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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시 63:7~10, 요 2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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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시 63:7~10, 요 21:18~20)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장교들이 부하에게 절대로 “돌격 앞으로”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단지 장교들은 부하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격 앞으로” 하면서 부하들을 다 앞으로 내 보내고 자신은 빠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앞장서고 부하들을 뒤 따르게 하는 지도력입니다.

  리더와 보스는 다릅니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합니다. 리더는 ‘가자’고 권합니다. 리더는 앞에서 이끕니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배자를 따르지 않습니다. 리더를 따릅니다. 내가 누구를 따른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어야 따를 수 있습니다. 따를만한 가치가 있어야 따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자신의 직업과 재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와보라” 한마디에 그냥 따라갔습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른 결과가 무엇입니까? 스승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국가반역죄로 몰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한 자리씩을 차지하려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따르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각자 고기 잡으러 간다고 다시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은 다시 그들을 모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다시 모아 주시고 다시 따르게 하신 부활의 주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이미 요한복음의 결론을 다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불립니다. 한편 21장에는 베드로를 다시 수제자의 위치에 올려주시기 때문에 ‘베드로 위임식’이란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얼마 후가 되면 승천하실 텐데 어떻게 따라갑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전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제자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사도로서 부활을 전하고 사람을 섬기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다시 따른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6:24에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시 십자가를 지는 일은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복음 10:27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양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입니까? 그렇다면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따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지만 양이 아니면 따르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반드시 따릅니다.

  탈무드에는 ‘몸은 머리를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까?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내가 지체인 것을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따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지체는 몸을 절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유목민들의 생존방식은 동물을 기르는 게 아니라 동물들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순리대로 동물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동물이 살지고 사람이 잘 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 생활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신 경로, 발자취를 따라 가다보면 섬기게 됩니다. 핍박을 받게 되고 십자가를 지게 되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부활과 하늘나라 있습니다.

  안양의 두 어린이 피살 사건 이후에 유치원에서는 이런 교육을 한다고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사탕을 주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낀 이런 아저씨가 아무리 좋은 것을 주고 좋은 말을 해도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한다고 합니다. 참 서글픈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아무나 따릅니다. 아무나 따르는 아이는 철없는 아이입니다. 따라갈 대상을 분명히 아는 것은 성숙하다는 증거입니다. 철 든 아이는 따를 사람을 따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따라야 하는 주님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따라가는 자는 앞서가는 이끄는 자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분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따르면 잘 알게 되고, 잘 보고, 잘 배웁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다시 음미하면서 부활의 주님을 잘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따르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6에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르면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가셔서 포도주를 만드시는데 나도 혼인잔치를 즐겁게 해야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데, 내게 고치는 권능을 주셨는데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주린 자들을 먹이시려는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0:28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따르려면 섬겨야 합니다.

  주님이 섬긴 대상도 아주 다양합니다. 우선 병든 자들이 있습니다. 각종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자가 주께로 왔다고 합니다. 소외된 자들입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발에 기름을 붓고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납하셨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한 여인을 예수님을 용서하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어린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쫓아내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까지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부활 후에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제자에게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섬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섬기면 됩니다. 우리 주위의 모두가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주위의 병든 자가 우리의 섬김의 대상입니다. 독거노인들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노숙자들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결식아동들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재소자들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특히 오랜 진통 끝에 기독교 교도소인 ‘아가페 교도소’가 건축허가를 받아 곧 민영 교도소가 문을 열게 되어 섬기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북한동포가 섬김의 대상입니다. 기름유출로 고통이 심한 태안주민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태안주민들은 이제는 환자들입니다.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안질환도 많아 실로암 병원에서 급히 이동진료차가 가기로 했습니다. 불면증과 호흡곤란 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일입니다. 세계의 절대빈곤자들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서해안 기름유출로 발족한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 봉사단’은 서해안 섬기기가 끝나도 계속해서 세계를 섬기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지구적 재해는 연평균 8건이라고 합니다. 세계가 함께 도와야 할 재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섬겨야 할 것들입니다.

