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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된 인생! (삼상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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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된 인생! (삼상 16:1-13)
 
어느 동물 나라 한 연못가에 입이 큰 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자신의 입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가를 헤엄치고 있던 입 큰 개구리는 연못가에 새로운 목욕탕이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목욕탕 입구에는 이런 안내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입이 작은 동물은 입이 큰 동물의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

안내판을 읽은 입 큰 개구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아주 위풍당당하게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누가 내 등을 밀어 주려나" 하고 탕 안을 둘러보던 입 큰 개구리를 저 편의 다른 개구리가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입 큰 개구리보다 입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열심히 그 개구리의 등을 밀고 나온 입 큰 개구리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결국 입을 더 크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다음날 이 개구리는 의기양양하게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목욕탕 안에는 하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 큰 개구리는 다시 하마의 등을 열심히 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개구리는 또 한 번의 결심을 하고는 입을 더 크게 수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탕 안에 들어서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악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개구리는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갔고 의사는 개구리에게 입을 더 이상 크게 한다면 단 하루 밖에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꼭 다른 동물에게 등을 밀도록 해야겠다는 허세로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루 밖에 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입이 크다는 허세를 가지고 다시 목욕탕을 신바람 나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도착한 개구리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문에는 이런 안내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금일 휴업"

사랑하는 여러분,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라!"  이 말은 아주 단순하고 쉬운 격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간단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영에 민감했던 개인이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에 붙잡힘 바 되었던 민족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 정치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흐르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 민족 위에 하나님의 영이 흐르면 회복의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영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성이 무너진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영성이 무너진 나라와 민족도 다 망했습니다.  로마가 무너진 것은 영성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영성이 무너지니까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니까 나라가 무너지고 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개개인들의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민족의 문제는 경제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사는 길은 무뎌진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는 길입니다.  잠자는 내 영성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성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 길만이 나와 내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이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는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기가 막힌 일을 저질렀어도 아버지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 용서합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몰라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무너진 사람도 있고 넘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다시 세우리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 믿음만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은 나에게 새 힘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교인을 만들기보다는 지도자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 종교꾼들이 모이기보다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모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은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종교꾼이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구경꾼이 되지 말고 사역자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으려는 지도자에 대한 눈을 떠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지도자가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언제 행복할까요?  미쳐서 일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꿈을 꿀 수 있는 소망이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이 시간 앞 뒤 좌우로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내가 지금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왕의 밥그릇도 깨지면 강아지 밥그릇이 된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유명한 오바쟈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런 구호를 심어주었습니다.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섬길 사역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었다고 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사역은 지식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이름이 주어졌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이새에게 묻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본문 11절에서 이새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에서 막내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막내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습니다.  약자를 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막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더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막내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막내가 하나 있기는 한데 그 놈은 만나보나마나 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내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너는 여기서 양을 지키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아니야.  나는 심부름이나 해야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다윗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맞다'고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 11절에서 그의 아버지 이새가 하는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이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묵묵히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르셨고,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특별히 '양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들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첫 경배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게으르고 자기 변명이나 늘어놓는 사람을 쓰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기 자리를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사역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작은 자리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자리를 맡기십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역 앞에 진실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명예를 쫓아 떠나간 그 자리에 다윗은 묵묵히 혼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본문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는 외모를 날씬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어느 조사연구 기관에 의하면 우리 나라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는데 하루에 53분을 투자한다고 합니다.  거울을 하루에 평균 8.3회 본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종 진귀한 화장품, 성형수술, 심지어 심한 부작용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몸을 어느 정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을 가꾸는 일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한 장 넘겨서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그 유명한 골리앗과의 대결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가 주눅이 들어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능력만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골리앗까지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인본주의로 자기 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신본주의로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선택을 분명히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J. L. 코미스키 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쓰임 받는 셀 교회 리더들을 연구해 보니까, 그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교제를 가지는가?  내게 맡겨준 사람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과 소명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며 살아가는가?  이것만이 쓰임 받는 지도자와 버림받는 지도자의 바로미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하반절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난 이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육신에 매인 육적인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쓰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난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정신없이 떠들어댄다'는 말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난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무엇엔가 붙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귀신에게 붙들리면 사울처럼 비참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무한대로 여러분의 삶을 열어놓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이 떠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고 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책망할 때에 하나님께 눈물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시고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대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녀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로는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인간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무려 800번, 신약에서 무려 60번씩이나 그와 하나님의 관계를 기록할 만큼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리더십 훈련가 존 맥스웰은 리더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첫째,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변화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찾아오는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긴 시간 동안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변화를 위해 기꺼이 값을 치루기로 작정하라.
만약 변화가 당신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넷째, 당신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남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긍정하시고 Yes! 하시면 당신의 인생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당신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셋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늘의 가치관,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넷째로,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대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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