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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집 (마 12: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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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마 12:38~45)

I. 그 때에 

김정일과 푸틴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장난끼가 발동된 두 사람이 자기 경호원들 가운데 누가 더 충성심이 강한가 내기를 했습니다. 푸틴이 자기의 경호원 이반에게 명령을 했지요. 
이반 여기가 20층이야 뛰어내려.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 보더니 떨어졌다간 뼈도 추리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반이 무릎을 딱 꿇고 
"대통령님 왜 이런 명령을 하십니까? 제게는 아내와 아들들이 있습니다." 애원했습니다. 
"그래 우리가 장난한 거야." 
김정일이 자기의 경호원 이만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자네 뛰어 내려." 
"네. 즉각 순종하겠습니다." 
옷 벗고 구두 벗더니 창문을 열고 사정없이 몸을 날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푸틴이 급히 이만을 끌어안고 "자네 왜 이러나 우리가 장난한 거야." 하고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만이 하는 말, "놓으라우야. 내게는 아내가 있고 아들들이 있다우야." 

아들이 있고 아내가 있는 상황조건은 똑같았지만 반응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단히 공손한 문체로 쓰여 있어서 본문의 분위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고가고 감정의 흐름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맥락을 잘 살펴보면 대단히 살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10장까지 환영받던 예수님은 11장에 와서 세례요한의 실족으로 시작하여 주변 사람들의 의심으로 이어지게 되고 12장에 와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시작되어 집니다. 이 충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2장 초반에는 안식일 논쟁으로 인하여 충돌이 시작되더니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논쟁과 충돌은 점차 격렬해져 소위 바알세불 논쟁 - 곧 예수를 귀신의 왕이라 몰아부치는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장 38절에 보면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때에" 본문에 앞서 일어났던 "바알세불 논쟁"을 말합니다. 

22절에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23절에 사람들이 놀라며 "어~ 이분이 아무래도 다윗의 자손인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마태 신학에서는 메시야와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24절)고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단과 사단이 싸우면 어떻게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친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한 것이니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에 일리가 있지 않느냐? 동조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의구심,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무당이 굿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이 귀신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과 무당이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궁극적인 목적이 다릅니다. 

무당은 정말 귀신을 힘입어서 굿을 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위,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무당은 귀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빌어서 잠시 자리를 떠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세로 귀신을 꾸짖어 쫓아버리시는 겁니다. 

무당은 쫓겨난 것처럼 가장을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을 섬기게 하도록 흉계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고 자기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무리들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다를까요? 보는 시각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왜 그들의 말이 다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사건을 해석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을 우리가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II.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

예수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장난이라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참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보다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이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이 사실에 떨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하십니다. 인간의 실수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참 인자하고 부드러우십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자들, 사단의 수하된 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단호하셨습니다. 

앞절 31절 32절에 보면 "...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 우선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늘에 닿고 온 우주에 가득차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진실하게 회개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죄라도 용서하십니다. 

2) 심지어 예수님을 몇 번 말로 거역한다 해도용서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가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은 참 믿기지 않는 주장입니다. 인자를 말로 거역하면 용서가 있지만 성령을 거역한 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용서 받지 못한다. 마태의 이 주장이 참 의문이 많이 가는 주장입니다. 

마태의 가장 큰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기독론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령을 잠시 거절한 것은 용서가 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마태신학에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마태는 인정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 좋지 못한 감정으로 오늘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본문에서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숨기고 계셨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을 거역한 죄는 성령님이 임하면 다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가능하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한 죄, 곧 성령을 훼방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거역하고서는 구원에 접근조차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게 된 것, 우리가 천국에 가보지 않았지만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 것, 우리 죄가 다 용서 받은 것, 이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이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 영광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우리가 믿어지게 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성령을 우리가 모셔들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가능해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원동력이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는 근거가 성령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을 거역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고서는 성령님을 모독한다면 이미 하나님이 포기해 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두려운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제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성령님의 역사 앞에 우리 마음이 강팍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III. 표적을 보여 주시오!

