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상태보다도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삼하 12:7~15)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상태보다도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삼하 12:7~15)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때는 좀 헷갈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이 때로는 이해가 안 될 때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성경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을 보세요. 
여러분은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멋있고 남자답다고 보십니까? 
여러모로 살펴봐도 야곱보다는 에서입니다. 에서는 남자답게 사냥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활발한 성격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자처럼 집안에서 엄마 옆에서 붙어 있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보다 야곱을 더 좋아했습니다. 

에서의 죄라면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여 팟 죽 한 그릇을 먹겠다고 장자권을 동생에게 넘긴 죄 밖에 없습니다. 죽도록 일하고 돌아와 보니 팟죽 냄새가 집안을 진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에서는 거기에 넘어간 것 밖에 죄가 없습니다. 

그것도 어찌보면 동생 야곱의 치밀한 계략이었습니다.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보려는 계략이었지요. 그러니 에서가 한 짓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반면에 야곱을 살펴보세요. 야곱은 자타가 공인하는 악인입니다. 사기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이름도 사기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도 교묘하게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도 빼앗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기를 칩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사기도 당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나쁜 놈이냐고 한다면 누구라 할 것입니까? 
당연히 야곱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또 하나를 살펴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다윗과 사울 이야기입니다. 사울의 죄가 무엇입니까? 

제사장만이 집례 할 수 있는 제사를 집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사무엘이 약속된 시간에 오지 못하고 지각을 했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전쟁은 코앞에 닥쳤고 그냥 나갈 수는 없고 예배는 드려야 하겠고 사무엘 선지자는 늦게 오고... 어찌해야 합니까? 

그래도 예배를 드리고 나가자고 사울이 제사를 집례 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을 봐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만 형식상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또 아말렉을 멸절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것도 그렇습니다. 

다 멸절 시켰어야 하는데 아각 왕을 살려서 잡아왔고 좋은 물건을 남겨서 가져 왔던 것,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울의 마음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적국의 왕을 사로잡아 와 승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좋은 물건을 남겨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부족한 것은 이해되나 노골적으로 일부러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울 왕을 더 이상 들어 쓸 수 없고 버리겠다고 결정하십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로 판단하십니다. 좀 이해가 안 되는 문제 같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것도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입니다. 한 번의 실수로 그치지 않습니다. 간음 중에 여자가 잉태를 하자 그 사실을 숨기려합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휴가를 주어 아내와 동침시키려 합니다. 왜요? 자신의 불의를 교묘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최전방에 내보내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그 신하가 전쟁터에서 죽자마자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간음죄, 거짓말, 살인죄, 아주 죄질이 악질입니다. 좀 전의 사울과 비교해 보면 다윗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합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 때 다윗이 죽각 회개하자 그 한마디에 용서를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사기꾼 ‘야곱’은 사랑하시고 사나이답고 멋쟁이인 ‘에서’는 버렸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울’은 버리고 극악한 죄인인 ‘다윗’은 사랑하셨을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을 향해 서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평면적으로만 보면 야곱보다는 에서요.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과 다윗의 신앙의 방향은 어딜 향해 있습니까? 

