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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주의 것이니이다 (대상 2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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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의 것이니이다 (대상 29:10~19)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대상17:4) 하시며 그의 몸에서 날 아들이 건축할 것임을 알리셨습니다(삼하7:12-13). 

이에 다윗은 두 말 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뜻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고 죽을 날이 가까워오자 다윗은 성전 건축이 큰 공사가 될 것이고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는 생각(대상29:1)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는 자기가 해놓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다하여 준비했습니다(대상29:2). 다윗뿐 아니라 모든 지도자들과 온 백성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석들을 성심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해 바쳤습니다(대상29:6, 9).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충분히 확보한 후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 몇 가지 중요한 사고가 들어있음을 봅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고입니다. 

본문 11-12절을 봅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이 첫 번째 사고와 연관된 두 번째 중요한 사고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 세상에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구절이 본문 1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조상 때부터 그러하다고 합니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한 것은 우리의 희망을 둘 곳은 우리가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인 이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사고는 앞선 첫 번째 사고와 두 번째 사고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사고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유일하신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다 바쳐야할 것이라는 사고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지고 그것도 우리가 영원히 살 곳도 아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쓰지 않고 자기 것인 양 움켜쥐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리는 것은 즐겁고 기쁘고 정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사고입니다. 

먼저 13-14절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께 바칠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있는 힘껏 다 드리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16-17절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다윗이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을 팔아 땅값 얼마를 감추고는 다 바치는 것처럼 사도들과 하나님을 속이려 한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지 않게 정직하게 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일 뿐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기꺼이 해야 한다는 사고를 확실히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유입니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움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 자유로움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첫째 이야기는 32년 전 유학 중의 경험담입니다. 프랑스에서 처음 맞은 여름방학 때 아프리카 학생들과 같이 지낸 경험담입니다. 긴 방학이 되었는데 프랑스 학생들과 가까운 유럽에서 온 학생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 부엌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더운 여름에 장보러 다니는 시간과 수고를 줄이기 위해 일주일치 장을 미리 봐다가 냉장고에 다 채워놓고는 그때그때 직접 조리를 해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을 차려먹으려 냉장고를 열었는데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했지만 하는 수 없어 다시 장을 보다가 넣어놨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부엌에 가보니 아직 많이 남아있어야 할 음식물이 또 다 없어진 것입니다. 다시 장을 봐왔지만 그런 일이 하루 걸러서 한 번씩 일어났습니다. 화가 났지만 영문을 몰라 하던 어느 날 평소보다 늦게 부엌에 갔더니 아프리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막 식사를 해먹고 난 뒤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며칠 전부터 냉장고에 넣어둔 것들이 싹싹 없어지곤 했는데 혹시 뭐 본 적이 없느냐고. 그랬더니 그들 대답이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것입니다. 왜 먹었느냐 물으니 식사 때가 되었는데 마침 있기에 먹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남의 것을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렇게 먹어도 되느냐고 또 물었더니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의 사리 있는 대화가 불가능한 것 같아서 앞으로는 꼭 물어보고 먹으면 좋겠다고 부탁한 후 기분이 나쁜 채 부엌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싫든 좋든 그들과 몇 달을 한 지붕 아래서 지내다 보니 점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나라에서는 배고프면 누구든 눈에 띄는 대로 가까이에 있는 바나나나무에서 바나나 따먹고 야자나무에서 야자 따먹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네 것 내 것을 그다지 따지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생활관습을 깨달은 순간 크게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훨씬 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들이 훨씬 더 건강한 공동체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새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소유관념에 사로잡혀있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메마른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워졌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또박또박 가르치던 내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앞으로는 물어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 놓고 필요하면 꺼내먹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몰랐습니다. 

또 냉장고 다 비워버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부엌에 신경 쓰지 않으니 공부에도 더 잘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박한 아프리카 학생들과의 공동생활도 얼마나 즐거워졌는지 모릅니다.

   둘째 이야기는 새문안교회에 부임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생활 속에서의 경험담입니다. 이 이야기를 개인적인 자랑이나 공치사로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밖에서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원고를 쓰거나 해서 생긴 일체의 사례비나 회의에 참석해서 받는 교통비를 모두 헌금봉투에 넣곤 합니다. 그것이 단돈 이 만원이든 수백만 원이든 그대로 헌금주머니로 들어갑니다. 해외에 다녀와야 할 때 교회에서 주는 출장비도 거의 안 쓰고 반납하곤 합니다. 아깝다는 마음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헌금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그 액수가 크면 클수록 신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굳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유입니다. 거칠 것이 없는 자유입니다. 구질구질해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입니다. 치사해지거나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크든 작든 어떤 교회나 노회에도 가서 설교나 강연을 할 수 있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다녀올 수 있는 자유로움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돈과 바꿀 수 없는 이 자유는 누려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다윗의 기도 속에서 발견하는 네 번째 사고는 앞선 세 가지 사고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속에 확실하게 지녀야 할 것이며, 특히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할 때는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18-19절을 봅니다: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다윗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사고들을 다윗은 하나님께서 온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넣어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아들 솔로몬이 그런 정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건축은 왕으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마음의 준비와 정성을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가 재건축을 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닐 것입니다. 당회는 결정을 했습니다.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재건축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이 전 당회원이 설 연휴 3일을 완전히 반납하면서 성경공부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11-12절 말씀인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하는 이 긴 요절을 열심히 외우느라고 고생도 했습니다. 당회가 책임지고 하되 일방적으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공청회를 열어서 전 교우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인 건축계획을 세워가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왜 이 시점에서 재건축을 해야 하느냐 하는 설명도 드릴 것입니다. 당회가 책임지고 하되 참여는 온 교우들이 해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와 기도와 실질적인 책임분담으로 다 같이 참여해야 합니다. 성전은 그렇게 짓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다윗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또 대상29:1에 보면 다윗은 백성 앞에서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코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높이 빛나게 지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 복판 광화문에 자리를 보존하며 교회를 짓고자 한다면 싫든 좋든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감사해할 만한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역사적 교회, 대한민국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상징성과 품위를 갖추고 감동을 주며 교회건축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교회를 질 것입니다. 그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완성된 건물로만 아니라 준비를 시작해서 완공하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절차까지도 교회건축의 교과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의 절대적인 관심과 기도와 참여와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새문안의 성도들은 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역을 우리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과 기도의 손길을 모두 모으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만큼의 힘을 아끼지 않고 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채워주시고 다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이 성전건축을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온 교우들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성전을 건축하게 된 일을 행복하게 여기며 내가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재물이 바로 이 성전건축을 위함이었다고 여기며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을 지으실 일에 쓰실 재물을 내게 맡기시며 지금까지 모아오신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재건축한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니까 벌써 슬며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더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오히려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났던 옛 교우들이 교회를 재건축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오는 사람이 더 많은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얼마를 바치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분명하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물질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정직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릴 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9:7-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앞으로 있을 교회재건축이 모든 성도의 즐거움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이 항상 넉넉한 가운데 건축을 완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새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선한 사업을 또한 넘치게 하게 되는 우리 교회이기를 기원합니다.

   요즈음은 교회가 크다는 사실만으로, 교회를 건축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비정상적인 세상입니다. 우리가 건축을 시작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비난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건축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건축, 하나님의 의한 건축, 하나님의 건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완공이 되고 봉헌할 때는 신자이건 아니건 모두가 그 결과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건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라는 확신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자유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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