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5-46) - 가상칠언(제4언)

  • 잡초 잡초
  • 525
  • 0

첨부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5-46) - 가상칠언(제4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네 번째로 하신 말씀은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은 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육시(정오)부터 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45). 우리 주께서 오신 날에는 밝은 한 밤중이 있었고 그분께서 가신 날에는 어두운 대낮이 있었습니다. 대낮의 캄캄함 속에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혼합된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46). 이 외침은 절망적인 영혼의 울부짖음이나 불신에서 비롯된 분노의 따짐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한 ‘느낌’ 때문에 외친 슬픔의 탄식도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나의 하나님”으로 신뢰하고 계시는 그 시간에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느낌보다 실제는 더 아픕니다. 내 남자 혹은 내 여자의 맘속에서 나의 부재를 느낄 때, 버려진 느낌을 맛봅니다. 그때의 고독함과 슬픔과 상실의 아픔은 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버림을 당한 사람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버려진 아이, 버려진 부모, 버림받은 아내와 남편, 직장에서 버려진 실직자, 친구에게 버림 받은 외톨이는 그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에도 아픔의 공명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버림당한 당사자는 잔잔히 가슴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픔을 주체 하지 못합니다. 술을 퍼마시거나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울기도 하고 자학하면서 심각한 정신적 장해를 가지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기도 하지요. 양심에 철갑을 두른 것 같은 정치인들이나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독한 사람조차도 버림받았음을 알았을 때는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버림당한 그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신앙은 분명 그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한 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힘과 위로를 얻고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버림 당하셨습니다. 기독교회사에 등장하는 많은 순교자들이 죽어가면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버려도 하나님이 영접해 주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행복하게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며 찬양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버림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이 가시관을 머리에 눌러 씌우고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조롱하고 모욕할 때 우리 주님은 잠잠히 참으셨습니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들어올 때조차도 그분께서 부르짖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고 십자가 옆에서 조롱하고 비방하고 놀리는 야비한 인간들에 대해서도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 때부터 간과되어 왔던 모든 죄와 세상 끝날 까지 택한 자녀들이 범할 모든 죄를 대신 지신 그분께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향해야 할 모든 진노의 형벌이 농축되어 그분께 쏟아 부어지는 순간, 대낮이 캄캄하게 변한 그 시간에 우리 주님은 철저히 혼자가 되셨습니다. 땅에서 버림받은 그분께서 이제 하늘로부터도 버림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부르짖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은 참으로 지옥의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혼자 두지 아니하셨습니다(요 8:29).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 버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와 그분의 절대적인 ‘거룩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역겨워 하시고, 죄에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결코 죄를 용납하거나 타협하지 못하십니다. 죄를 숨기거나 삭혀두지 못하시고 다 토해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죄를 갚으십니다. 독생자일지라도 우리 대신 죄 덩어리로 삼으신 그를 결코 용납지 않으시고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한 호리의 죄도 간과하지 않고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엑스(Ⅹ)표 해버리신 십자가를 볼 때에,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을 볼 때에, 그리고 죄의 형벌을 대신하기 위해 절규하신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하고, 죄 값을 치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단지 ‘철없는 시절 한 때의 실수한’ 추억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되지 뭐’라고 가볍게 말할 성질도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고의가 아니라 너무 연약해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자기를 연약함 속에 고의적으로 방치해둡니다. 연약함을 극복하고 장성하고자,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만날 얻어 터져서 찔찔 우는 어린아이마냥 저항 의지를 포기하고, 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헛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사하는 성도라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익들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죄 때문에 발생한 십자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사력을 다해 저항해야 함을, 그리스도를 피 흘리시게 한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비록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결코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 주님의 공로를 다시 모욕하면서 짓밟을 생각이 아니라면, 탐욕과 정욕이 자주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닐지라도 결코 우리의 머리에 죄가 집을 짓고 안주하지는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죄’ 자체에 대한 혐오보다는 ‘죄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날도 ‘죄의 회개’라는 표현보다는 ‘심리적 상처의 회복’과 ‘환경적 요인의 개선’과 같은 용어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술과 문학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죄를 미화하고 나아가 죄를 예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죄가 한 영혼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죄가 인간관계를 얼마나 짓밟아 놓는지, 죄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지옥처럼 만들었는지를 아는 성도라면 결코 죄를 미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잔혹성과 무시무시함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심각성에 대해서 경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 죄의 잔혹성과 심각성을 여과 없이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헤아릴수록,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지 얼마나 넓고 광대한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본질은 단지 정도를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아담은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공급하신 에덴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탐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최상의 삶임을 신뢰하지 못하고, 말씀을 이탈하면 더 나은 삶을 맛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범하는 각각의 죄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반항정신의 다양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죄들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독립하기를 소망한 것이며,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한 것이며, 하나님보다 사단을 신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악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용서하기 원하셨고 회복하기 원하셨고 오히려 더욱 높여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렇다 고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성품에 반하는 행동은 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당신님 자신께서 친히 대속물이 되어 형벌을 담당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자께서 육신이 되신 후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가지 생각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문제였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을 위해 모든 형벌을 감당하시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앞에 놓인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그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원망스런 심정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소리 지르고 싶어집니다. 그럴때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자랑하며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소리가 내게는 오히려 조롱소리 같기만 합니다. ‘저가 하나님을 믿으니 구원하실 껄’하는 비방 소리가 들립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독 받으시는 것 같아 더욱 괴롭습니다. 그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나를 대신하여 버림당하셨습니다. 나의 외로움과, 나의 수치스러움과, 나의 모욕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가 원수 되었을 때조차 나를 향한 사랑을 죽음으로 표현하신 분이라면 무엇이 더 의심스럽습니까?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십자가에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접이 되었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감사 찬양을 돌려드립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