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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번째 나타나신 주님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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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타나신 주님 (요 21:1~14)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주셨다. 문을 닫고 있는 곳에 오사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여드레까지 다시 제자들이 집 안에 있을 때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고 문이 닫혔는데 다시 오셔서 “평강이 있으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인간의 삶의 정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상태, 그 평강을 빌어주셨다. 믿음을 잃어버린 제자들, 왜 3년간 주님과 함께 했는지 알 수 없는 제자들, 그들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요20:19) 주님은 그것을 알고 평강을 기원한다. 
  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CM장, CM원을 생각해 보았다.

  ‘아! 우리 CM원들이 얼마나 두려울까? 영적 전사로 다 무장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 CM의 소그룹 전도가 얼마나 무거울까?’ CM장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평강이 있으라. 평강이 있으라.” 주님을 흉내내어 외쳐야 함을 깊이 느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결단한 저들은 정말 천방지축 제자들이다. 주님의 마음을 공유해 본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자리 다툼이나 하고 인간적 비전만 꿈꾸었고 주님의 수난 앞에 저들은 완전히 배반자가 되었다. 그런 제자들을 만났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

첫째, 찾아오시는 사랑을 계속하시는 주님이시다. (요21:4)

  요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 것이다. 고기 잡는 바닷가에 주님은 찾아오신 것이다. 산도 좋고 들도 좋고 골짜기, 방 안도 좋다. 사랑은 어디든지 찾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도 그 사람이 진정한 제자가 되어질 것이라는 소망과 꿈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부활 후 세 번째 찾아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렸으니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르다. 내게 유익하고 좋으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내 조건에 맞으면 달려오는 사랑도 아니다. 주님은 무조건 찾아오시는 분이 되어 주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다. 결국 그는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왔다.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바꿀 계획을 세운 냄새나는 여인을 찾아왔다. 그 주님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을 바로 발견하고 믿고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내가 어떠한 결격 사유가 있든지, 아니면 자랑스러운 장점을 소유하고 있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다. 몇 번이고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 떠나버린 나를, 그런 나를 찾아오시는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이 나를 새롭게 빚어주신다. 주님은 이 땅에 사는 나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포기 못하고 찾아오시는 것같이 사랑은 다가가고 사랑은 찾아가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으로 깨우치시는 주님이시다. (요21:5~6)

  예수님은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요21:5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저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다시 요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대로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부활 이전에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자로 부름을 받던 3년 전의 사건이다. 눅5:1~10을 보면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 찾아오신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두 배에 가득하게 고기를 잡는 이 만선의 사건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발견하는 축복을 받았는데, 오늘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똑같이 고기 잡는 사건을 만들어 주셨다. 베드로에게 감동과 헌신, 신앙의 사건으로 나타나시던 3년 전의 이 일이 부활하신 후에도 똑같은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 감동의 사건이 재현될 때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주님!”이라고 외쳤다. 

  사건이 기억을 되살리고 신앙적 결단의 날들을 떠올리게 될 때 부활의 주님이 보여진 것이다. 이 사건 앞에 깨우침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다로 뛰어내렸다.(요21:7) 바다로 뛰어 든 베드로, 그는 찾아오신 주님 앞에 서 있을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 뿐이다. 사랑의 주님은 한 마디 음성도 들려주시지 않았다. 다만 삶의 사건의 재현으로 베드로를 깨우치시고 계신다. 배반으로 인해 떳떳하지 못한 삶, 제자의 길에서 이탈한 삶, 정말 제자로 부름받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삶의 주인공이 된 베드로, 그에게 주님은 사건으로 다가오셨다. 말보다 사건으로 깨우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건 앞에 직면할 때 자기 자신이 보인다. 사건 앞에 서면 기억이 살아나고 은혜가 살아나고 약함과 강함, 전부가 살아난다. 내게 일어나는 신앙의 사건은 주님이 나를 가장 사랑하기에 만들 주시는 섭리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떨어진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교사로 부르신 음성을 다시 순종하게 하였다. 오세아의 아내가 자꾸만 집을 뛰쳐나가는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을 연애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아내를 데려와야 되는 아픔은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을 깨닫게 하였다. 성경 룻기에 나오는 룻의 시모 나오미의 남편과 아들들의 장례식 사건은 전능자가 자신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징계하심으로 받아 드렸다. 이처럼 주님은 사건으로 깨우치시는 주님이시다.

  결국 아프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싸매시려고 하시며 근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사생자가 아니라 나를 아들로 대우하시려는 사랑 때문에 사건을 일으키신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 회복을 위해 고기를 잡는 기억을 회생시키셨다. 정말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일주일을 살면서 일어나고 부딪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느끼는 성도가 되자.


셋째, 먹을 것을 주시고 대화해 오시는 주님이시다. (요21:13)

  요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주님은 부활하신 몸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제자들의 곤비함도 알고 계셨다. 밤새도록 고기 잡느라 지쳐있는 제자들의 필요한 부분을 아시고 떡과 고기를 준비하셨다.

주님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 먹을 것을 제공하셨다.
주님은 사명을 주시기 전 먹을 것을 먼저 가져오셨다.
주님은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는 목양의 사역을 말씀하기 전 먹을 것을 제시하셨다.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먼저 너의 필요성을 알고 그 필요성을 채워주는 것이다. 언제나 먹을 것을 주시고 대화를 풀어가시는 쪽은 성숙한 자, 큰 자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내게 먹을 가져다주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나를 섬기고 이야기를 먼저 풀어나가신다. 사랑이란 언제나 큰 자에게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 헤아리기 어려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가 93년이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우리도 먹을 것을 먼저 나눠주는 사람이 되자. 얻어 먹지만 말자. 나는 금번 21일 특별 새벽 집회를 하면서 93주년 교회 창립일을 놓고 교회의 옛 터전, 고색동 65번지 땅을 찾아서 표식돌이라도 놓았으면 생각하는데 돌연 먹을 것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예언이 튀어나왔다. 작은 집을 사서 무료 급식, 무료 제빵 배급, 방과 후 아이들 지도 등 먹을 것을 주는 일을 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먹을 것을 얻고 대화해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우리의 연약함을 숨기려는 쌓아두는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그 분처럼 동화되고 닮아가는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

  정말 부활하신 주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바닷가까지 찾아오셨다.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사랑이듯이 부활하신 후 주님의 걸음은 철저히 나를 만지시고 싸매어 주시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엔 사람을 치고 먹여야 하는 목양을 부탁하셨다. 나 자신과 우리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돌아보며 배고픈 자에게 먹이우고 마음의 상처를 싸매이며 영혼의 만나로 양을 치는 성숙한 성도가 되자. 사랑을 체험하면 성숙하게 된다. 사랑을 알면 고집부리지 않게 된다. 사랑 받은 것을 느끼면 섬기고 대접하게 된다. 사랑을 알면 착해진다. 단순해진다. 그분께 대한 감격으로 그분의 말씀대로 살게 된다. 주고 또 주기 시작할 수 있다. 오늘 그 주님 때문에 시작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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