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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그 이후의 만남 (요 2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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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그 이후의 만남 (요 20:19~25)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해마다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을 맞이하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하며 그 뜻을 되새기도록 교회마다 힘써 이런저런 행사를 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금요일 오후가 지나면 그동안 몇 주 동안 유지되어온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여 마침내 부활절 새벽이 되면 기쁨과 감사의 찬송 소리가 울려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난주간을 지키고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좀체로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과 이 교회를 그럴수록 더 뜨겁게 사랑하시고 더 오래 견디도록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힘을 얻는 계기가 수난 주간이요 부활절입니까? 눈에 띄게 크게 달라지는 바가 없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부활의 희망이 확실한 만큼 이 세상에서 하나라도 더 얻고자 하는 마음은 버리고, 교회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더욱더 부지런히 힘쓸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고난 주간이요 부활절입니까?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시작이요 교회의 시작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 신앙을 가지면 이 땅에서는 아무리 불행과 시련을 당하고 병들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짐은 하나님의 새 생명과 새 미래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임에도 무력하게 산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청년들 사이에 유행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미래가 없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해 볼만한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인이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 부활신앙도 없어 미래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새롭게 만나고 동행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꿀벌사회와 인간사회의 차이점 

꿀벌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속도오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게으름피우지도 않습니다. 또 그들은 감시하고 조이는 감시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감독관이 없음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할 바를 알아서 잘 합니다. 오버페스하지도 않고 우쭐하지도 아니하며 상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정확한 자기 페이스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잡음 많은 우리네 사회조직과 꿀벌의 조직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요? 인위와 무위의 차이가 아닐까요? 우리는 꿀벌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먼저, 제 할일에 충실하고 다음, 타인의 능력을 자기능력 소중히 하는 것처럼 더 높이 인정하며 그리고 사랑이 임하는 곳을 사수해야 합니다. 인생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하리니 우리가 그 역군으로서 삶을 다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한 소년이 장난감 배를 만들어 연못으로 띄우러 갔습니다. 그런데 연못가에서 배를 갖고 놀다가 장난감 배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떠나갔습니다. 소년은 어쩔 줄을 몰라 자기보다 큰 소년에게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큰 소년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돌멩이를 몇 개 주워서 배를 향해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를 도와줄 것으로 믿고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심술을 부리는 줄로 안 어린 소년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돌멩이들이 배를 맞추지 않고 배 건너 쪽을 겨냥해 던져져, 돌멩이가 일으키는 작은 물결이 배를 물가로 조금씩 가까이 오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던지는 돌들은 다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이었고, 결국 그 소중한 장난감은 기다리고 있는 작은 소년의 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롭고 아무런 의미나 계획도 없는 상황을 우리 삶에 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의 파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우리의 마음을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도록”(골 3:2) 격려하기 위한 뜻인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하시려면 우리를 징계하셔야 합니다 (히 12:9-11). 

여러분은 삶의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어려움들은 여러분을 주님에게로 더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덧없는 세상의 기쁨 느슨히 잡으세요. 흙으로 만든 것들도 느슨히 잡으세요.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의 것들 그 영원하고 완전한 것들을 단단히 붙드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더 가깝게 당기시려고 시련의 파도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고백한 사람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 님 부활사건에 대한 신앙적 증언과 이에 따른 체험이 없이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성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언과 체험은 오늘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의 삶을 변혁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 그 이후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셨고 만나셨을까요? 예수님 부활의 설득력 있는 증거는 구체적인 사람 하나 하나와 공동체의 변화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날 저녁에 불안과 공포에 질려 문을 닫고 집안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그분은 저들의 목전에서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시고 그래서 죽으셨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부활 그 이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데 이 만남은 완전히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 아무 의미도 없이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애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남에 대한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마틴 부버인데 그는 사람의 만남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I and Thou(나와 너)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만남이고 사랑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I and It(나와 그것)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만남입니다. 상대방을 사람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용 대상으로 만나는 만남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나는 만남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만남이 더 많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특히 좌절과 낙망과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앞이 캄캄할 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인생 최저의 밑바닥에서 절망과 낙망과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비참한 죄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해가 떠올라도 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앞이 캄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후, 이제는 그의 제자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의 숨통을 계속 조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추격을 피하여 어느 집 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젊은이가 열어 주지도 않은 방문을 열고 제자들의 한 가운데 섰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묘에 장사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셔서 오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기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이 이렇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분이 정말 예수일까? 이것이 사람이냐? 영이냐? 귀신이냐?"하며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손과 옆구리를 다 보여 주시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기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 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앞에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캄캄한 밤이 환해졌습니다. 생의 앞길이 훤하게 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지키고 축하하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환난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정복하는 힘입니다. 이 어려움을 정복하는 자만이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정복하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기쁨을 빼앗아 가는 도둑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죄의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새로운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수 있고 평강의 축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추격을 물리치고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힘을 능히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니라면 제자들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근심과 걱정을 능히 몰아내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기쁨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늘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도, 질병도, 어떤 환경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부활하신 주님을 강하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은 영원한 소망을 줍니다. 
