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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쉼을 얻으려면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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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쉼을 얻으려면 (마 11:25-30)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
갈수록 어쩌면 주님의 표현이 그토록 적절한지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입니다. 우리의 눈에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그의 
삶 내면을 들여다보면 고충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탈렌트 출신 목사님이 와서 부흥회를 하는데, 그 분 말씀이 
자기가 위장병 치료약을 선전하는 광고에 출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 걱정도 없는 듯 환한 미소
를 띠고 ‘이 약을 먹으면 위장병이 말끔히 낫습니다’ 라고 선전했지만, 실은 그 당시 이 분은 만성위장병
으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겉보기와 속사정은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 힘들고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합리적인 면도 있지만 불합리적인 면도 많습니다. 선진국들은 소비가 미덕
이 되어 있지만, 후진국들은 먹고사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티비에서 카리브 해의 작
은 섬나라인 아이티의 실상을 방영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밀이나 옥수수 빵이 아닌 진흙으로 만든 빵
을 먹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도 잘 사는 부자들이 있고, 그들은 진흙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
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5년이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사망자가 9만~22만여명이나 되고, 그 보다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4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
카 대륙에는 51개의 국가가 있는데 절반 이상이 내전 중입니다. 종족 간의 분쟁과 종교간의 분쟁으로 인
해 수십만의 인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처럼 전쟁이나 기아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
은 이 세상에는 그들처럼 불합리한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
입니다. 

먼 외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07년도 3월 현재, 우리나라
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수가 2,010,56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금년 3월 18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의하면 
독거노인의 수가 88만 2천명으로 이 중 92%가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일주일에 5번 이상 식사를 거르
는 노인이 무려 19.6%나 됩니다. 독거노인들의 월 평균 소득액은 18만 7000원으로 조사되었고, 24%가 
한 달에 한 번도 가족과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
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
다” 또는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에 바빠서 
남의 말을 들어주고 남의 처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혹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언제까지나 남의 처지를 보살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
구시기에 우리 인생들을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고 하셨을까요? 인류 역사상 예수님처럼 말씀하신 이가 과연 또 누가 있습니까? 더욱이 감사할 일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진심으로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하고도 남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을 진심으로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성을 취하시
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크고 첫째가는 이유는, 우리 인생들을 죄
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마 1:21). 인간의 모든 불행은 죄가 그 원인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아름다웠으나, 범죄로 인해 악하고 추하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을 배반하고 떠나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사망과 저주가 인간의 삶에 임하여 각종 질병이 생겨났습니다.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
습니다. 이미 아담의 가정에서 맏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형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강한 자
가 약한 자를 종으로 삼고 착취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이성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
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불상사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지난 26일에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일가족 다섯 명이 가장에 의해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이번에 죽은 네 아이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친절하고 예
의 바른 사람으로서 한국 어린이 네 명을 입양해서 정성껏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기가 부행
장으로 근무하는 은행의 공금을 횡령한 죄로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자신
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같은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역시 고속도로에서 방벽
을 들이박고 죽었습니다. 큰 은행의 부행장까지 했으면 지적 수준이 상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그 
내면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면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초인 곧 슈퍼
맨이 되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정신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
고, 인간들은 아직도 초인은 고사하고 점점 더 추악하게 타락해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하고 무조건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매우 비이성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밖
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모든 불행과 수고로움의 원인이 되
는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무한
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한 일은, 예수님께서 도덕 선생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
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고 그들만 못한 사람들을 
깔보았습니다. 세리나 하층민들은 죄인 취급을 해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정반대였습니다. 한번은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셔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
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
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
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
르러 왔노라”(마 9:12-1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
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은 동정할 줄을 몰랐으나 예수님께서는 동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범죄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 
인생들을 동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장에 이 같은 은혜로운 말씀이 
나옵니다.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
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
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강한 척, 지혜로운 척 하지 말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아가서 삶의 무거운 짐을 맡
아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동정하시고 때를 따
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하고도 남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합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더구나 고통당하는 이웃을 동정하고 함께 마
음 아파하는 것은 더 없이 귀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
나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실질적으로 고통을 없이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
다.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이는 단지 우리 인생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
을 맡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동정하실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도 남
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께서 그에게 나아온 자들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신 
사례를 얼마든지 대합니다. 

죄책으로 인해 중풍병에 걸려 고통하는 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사죄의 
은총과 함께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향
유를 부었던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고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 감동을 받고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
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
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요 10:10)고 하신 대로, 귀신들은 사람들의 영혼 뿐 아니라 육신과 생활
을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히면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소리를 질러대는가 하면 불과 물
에 뛰어들고 돌로써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귀신들이 상전이 노예를 부리듯이 괴롭힙니다. 그러나 아
무리 흉악한 귀신이라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다 쫓겨나갔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
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질병으로 고통하는 수많은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주님의 옷가에 몰래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그 여자의 혈루증이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둘러보시면
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주
님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고 하셨습니다. 

이외에도 문둥병자, 소경, 앉은뱅이, 벙어리, 중풍병자 등을 고쳐주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셨습
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으며, 풍랑이는 바다를 향하
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도록 동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
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에 이르기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
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어려울지라도 주님께서는 능치 못하심
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마음에 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말
씀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
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지혜와 방법을 의
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혜롭고 능력 있다고 여기므로 구세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마음이 교만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저
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숨기시고 알지 못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
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
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
라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
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
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
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

복음을 전해 주어도 귀를 막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지 않고 ‘저들의 마음
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굳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스스로
를 의롭다고 내세우므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복음을 순순히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적으로 내세
울 것이 없는 것이 오히려 주님을 믿는 데 유리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못나고 미련하고 
약한 사람들은 내세울 것이 없는 그 조건으로 인해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봅니다. 어린아이
의 특징은, 부모나 선생님에게 의지하기를 잘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님에 비해서 자기들
의 부족함과 약함을 솔직히 시인하고 의지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이기도 합니
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때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하고 무능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크
신 능력으로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삶이 수고로우십니까?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하지 마시고 주님께 나아
가 맡기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가 제 부모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잠을 자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우
리 삶의 짐을 다 맡길 때 진정한 마음에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을 지은 성도는 말하기
를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
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고 했습니다. 젖 먹는 아기는 젖이 먹고 싶어서 자주 보채느라 마음에 평안
이 없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님을 온전히 믿고 삶의 모든 짐을 맡김으로 참 안식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음에 쉼을 얻으려면 성령의 계시를 받아 진리를 알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
독교의 진리는 우리가 열심히 탐구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를 닦아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으로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과 같이, 계시를 받아야 알 수 있습니
다. 계시란, 감추인 것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히셔서 하늘의 비밀
을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계시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첫째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
터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맡아주
시고 우리 마음에 쉼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것
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아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 져서 맡기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삶의 문제를 맡기지 못하는 것일까요? 믿음이 부족하
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이 자라지 않고 부족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이 지식
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한 ‘지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
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의 지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사모하
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의 신령한 지식에 부요한 성도님들이 되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가 마음에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
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할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아갈 때 의롭고 바르게 살아가게 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근
심 걱정이 감히 그 같은 사람의 마음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
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
품을 본받을 때 마음에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
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
셨는데, 마음이 가난한 것은 겸손한 것을 말하고,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땅은 지상의 땅이 아니라 
영원한 새 땅 곧 천국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천국을 누리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함으로 참 마음의 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즘 사람들은 자나깨나 돈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마음이 쉼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재물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과 쉼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삶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기고, 성령의 은혜를 힘
입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깊이 알아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
며 주님의 성품을 닮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마음에 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
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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