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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살전 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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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살전 5:12~22)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기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참기름과 들기름입니다. 참깨와 들깨를 들들 볶아서 짜낸 기름입니다. 이 기름을 우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물을 무칠 때도 사용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때 아주 요긴하게 이 기름들을 사용합니다. 물론 비빔밥에도 역시 빠질 수 없는 재료입니다. 이 기름들은 맛도 맛이지만 무엇보다 그 향기가 우리의 입맛을 돋우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기름만 하더라도 그 값이 비싸서인지 가짜가 많죠. 오죽하면 순 진짜 진짜 참기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겠어요? 더욱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반 사람들은 그 기름이 순 진짜 진짜 참기름인지 순 가짜 가짜 참기름인지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한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유명 상품의 짝퉁을 만들어내는데 아주 이골이 나 있었어요. 

그런데 심지어는 지금도 우리가 만든 짝퉁들을 오리지널 회사에서조차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외국 명품 회사는 한국의 짝퉁 기업을 찾아와서는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짝퉁 기업에서 주문자 상표로 진짜 회사에 납품해 달라고 하는 요청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이제는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그런 세상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돈이 되는 것이나 만들지만 중국에는 심지어는 달걀까지도 가짜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세상에 믿을 것이 무언지 모르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가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성도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무늬만 성도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에 우리는 안타깝습니다. 분명 교회는 왔다 갔다 하는데 전혀 그 사람에게서 예수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어찌 성도라 할 수가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들 역시 나름대로 성도라면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도의 모습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할 겁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기준에 너무도 못 미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고 또 좌절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바 성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오히려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에게 요청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야말로 믿음의 역사도 있고 사랑의 수고도 있으며 소망 가운데 참고 기다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들에게 더 바랄 것도 같은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요청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만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으로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여러분 가운데 수고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도하는 분들을 존경하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도하는 분들이란 곧 교역자와 교사를 가리킵니다. 그들을 존경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3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진 자들이기에 여러분을 주의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들의 일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제가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못되게 되면 그 책임을 제가 져야 한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목회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이 힘주시고 지혜 주시고 능력 주셔서 감당케 하시지만 동시여 여러분들이 순종하며 권위를 존중해 줄 때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교역자가 주님 안에서 모든 수고를 다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순종 역시 주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 주실 것은 제가 말씀을 벗어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고 제 생각이 아닌 항상 주님의 은혜와 감동하심을 따라 교회와 여러분들을 섬겨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어쨌든 오늘의 말씀은 교역자와 교사를 존경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존경은 곧 칭찬과 격려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질서를 따라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찌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결국 교역자를 위시해서 모든 교사들이 더욱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는 일이기는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과 격려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힘을 더해 주신다고 해도 주위에서 계속해서 비아냥거리고 비협조적으로 나아가게 되면 결국에는 힘이 다 빠져서 주저앉게 되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결국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관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그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대해 주십시오.”라고 계속해서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각별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 각별한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니까 무슨 특별한 대접을 하라는 거냐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사랑, 최고의 칭찬과 격려는 다름 아닌 순종입니다. 즉 가르침을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는 삶의 모습을 바울 사도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여러분은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언제 예수님이 내게 평화를 주셨냐고 하시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우리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던 것이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한 몸입니다.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그로 인해서 온 몸이 다 아픈 것처럼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괴로울 때가 언제인 아십니까? 그것은 성도 사이에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가운데 누구하나 귀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할 때 그 빈자리를 보는 마음은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리를 채우고 있다고는 해도 기뻐하며 사모하는 모습이 아닌 괴로움으로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때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성도 여러분이 밝은 모습으로 기뻐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성도들 모두가 하나같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 사실 목회자의 마음이 기쁜 것은 물론 함께 하시는 하나님도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게으른 자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힘이 없는 자들을 도우며, 모든 사람을 인내로 대하십시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서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라고 하는 말씀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고 그 관계를 유지할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성도들은 인간관계에서도 남달라야 합니다. 성도는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세워진 리더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를 존경하며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칭찬과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연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사람에게는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게으른 자를 권면하고 연약한 자를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음으로 자라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칭찬과 격려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칭찬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살펴보십시오. 동시에 나의 도움과 격려와 권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돌아보십시오. 사실 나도 칭찬 받기를 원하고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과 격려와 권면이 필요한데 언제 그렇게 남을 돌아볼 수가 있느냐고 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도움이 필요하기에 오히려 먼저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 주님이 주신 평화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또한 화목을 이루어나가는 힘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으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주시는 평화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 날마다 서로 화목을 이루어나감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기도 가운데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 있다면 바로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도 없고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할 수가 있냐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2절부터 시작해서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하는 말씀까지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라는 말로 이어지면서 악한 것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 22절까지가 전부 예수 안에서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데 그 정 가운데에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라고 하는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결국 우리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다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기도가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그것도 그냥 기도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데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 그럼 잠도 자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인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우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겠으며 또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만큼 기도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기도를 하고자 하면 결코 기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기도의 내용도 그렇지만 기도하고자 시간 내어 자리를 마련하기조차도 쉽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되고 그러면 악한 마귀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마귀는 결사적으로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래서 혹은 이야기하기를 나는 무슨 기도를 해야 될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 26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적에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내 마음과 입술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우리의 생각과 입술을 사로잡아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악한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고자 마음을 먹기만 하면 이런 저런 기도할 수 없는 형편이 떠오르게 만듭니다. 이상하게 기도하고자 하는 그 시간에 이런 저런 급한 일이 생기게도 하고 새벽에 기도하고자 하면 왜 그렇게 몸이 힘든지 도무지 일어날 수조차 없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도 합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피곤한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기도하다 작심삼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가 있단 말에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런 연약함도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기도하다가 지쳐서 잠이 든다고 해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기도야 말로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찬양하고 기도하게 되면 즐거워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도 모르는 즐거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워나가서 룰루랄라 하게 되는 것이고요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입장에서도 감사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즐거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내 마음이 가득 채워지게 되면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면 어찌 즐겁지 않겠고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화가 변화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즐거워하는 것이요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고 했는데 그게 우리가 망하도록 기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잘 되기를 위해서 친히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즐거워할 수 있고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한 마귀는 그게 싫습니다. 마귀가 하는 언제든지 우리를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즐거워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면 결국 마귀는 자기가 할 일을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시작이 되는 기도를 못하도록 자꾸 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결과적으로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만 본래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빈틈이 없이 은혜와 복으로 채워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심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말씀대로 오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감동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또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또는 무슨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아하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해야겠다 또는 이런 저런 일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 깨우침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나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나 혼자서는 못해요 그러니 주님이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도 능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거든 나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주님의 지혜로 깨닫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어떤 말씀은 그 정도는 모른 척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될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이 곧 능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시인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이 능력이 되게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모든 일을 잘 살펴서 선한 것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것입니까? 곧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나는 못 한다 나는 힘들다 나는 안 된다고 하면서 주저앉으려고만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내 능력을 보지 마시고 내 형편을 보지 마시고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보시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악한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럼 무엇이 악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악한 것이요 믿지 못하기에 믿음이 없는 소리를 하게 되고 말씀대로 따라 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내 뜻대로 살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내게 손해가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악한 마귀란 말입니다. 왜 우리가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고 비아냥대며 등을 지게 됩니까? 바로 그렇게 만드는 자가 악한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마시고 오직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따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감동대로 순종하심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할 수 있도록 방법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서 주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 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날마다 넉넉하게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또한 모든 것에 풍족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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