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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알기에는 (욥 1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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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에는 (욥 19:25~29)

그리스도인들이 주고받는 말 가운데 신앙이 '좋다' 혹은 '좋지 않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이 '좋다'라는데 대하여 그 정의를 나름대로 다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곧 잘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은 좋은 신앙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할 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그것을 행동화할 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그 신앙행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됩니다. 

마침내 믿음대로 행한 일이 열매를 맺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았었다고 하는 말을 아끼지 아니합니다. 성경에는 신앙이 좋은 인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렸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창 22:1-12).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매로 쳐 죽였습니다. 소년 다윗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맨 몸으로 골리앗을 상대하여 승리한 것은 실로 위대한 신앙승리였습니다(삼상 17:41-29). 

유대 소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만든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일로 그들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정조를 지켰던 그들의 신앙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단 3:1-27). 한 가나안 여인은 제자들의 무관심과 예수님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흉악히 귀신들린 자기 딸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매달렸던 믿음은 큰 믿음이었습니다(마 15:21-28).

본문에 나타난 욥은 이유 없는 고통을 동시다발적으로 당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욥의 고난은 사탄을 통한 하나님의 시험무대입니다. 

마침내 욥은 불같은 시험(test)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인 자기 아내의 불신앙을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확신이 무엇이기에 자기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습니까?

욥은 '내가 알기에는'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출애굽기 18장 11절에『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가 알기에'(와이니 야다티, For I know that)를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 야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칼동사의 완료형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무엇을 알았는가? 

Ⅰ. 구속자가 살아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19장 25절에 『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 구속자 』 에 해당하는 가알( )은 '되찾다', '무르다', '복수자', '기업 무를자'라는 뜻입니다. 
① 가장 가까운 친척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는 경우입니다. 민수기 35장 12절에 『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② 그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입니다. 레위기 25장 25-26절에 『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 라고 했습니다.

③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룻기 2장 20절에 『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고통당하는 욥을 위하여 욥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킬 자를 가리킵니다.

잠언 23장 11절에 『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을 펴시리라 』 고 했습니다.
여기서 욥의 구속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는 말은 법적용어로서 증인이 자신의 주장을 위해 법정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19장 15절에 『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이 말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이미 내다보고 하는 말입니다. 구속자가 흙 속으로 사라진 욥을 다시 찾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한 일에 대해 심판대 앞에서 변호해 주실 자 곧 살아계신 구속자를 믿었습니다. 욥은 구약시대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이미 메시야를 통한 구속사적 혜안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심판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통한 구속사의 완성을 믿음으로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3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Ⅱ.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을 알았습니다. 

본문 19장 26절에 『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 육체 밖에서(우밉배사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육체로부터 육체 안에서'가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 『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라는 표현을 감안할 때 지금 있는 이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장차 신령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게 이러한 부활신앙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1) 부활하여 내가 친히 본다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27절에 『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라고 했습니다.
욥은 너무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이 직접 본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2) 부활하여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27절에 『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 외인 』은 외국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쑥스러워 하거나 보기 거북스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을 볼 때는 죄인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속으로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을 깨끗하게 한 자들만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3) 부활하여 주님을 볼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초급하다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27절에 『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라고 했습니다.
『 초급하다 』는 말은 '피곤하고 기진맥진 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음(킬야, )은 원래 '신장'(kidney)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KJV성경은 내 신장이 내 안에서 다타버리지만 (though my reins be consumed within m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다윗도 이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 

시편 69편 3절에 『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갈급함으로 주를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42편 1절에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Ⅲ.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 습니다. 

본문 19장 29절에 『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찌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 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신명기 32장 41절에 『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46장 10절에 『 그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수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가득히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편 유브라데 하숫가에서 희생을 내실 것임이로다 』 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라고 했습니다.
무죄한 욥을 괴롭히는 욥의 친구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욥의 말과 같이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욥기 42장 7-9절에 『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편 78편 7절에 『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 『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15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고 손양원 목사님이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러봅시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인간의 본래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본향은 땅이 아니고 하늘입니다. 우리는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알고 보면 하나님 나라를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인생입니다. 
욥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세월은 빠릅니다. 순식간에 사라져 갑니다. 
한국 문단에 청록파의 한 사람이었던 시인 박목월은 '나그네'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존 번연(J. Bunyan)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가노라. 거기서 영원토록 머물리라. 나와 부활 사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늘나라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디(D. L. Moody)는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영광이로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내일 아침 무디가 죽었다고 신문에 나더라도 믿지 말라. 무디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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