본문을 시작하는 38절 "그 때에" 이 한마디 속에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사건, 모든 내용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데대해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귀신의 장난이라고 했던 그들이 또 무슨 표적, 또 무슨 사인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마태복음 8장 이후에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까? 몰려온 병자들을 모두 다 고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오늘도 기적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기적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소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란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 점점 더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강팍해 지기 시작하면 더욱 강팍해 지는 것입니다. 강팍한 심령이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시험 드는 것도 자칫 습관일 수 있습니다. 충성도 습관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 그 심령이 병들기 시작하더니 점차 그 심령의 병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가더니 이제는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단히 공손한 것처럼 질문 합니다. 만약에 실제로 공손하게 질문했다면 그것은 교활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선생이여" 이 말은 "디다스카테"라는 말인데 문맥상의 의미는 거부감이 담긴 호칭 "선생" 이런 뜻입니다. "선생! 표적을 좀 보여주시오." 우리 예수님 시험당하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이 돌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는 시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다면 그들이 받아들였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예수님을 마술사라고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결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예수님 인간의 호기심이나 채워주시려고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도 예수를 시험하고자 이적을 요구할 때에 우리 예수님 결코 거기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의 표현으로 당신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이적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표현으로 오늘도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호기심이나 채우고자 기도하고 예수님을 찾아온다면 예수님은 침묵하실 것입니다. 

IV. 요나의 표적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9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악하다"는 말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바로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라는 이 말은 사단에게나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귀신들렸다고 하는 그들이야 말로 악한 사단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음란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관계에서 쓰여진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구약성경은 부부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신랑되신 예수님 교회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예수님만 신랑으로 믿고 섬겨야 할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 바로 음란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음란한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며 한없이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음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는 말씀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있었지요. 아마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너희들이 십자가에 나를 죽이고 장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나처럼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부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한 첫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기적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이다. 최고의 표적은 십자가이다. 그러나 너희같은 자들이 십자가의 기적,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죽어지는 이 엄청난 표적을 너희들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니라. 예수 자신이 가장 위대한 기적이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었던 최고의 이적은 최고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가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퍼트렸습니다. 

V. 심판 때에 

이토록 위대한 표적, 예수를 거역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심판 때에.

1)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너희를 정죄하게 될 것이다. 요나는 불순종하다가 겨우 매맞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기쁨으로 설교한 사람이 아니라 억지로 설교했습니다. 그 알량한 설교를 듣고도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곧은 길을 가도 사흘은 가야 할 큰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는 하루쯤 알량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전도를 듣고서도 짐승까지 회개하고 금식했습니다. 그 요나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큰 선지자 예수님이 지금 와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회개하지 아니했다. 심판 때에 우리 이방인 니느웨 백성만도 못한 녀석들아 그들이 너희들을 정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심판 때에 남방 여왕 시바가 너희를 정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 멀고 먼 이스라엘을 달려옵니다. 솔로몬보다 큰 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귀를 막았다. 심판 때에 그 여인이 일어나서 이방 여인보다 못한 녀석들아 하고 정죄하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신비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의 책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안방에서 방송만 틀면 한국 최고의 목회자들의 성경공부와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들마다 성경공부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신앙, 아직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수준들, 걸핏하면 낙심하고 시험들고 넘어지고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서 어디에 또 다른 진리가 있을 것인가 기웃거리는 추한 우리의 행태들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너희들을 책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요나의 알량한 설교를 한번 듣고서도 회개했다. 너희들은 무엇이냐? 우리는 솔로몬의 설교 한번을 듣기 위해서 멀고 먼 길을 여행해 왔다. 너희들은 이 영광스러운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부둥켜 안고 살기 위해서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어떤 몸부림을 하고 살아가느냐. 마지막 때에 그들이 일어나 너희를 정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VI. 빈집 비유

오늘 본문은 빈집 비유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며 왜 예수님께서 빈집 비유를 말씀하시는지 궁금해 집니다. 뜬금없이 빈집 비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는 이 빈집 비유를 바알세불 논쟁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 본문에서도 앞선 22절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귀신장난이라고 비난한 연속선상에서 본문을 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어집니다. 정작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지배를 받는 것은 예수 내가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 너희들이다. 너희들의 미래가 이렇게 귀신의 소굴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이지요. 