야곱은 사기꾼이지만 항상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복을 누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아버지를 속인 것도 복을 받기 위해서이고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은 것도 복을 사모하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형을 피해 도망을 치면서도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제단을 쌓습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할 때도 복을 열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복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각오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런 면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방향은 오직 자기와 세상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가치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장자권을 팟 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망령된 자”라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가 아닌 마음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서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비록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으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늘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죄를 통곡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번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마음을 보시고 그를 용서하시고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상태와 과거 결과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중심을 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할 때 그가 단 한마디로 죄를 시안하고 회개하니 그 즉석에서 용서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를 하시나요? 말도 안되는 짓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왜요? 그의 마음의 방향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기차가 출발하여 수원역을 통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차는 서울이 가깝습니까? 부산이 가깝습니까? 분명 서울이 가깝지만 그 기차의 이름은 부산행 열차입니다. 그 기차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부산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부산을 출발한 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구를 통과한 기차, 분명 부산 쪽이 훨씬 가깝지만 머리는 서울로 향해 있습니다. 그러니 서울행입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구 지금 어디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기고 평가합니다. 위치만을 중요시 여긴단 말입니다. 그러니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집사가 뭐 저래!” “장로가 뭐 저래” 하지만 방향만은 주님을 향해 서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위치 가지고 평가하면서 난리를 치지만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어서 오너라,, 그래 내가 너를 안다...” 하고 칭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야곱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주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은 행위나 입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의 사랑입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함께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마음이 딴 곳에 가있고 딴 남자를 사랑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방향성의 기준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누구를 행해 있느냐?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최고로 여기고 하면 주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십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와 사랑하냐고 물었을까요? 
그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셔서도 그렇지만 주님은 그 맘속의 방향을 보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왜 나쁜 놈인가요? 인간적으로 보면 가롯유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열심당원으로 독립 운동가입니다. 로마에 입제 당하는 조국을 해방시켜려고 힘쓴 사람입니다. 머리도 잘돌아가고 계산도 빠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진짜로 사랑하십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덮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야곱도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하신 것이고 고린도 전서13: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것입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당대의 최고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마음도 그들을 향해 기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마음이 갑니까? 똑똑한 사람입니까? 잘난 사람입니까? 돈 많은 사람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이 갑니다. 왜요? 그 마음이 고맙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정말 생명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해 서있는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에 여기시고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은 죄에 대한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민감하게 반응을 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기에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만큼 죄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성도들이 죄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이 산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주님이 바리새인들은 싫어하시고 세리와 창녀들은 좋아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죄에 대해서는 의롭다고 착각을 하고 죄에 대해서는 완벽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더 많은 죄를 짓고 살면서 그 죄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리와 창녀들을 더럽게 여기면서 자신들의 의를 들어내기를 좋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세리, 창녀들은 자신들은 부끄럽고 더러운 죄인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고 그분의 은혜를 통해 죄 문제를 용서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2:17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는 바리새인,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이 병든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내 죄에 대한 감각을 느끼고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죄를 해결하는 해결책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죄라는 단어가 1206번씩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죄가 많고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고 통회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시 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했습니다. 우리 죄 문제를 깨닫고 그 문제의 해결자가 우리 예수님임을 깨닫고 가까이 나오는 사람은 위치가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방향이 주님께로 향한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복된 백성이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은혜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말이 그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 

은혜를 사모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도 되지만 특별히 말씀을 사모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은혜를 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는 그 엄청난 무서운 일을 했을까요? 
왜 형의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했을까요? 그 속에 축복에 대한 사모함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도 알고 그 아버지 이삭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기 야곱과 공모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이삭도 취소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함이 가득한 사람은 세상을 향한 눈이 멀게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은 눈이 삐져 다른 사람이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세상 부귀영화 다 버리고 주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엄청난 짓을 해도 용서를 받은 것이고 야곱도 용서를 받은 것이고 심지어 창녀들과 세리들도 주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눅 15:1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시 84:2에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또 시 107:9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목사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목회를 하면서 특별한 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가 언제이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성도들이 예뻐 보이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면서 제가 부족한 모습이 미안해지는 마음이 자꾸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사랑해 주어야지’ ‘좀 더 기도해 주어야지’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마음, 미안한 마음에서 더 열심히 배우려고 죽으라고 공부합니다. 체력이 안 따라주어 힘들고 괴로워도 열심히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런 제 마음이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여러분을 향해 있음을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부족한 목사를 사랑하고 마음을 주고 사랑하며 사모하며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예쁘고 자랑스럽고, 목사가 하는 짓이 사랑으로 느껴질 때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라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면 우리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신앙과 사랑을 위치로 파악하지 말고 방향으로 파악합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