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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로운 섬김 (고전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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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섬김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3)

인류역사에 가장 크게 공헌한 두 분이 계십니다. 역사와 문명을 바꿔놓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입니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일생을 섬기는 자로서 살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섬기려고 하고 또 섬기되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대속의 제물이 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은 스승의 모습을 본받아 자신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종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우나”(19절)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유인과 노예의 두 신분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자유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로마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로마에 큰 공헌을 했거나 재정적 기여를 한 사람들이 황제로부터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시대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대학 최고학부를 졸업한 지성인이요, 철학자로서 많은 글과 책을 써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었고 열정적으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누구를 섬겨야 할 이유나 책임도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자유가 있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엄청난 능력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종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누가 그를 종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섬기는 종의 삶을 살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보통사람은 대개 권력이나 지식을 조금만 갖추면 남들의 섬김을 받고 그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치관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의 삶에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나 인간으로 오셔서 스스로 섬기는 종이 되셨으며,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쓴 사도 바울도 스스로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일생을 바쳐 자기를 제외한 전 세계 모두를 섬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자유인으로서 누구를 섬겨야 될 이유는 없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최고의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가치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의 목적임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모두도 사도 바울처럼 자원하여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원하는 사람에게는 솟아나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 4.19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에 사회봉사를 하는 대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저도 그 멤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학생들이 자원해서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국민을 섬기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섬기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으니 이 땅에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예나 지위를 생각하지 않고 봉사하던 제 친구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모두 큰 몫을 했습니다. 젊을 때부터 섬기고 봉사한 그들은 어디를 가도 축복이 되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보다 낫게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 대부분이 은퇴를 하고 저 혼자 남았습니다. 저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여러분 가운데 젊은이들은 지금 부터 예수님과 사도 바울처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섬김의 태도가 계발되면 직장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섬기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한 사도 바울처럼 내가 가진 실력과 지식을 충분히 활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겠다는 자발적인 결단과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연세가 일흔에 가까운 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자기 남편이 너무 싫어서 남편이 가까이만 와도 진저리가 난대요. 결혼 생활 40여 년 동안 남편이 아내를 죽도록 마음고생을 시켰는데 그 남편은 아내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정신과 약을 먹어야 겨우 몇 시간 정도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남편과 같이 있는 것은 고통이고, 아들 집에 가서 잠시 지내다 오는 것이 휴식이랍니다. 일흔 살이나 되신 분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으면 이 정도까지 됐을까요? 그 남편이 가족을 섬기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모른 채 자기 중심적, 이기적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아들집에 다녀오니 남편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잘못했소!”라는 말을 했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자 40년 동안 쌓였던 아내의 분노와 상처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잠을 못하는 그 부인이 저와 만난 전날 밤에 6시간을 잤대요. 6시간 잤다는 것이 보통사람에게 무슨 이야기 거리가 되겠습니까? 고통을 주는 남편이 없다면! 오랫동안 남편과 남처럼 지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남편 옆에서 잠을 자 주었답니다. “내가 오늘 당신을 안아 주고 싶소.” 20대 신혼부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70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40년이 지나서야 아내의 생각과 고통을 살피게 된 것입니다. 섬기는 태도이지요. 늦게라도 돌아서서 깨닫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남편이 신앙생활에 협력을 하지 않아서 고통을 느끼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고 거듭난 아내의 최고의 행복은 남편이 옆에 앉아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주일에 한 시간 내어주세요. 아내들은 남편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제 남편을 구원해주시옵소서.” 아내는 남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모습입니다. 아내가 잘 섬기다가도 어쩌다 속상해서 한 마디 하면 남편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이렇게 하니 함부로 말도 못합니다. “당신 집사라면서?” 이런 말을 안 들으려고 참고 또 참습니다. 남편은 어쩌다가 “하도 귀찮게 하니 한 번 가 준다!”하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는 한 달 동안 뻐깁니다. 

아내들은 섬김을 받기보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헤아려주는 것을 더 고마워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민감하게 잘 살펴서 필요한 때 필요한 말을 하여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 섬김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섬김의 정신으로 서로를 살피며 섬기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생명을 자원해서 버린다고 하셨습니다(요10:17,1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였습니다. 빌라도가 죽였습니다. 헤롯왕이 죽였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였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이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자원해서 자기를 낮추고, 자원해서 죽기까지 인내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생겼고 천국의 소망,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교회를 잘 섬기기를 바랍니다. 

어제 밤에 제가 잠시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번 국회의원 공천에서 낙천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떨어진 것이 너무 서러워 어른인데도 카메라 앞에서 막 울어요.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주먹을 휘두르고, 어떤 사람은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장면들을 다 보여준 다음 여자 아나운서가 “저분들도 다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지요”라는 말로 뉴스를 마쳤습니다. 먹고 살려 하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먹고 사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역할은 국민들을 섬기는 것 아닙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아서 생활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차를 타고 다니면서 국민을 섬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나운서의 눈에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섬기는 아름다움모습이 이 땅에 새로운 문화로 나타나길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늘 섬김의 정신과 섬기는 모습, 아름다운 섬김의 열매들이 드러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왜 섬기려고 합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칭찬도, 지위도, 권력도 아니고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사람을 얻고자 하는 언급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19절), “유대인을 얻고자”(20절),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얻고자, 약한 자를 얻고자, 몇 몇 사람이라도 얻고자…” 사도 바울은 우주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가치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그 가치관을 배운 것입니다. 자기가 부족하거나 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유인이지만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된 듯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얻으려면 그 사람에게 맞춰서 말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멋대로 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을 수 없습니다. 조용히 자기 아내를 살피고 남편과 자식을 살펴서 상대방에게 맞도록 섬기고 돕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요 사도 바울의 방식이요 여러분과 저의 방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대해주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대해주고, 학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대해주고, 무지한 사람에게는 무지한 사람으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이렇게 상대방에게 맞게 포용력과 신축성 있게 내가 맞춰가며 사는 태도가 섬김의 태도입니다.

종들이 무슨 일을 할 때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에게 물어본 후에 행동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아서 합니다. 우리가 중학교에서 제일 처음 배운 영어문장 중에 "What can I do for you?"(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태도는 주로 이렇습니다. "What can you do for me?"(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나요?). 제가 외국 사람들의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 제일 마지막에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이요 사도 바울의 정신이며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 멋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가 하는 것을 다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싫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총애를 받는 섬김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으로써 그 사람을 구원하는 최고의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되어 여러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섬기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23절). 말과 행동, 결정, 무엇을 하든 인생의 최고의 목표는 복음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을 섬기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동참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섬김의 정신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정신으로 아내를, 남편을 바라보십시오. 자식과 부모, 형제, 교우,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력과 신축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응하면서 모두 복음에 참예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제 가족과 제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섬기는 자가 되도록 저에게 섬김의 정신과 태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하게 됩니다. 성찬이 바로 이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의 몸을 찢기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찬식을 통해 우리가 받는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는 이 힘으로 어려운 인생 중에도 잘 섬기며 과감하게 전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복이 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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