인간을 특징 지울 수 있게 하는 것은 소망이 없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 부속품 중에 하나만 고장이 나도 차를 쓰지 못합니다. 단지 부속 하나 때문에 고장이 나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것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희망의 빛이 꺼지면 인생의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불굴의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비록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온갖 고생을 한다 해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희망과 소망을 되찾았습니다. 그 소망은 지상적 소망을 포함한 하늘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계속 이 소망을 전했습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이해하는 대상이지 절대로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는 인생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승리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이요, 죽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승리는 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로마서 6장 8~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가 그 분이 죽을 때 이미 같이 죽었고 그 분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기 때문에 사망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느냐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식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예식입니다. 유대인이 할례를 받음으로 참 유대인이 됐듯이 믿음의 증표인 세례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상징적인 예식인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하게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내 삶에 적용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이긴 자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패배할 수가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부활의 승리를 내 삶에 적용할 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승리 없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단지 훈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완전히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도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졌다고 손을 들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해도 죽음의 세력보다는 약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새로 만나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하늘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 것이 되고 나는 항상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 : 3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말라” 하시고 또한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나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숨을 내 쉬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숨결은 창세기 2:7절에 나오는,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불어 넣으셨던 바로 그 창조의 숨결입니다. 창조의 숨결을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줌으로써 새로운 힘과 새로운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널려 있던 뼈다귀가 하나님의 바람을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듯이,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힘으로,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공동체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성령을 주시고 나서 이제 세상을 다스리시는 모든 힘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강한 통제력을 통한 다스림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통한 다스림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시어 평화와 평안, 용기와 새 힘 그리고 성령과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교회는 용서로 시작되고 용서로 끝나는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야 합니다.부활 신앙은 단지 부활주일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믿는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에 소망을 부활에 두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이후에 나도 부활한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바로 성경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먼저 부활의 확실성을 매일의 삶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내가 곧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할 구절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그 부활하심을 근거로 나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부활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부활이 있기에 이 땅에서 아둥바둥하며 지내지 않습니다.남에게 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이 땅 저편에 더욱 중요한 삶이 약속돼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연연해하겠습니까? 부활의 확실성을 확인한 성도들은 이웃에게 그것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진리를 확인한 성도들이야말로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신앙의 뿌리를 부활에 확실히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는 사실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은 성도입니다.그것이 증거입니다.예수 부활은 믿음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부활의 사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사막의 나무와 같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부활에 신앙의 뿌리를 단단히 내린 성도들은 결코 요동함이 없습니다.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그러나 부활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단사설에 쉽게 빠집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신앙은 시련을 이길 넉넉한 힘을 줍니다.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 많은 시련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때로는 그 시련 속에서 좌절합니다.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련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이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지금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다가올 복의 전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중의 축복은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어찌 이 같은 축복이 부활절과 부활주일에만 한정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순간마다 그 같은 복은 확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지금 어떤 시련 속에 있습니까?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며 울고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부활의 주님이 여러분도 부활하기를 원하십니다.세상의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악 된 것들을 벗어 던져 버리고 부활하기를 그분은 간절히 바라십니다.확실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 있다면,그 소망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문제인들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확고한 부활신앙만 간직하고 있다면 못 넘을 산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시련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오늘도 주님은 "매일의 삶속에서 부활하라"고 말씀하십니다.부활절의 감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엷어집니다.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부활의 감격은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또다시 체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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