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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여인, 라합 (수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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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여인, 라합 (수 2:1~21)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서 2장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피차 은혜를 받으려 합니다. 때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에 앞서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두 정탐꾼은 여리고 성벽 위에 있는 기생 라합의 주막에 들어가 머물었는데, 어느 여리고 백성이 두 정탐꾼이 그 주막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는 왕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붙잡힐 위기에 놓였으나 기생 라합이 기지를 발휘해서 왕이 보낸 사람들을 따돌리고 두 사람을 무사히 돌려보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줌으로써 그 자신과 그녀의 일가친척을 멸망에서 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합의 행위를 믿음의 표현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 라합이 그같이 행동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신 것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이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것도 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두 정탐꾼이 그녀에게 그같은 말을 해 준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천사가 라합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2장에 보니, “8)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상숭배에 젖어 살던 일개 가나안 여인이 어떻게 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된 것일까요? 그 답을 알기 위해 계속해서 라합의 말을 들어봅시다. 

“9)…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40년 동안 행하신 일들을 들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갈라서 그 사이에 난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던 일과 선민이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과 전쟁하여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다 들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은 라합만 들은 것이 아니라. 여리고의 모든 거민이 다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라합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주막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막집은 소문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수년 간 성벽 위에 있는 그의 주막집에 다녀간 손님들로부터 여러 가지 소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다른 소문들도 들었을 터지만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소문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라합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신 대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누군가로부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믿은 우리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주민이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라합 한 사람만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라합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라합은 조상대대로 섬겨오던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상천하지에 하나님으로 믿은 것은 그녀가 가나안 족속이 숭배하던 우상들을 버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라합은 풍문을 듣고 막연히 추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노라”고 자기의 신앙을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끝까지 보호해 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상천하지에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두 번째로, 라합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혈연을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벽에 있는 한 주막집에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생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 라합은 한 눈에 자기 집에 들어온 두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은 라합 뿐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의 주민 하나도 두 정탐꾼이 라합의 주막에 들어가 머무는 것을 알고는 여리고 왕에게 가서 고해 바쳤습니다.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이에 여리고 왕이 정탐꾼들을 사로잡기 위해 사람들을 라합에게 보냈습니다.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러나 라합은 이미 그 두 사람을 지붕으로 데리고 가서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두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하기를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고는 라합이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말하는데, 그것은 본문이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경이 말씀하려는 것은 라합이 얼마나 정직한 여자였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라합의 행동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그녀가 정탐꾼들을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모두가 반역죄로 몰려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합니다. 라합의 행동은 자기 민족을 배반한 반역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 민족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으려는 적국의 스파이와 내통한 반역죄는 죄질이 매우 나쁩니다. 그러나 성경은 라합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0절로 31절에 보니 “30)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으며, 야고보서 2장 25절로 26절에는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라합을 행함 있는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와 사람의 평가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평가 중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옳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정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뢰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라합의 행위를 사람들의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태를 파악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와야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는 내 가족과 민족이 요구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옳은 것이냐 그릇된 것이냐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물건이나 다 멸하라고 하셨으나, 아말렉 왕 아각을 포로로 잡고, 기름지고 살진 소와 양들을 남기고 가치 없는 것들만 진멸했습니다. 그러고도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사울은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라고 하자,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 생각과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사울과 백성들은 기름진 소 떼와 양 떼를 죽여 없애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좋은 짐승들은 살리고 그 대신 가치 없고 볼 품 없는 짐승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울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도 행하고 경제적인 이익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라합의 행위는 자기 동족에게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면 왕의 진노를 사서 그와 그의 일족이 처형당하게 될 것을 알았으나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동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돕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라합의 행위가 정당하다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줄을 그녀가 알았다”는 진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라합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두 정탐꾼이 체포되는 것을 방치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 여러분께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라합과 같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결정하심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라합은 믿음으로 자신과 자기 친척들의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여호와로 맹세 시키고 진실한 증표를 요구한 것’은 그녀의 신앙이 매우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라합이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그 자신과 자기의 일가친척을 구원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더욱 아름다운 사실은, 라합이 자기 목숨만 건진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과 친척을 다 살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하였는데, 라합도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인해 자기에게 속한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우리도 라합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하였을 때, 두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했습니다. 

라합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는데, 어찌 그만한 보답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길 수 있지, “나는 천국 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상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봄으로 언제나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라합이 두 정탐꾼을 창에서 달아 내렸던 붉은 줄이 라합과 그의 온 집을 살리는 증표가 되었습니다. 

여리고 왕이 보낸 사람들을 따돌린 후에, 라합은 밤중에 은밀하게 창에서 밧줄로 늘어뜨려 두 정탐꾼을 달아내려 주었습니다.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으므로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뒤쫓는 사람들이 당신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에 당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정탐꾼이 라합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와 맺은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라 했습니다. 이에 라합이 대답하기를 “당신들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성벽 위에 있는 붉은 줄은 매단 집을 범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수 6:17) 

라합의 집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전역을 다니면서 애굽인의 장자를 죽일 때, 이스라엘 자손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발라 표시를 하고 집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죽음의 재앙을 면하였습니다. 똑같은 원리로, 라합과 그녀의 친척들은 붉은 줄을 매단 집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죽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붉은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덕분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니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붉은 줄을 매단 라합의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들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지 낮은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그런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은 조건은 단 하나, 붉은 줄을 매단 그 집안에 들어왔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 착한 사람이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심령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사람에게도, 선량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 강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가 구원 받은 것은 무슨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자기의 운명을 부탁한 것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라합은 온갖 우상을 숭배하던 가나안 여인이요 주막을 경영하던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듣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심을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왕의 명을 거역하고 두 정탐꾼을 무사히 돌려보냄으로써 그 자신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합의 믿음을 귀히 보시고 복을 주셨으므로 유다 지파 사람 살몬과 결혼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라합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 편에서 결단하고 실천함으로 라합과 같이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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