감성적인 공감입니다. 마음의 울림과 떨림이 있을 때 바르게 설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열정이 담긴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세 번째, 에토스란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뜻합니다. 삶의 신뢰성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중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메시지인 로고스도 중요하고, 감정과 느낌이 담겨 있는 파토스도 중요하지만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라고 말합니다. 말하는 데 있어서 사람의 성품과 인격이 가장 소중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말하는 사람의 에토스적인 성품이 풍부하고 파토스적인 열정이 불붙고 로고스적인 메시지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다 설득되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을 증거 했던 사도들에게도 에토스가 있었습니다. 파토스 열정도 있었습니다. 말씀의 핵심인 로고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 강력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았던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사도들이 증거 했을 때를 가장 강렬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사도행전 2:37)

  이 말씀은 메시지가 사람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음이 쪼개지는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이 바로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똑같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지만 하나는 거부하는 마음, 거절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54-56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도행전 7:54-56)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으나 그들은 이를 갈고 분노했으며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귀를 막았고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저항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그것을 내 사건과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찔리면서 분노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똑같은 말씀인데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37)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자신의 죄악이 기억났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회개하고 눈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들이 받은 충격이 무엇일까요? 왜 마음이 찔렸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영혼의 비명을 지를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변화가 될 수가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동안 받았던 어떤 메시지에도 도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고 그냥 듣던 말씀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라지 않았고 마음의 찔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베드로가 한 말씀을 들으면서 놀랐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목격한 메시지를 들었을 때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놀라게 했을까요? 베드로가 선포했던 메시지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전에 말했던 세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로고스적인 요소,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성적이고 느낌을 표현하는 열정적인 모습도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의 삶의 인품도 들어 있었습니다. 로고스적인 모습은 베드로가 선포한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 박혔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는 당연히 십자기에 못 박혀야 된다, 잘 죽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인은 반드시 죽여야 한고 생각하면서 타당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목격한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놀랐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더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새로운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 시대에도 도전적인 메시지입니다. 기독교에는 확실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생명의 메시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하여 주신다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죽음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말씀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말씀입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함으로 인간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했던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세계,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변화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 또 하나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삶의 변화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도망갔던 겁쟁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되고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기쁨과 평화가 넘쳐났습니다. 위협해도 굴하지 않는 복음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놀랐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가졌기에 저런 기쁨과 생명이 넘치고 있는지, 저들이 갖고 있는 열정이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갖고 있는 기쁨이 우리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열정과 헌신이 다시 회복될 때 세상이 우리를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우리가 전도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너는 예수 믿고 도대체 무엇이 변했냐? 예수 믿고 기쁨이 있냐? 예수 믿고 평안하냐? 예수 믿고 그 정도밖에 안되면 나는 예수 믿지 않고 너보다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당시 참으로 고통 받고 억압받고 죄 때문에 아파했습니다.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 선교의 역사가 기독교입니다. 우리 안에 다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한 평안의 역사를 말씀을 통해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새로운 교회가 되며 신앙의 모습이 회복되는 첩경입니다. 바로 사도 베드로에게는 그런 담대함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가슴에 벅차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가슴에 충격을 받아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가?”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그들이 놀란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을 때입니다. 이천 년 전 로마 제국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건 순교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오직 주님은 로마황제인 가이사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초라한 예수,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예수를 향해서 주님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이사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생사여부가 갈라짐에도 신앙인들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영혼의 탄식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거짓된 주님을 내 안에서 쫒아내야 합니다. 내 안의 돈이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붙잡고 만족감을 누리려는 거짓된 주인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면 나도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당하면 내 가슴이 아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늘날에도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생을 다시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잘라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 치유의 기쁨, 감사의 기쁨, 회복되는 기쁨, 부활의 능력을 함께 가지고 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서 했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37)

  이것은 영혼의 고뇌입니다. 영혼의 비명입니다.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영혼의 탄식입니다.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실존이 요동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내가 너무 무지했어, 내가 예수님을 너무 몰랐어,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했어, 내가 믿은 가치관이 잘못 되었어, 지금 나는 낭떠러지에 있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어.” 

  이런 자기 실존의 위기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경험하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내가 어찌할꼬?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너무 조롱하고 비웃었는데, 성령님을 거스르고 성령님을 아프게 했는데.” 이런 마음의 통탄이 바로 “내가 어찌할꼬?” 라는 고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 자기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책임이고, 예수님을 창으로 찌르고 손에 못을 박고, 고통을 가한 것은 로마 병정들이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종교지도자들, 대제세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친 것도 무지한 민중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들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전달되었고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사도행전 2:36) 

  그 순간 사람들이 베드로 앞에서 자신의 죄악과 부끄러움을 통절하게 깨달으면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통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내가 어떻게 살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까?”라는 결심이 마음에 잘 생기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건강이 바닥난 후에야, 돈이 다 떨어진 후에야 이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건강할 때 “어찌할꼬?”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질 때 “어찌할꼬?”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줄 아는 사람은 사람입니다. 돈과 재물을 가지고 있을 때 “어찌할꼬?”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건강을 사용하십니다. 돈과 재물을 사용하십니다. 달란트를 사용하십니다. 권력을 사용하십니다. 명예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할 때 해결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나아올 때 예수님께서 상처와 연약한 마음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해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어찌할꼬?”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의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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