  ‘악마와 돈 카밀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한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신부의 한 쪽 어깨 위에는 작은 악마가 앉아 있습니다. 반대편 어깨 위에는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신부가 어디를 가더라도 악마와 천사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신부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천사와 악마가 그 사건의 해결법을 다른 식으로 제시하여 신부를 괴롭혔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면 섬기게 됩니다. 악마는 말할 것입니다. “뭘 섬기냐? 얼마나 힘든데 그냥 편히 살지.” 이럴 때에 천사는 말할 것입니다. “섬겨야지, 더 열심히 섬겨야지.” 우리에게 섬김을 반대하는 악마가 항상 있습니다.

  심리학자 밴듀라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모델링’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델링’은 세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는 관찰 학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는 어떤 행동을 억제하는 억제 효과와 억제되어 있던 행동을 활성화하는 탈 억제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프로이드 심리학 등에 등장하는 동일시(identification)의 효과가 있습니다. 섬김을 ‘모델링’하면 닮아서 섬기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특히 부모에게서 보면서 배웁니다. 예배를 대물림하여 배워서 예배합니다. 섬김과 봉사를 대물림하여 부모를 보면서 섬김을 배웁니다. 반면에 불평하고 비난하고 반대하는 이것도 대물림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대물림하게 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좋은 섬김의 본을 대물림하고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따르는 자가 되어 섬김의 사람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따르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10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다윗을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죽음입니다. 모험입니다.

  내가 누구를 따르는 그 자체가 죽음일 수 있습니다. 쿠데타가 그렇습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공신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어 죽어야 합니다. 정치지도자를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공하면 공천을 받고, 실패하면 무소속으로 출마합니다. 때로는 임금을 따르는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정몽주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왕조와 왕을 따르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태복음 20:28을 다시 한번 보세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었습니다. 섬김은 목숨을 주는 것입니다. 목숨을 주고 섬겨야 참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섬김은 목숨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최고의 섬김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본받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메타이’(mimetai)입니다. 이 말은 ‘모방하다’ 혹은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더함이나 덜함이 없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다는 것은 그대로 따라한다는 뜻입니다. 어릴 때 아주 눈이 많이 온 때가 있었습니다. 발이 눈에 푹 빠질 만큼 많은 눈이 왔습니다. 마당에 나가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아버지가 디딘 곳을 따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큰 발 뒤를 따라가니 내 신발이 더 이상 빠지지 않고, 젖지 않고 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은 안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죽어도 안전합니다.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죽어도 축복입니다. 사는 것이 화이며 죽는 것이 오히려 복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거리를 두고 따르면 주님을 배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5에 보세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합니다. 베드로만 그렇게 말했습니까? 모든 제자가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따르는 것은 죽는 것인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기도 하는데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종래 주님을 따라 다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따르는 것은 죽는 것임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 따랐던 제자 가운데는 세리 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이 있었습니다. 세리는 유대 정치의 극우파입니다. 열심당원은 극좌파입니다. 열심당원은 반 로마 도시 게릴라들입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인보다 세리를 더 싫어하였습니다. 세리들을 보면 칼로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서로의 정치적 견해를 좁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죽는 법을 배우니까 서로 상극이지만 하나가 되고 일치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시몬은 최초의 영국 선교사였으며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서로 달라도 일치합니다. 어디서 일치합니까? 죽음에서 일치합니다.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오라고 하십니다. 왜 오라고 하십니까? 왜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2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네”. 함께 죽으러 가기 위해서 오라고 하시고 따라야 합니다. 따라가다 보면 거기가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주님을 따르는 끝은 아닙니다. 4절을 보세요.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아보고 많은 영광 보여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따라가는 것은 결국 영광입니다. 죽음 그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결론 

  우리나라의 이전 관습 가운데 ‘삼종지도’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 사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 삼종지도’가 있습니다. 어려선 아비와 어미의 뜻을 함께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가르쳐서 평등한 가정을 만들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에 연연하지 말며 나의 길을 간다는 뜻이랍니다.

  전통이 바뀌어도, ‘삼종지도’가 폐기되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히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따르면 죽는 것 같지만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이 있습니다. 섬김과 죽음의 길이 주님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따르며 주님을 닮아 잘 섬기고, 잘 죽는 삶을 사는 부활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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