"한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아가 살 곳을 찾아 봅니다. 살 곳을 찾지 못하고 옛날에 살던 그 사람에게로 찾아옵니다. 마침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까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이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 

"이렇게 되리라"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실상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미래가 종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본문은 우리에게 그려주고 막을 내립니다. 

1) 여기 빈집 비유를 정치적 예언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옛 우상숭배의 귀신을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작 메시야가 왔으나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피값을 우리에게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그 피값이 그들에게 부어집니다. 주후 66년에서 70년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맞고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았으며 저항군들은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 한명까지 처절하게 죽는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려 1900년이 넘도록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예수님은 지금 예언하고 계신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빈집의 비유에 대한 종교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귀신들은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귀신들은 너희에게로 돌아와 하나님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은 너희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유대교라는 종교의 영이 너를 지배하여 오랫동안 구원의 반열을 상실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율법과 제사로 그 집은 꼼꼼히 청소되어 비어있었다. 그 집은 새로운 주인인 예수를 모시도록 단장된 집이었다. 그러나 메시야를 거부함으로 천국은 이방인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고 그 이방인들이 심판대에 너희들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3) 이 빈집 비유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양심적으로 잘 청소되고 수리가 되어 있다 할지라도 내 인생의 집에 주인이 입주하지 않았다면 더욱 악한 귀신의 입주를 허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못 배운 자는 죄를 지어도 시시하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배운 놈들은 더 무서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못 가진 사람은 죄를 지어도 별로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한 도시를 망가뜨릴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면 나라와 역사와 사회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주인없는 그 집은 아무리 잘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할지라도 귀신은 말합니다. "저건 내 집이야. 언젠가는 내가 돌아갈 내 집이야."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거하신다면 우리에겐 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어느날 귀신이 날 찾아와서 마음문을 두드립니다. 똑똑똑 여기 누가 사시오. 그때 내 마음에 주인되시는 내 영혼에 주인되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나아가십니다. 여긴 내가 거하는 집이니라. 여긴 이미 천국이니라. 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귀신아 이곳에서 떠나갈지어다. 어느날 이단이 찾아와서 노크를 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악하고 음란한 귀신아 여기는 내가 거하는 하나님 나라이니라. 네가 찾아올 틈이 없느니라. 떠나갈지어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집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행여 빈집은 아닙니까? 계시록 3장 20절은 기록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셔서 내 마음 중심에 내 영혼 왕좌에 좌정하시고 영원히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내 집의 주인은 오직 한분 예수 당신 뿐이십니다. 당신이 내 집 내 영혼의 주인이심을 인정합니다.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라는 사람이 썼던 책 가운데 "My heart Christ's home"이란 책이 있습니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그런 제목이겠지요. 

자기 마음을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고 몸부림해도 날마다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지는 것을 어느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아예 내 집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서재를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주방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침실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벽장 구석 구석 모든 공간을 예수님께 다 내어 드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서재로 갑니다. 서재는 집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조종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책들이 많습니다. 보지 말아야 될 영화도 있습니다. 서재가 너무나 어지럽고 지저분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정리하고 성경과 말씀으로 서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의 생각은 맑아지기 시작했고 마음은 깨끗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방으로 옵니다. 주방은 식욕과 욕망의 방으로 집에서 가장 큰 공간입니다. 식탁에 차려진 메뉴는 돈과 증권과 명예와 지식과 인기와 학력과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싶었던 메뉴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실 수 없었습니다. 얘야, 이것을 치우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내가 이곳을 채워주마. 주님께서 식탁을 새롭게 채워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님을 기뻐하는 묵상으로 그 식탁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침실과 벽장 등 구석구석을 예수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가득히 채워졌을 때에 "My heart Christ's home" 내 마음은 예수님의 집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라는 책이지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주인되어 사십니까? 여러분 세상의 어떤 것들로 채우지는 않았습니까? 내 마음이 비어있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한다하는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거기는 귀신의 집으로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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