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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에서 만나자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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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서 만나자 (마 28:1~10)

I. 뒤집기

제 친구 목사의 아들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질문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시골길 밭뚝길 논뚝길을 걸어가는데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건 뭐야?" "콩 심는 거야." "저건 뭐야?" "고추지." "어 고추 심었구나. 저건 뭐야?" "벼 심는 거지." 공동 묘지를 보더니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었어." "어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이 철없는 아이의 말 한 마디에 섬광처럼 계시의 메시지가 지나갔습니다. '아 그렇구나. 죽은 사람은 땅에 묻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의 사람들은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 것이구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번 땅에 묻히면 영원히 음부의 권세에 갇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땅에 심는 것이구나. 그렇구나 우리는 부활하는 것이구나. 살아나는 것이구나. 새롭게 영원한 세계에 심겨지는 것이구나.' 할렐루야.

모든 인생은 모두 무덤으로 끝이나나 우리 기독교는 빈무덤 부활의 종교입니다. 

일전 중국 베이찡 천안문 광장에 갔다가 모택동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썩지않게 방부제로 처리하고 항상 무덤 안을 섭씨 16도로 유지하여 지금도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누워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혹 우리처럼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이찡에서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한번 다녀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모스코바에 가면 레닌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북한의 금수산 기념 궁전에 가면 김일성의 무덤이 그렇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무덤의 크기로 생전의 권세와 위용을 자랑하곤 합니다.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 진시황릉이 그렇습니다. 여산릉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은 작은 산만 하다고 합니다. 무덤 봉분 아래서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는데만 15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중국에 어떤 지하 무덤을 구경하는데 두 시간을 돌아보고도 다 보지 못하고, 다리가 아파 그냥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아무리 큰 영광을 누렸어도 죽음과 무덤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절은 죽음이 패하고 생명이 승리한 날입니다. 마귀는 패하고 예수께서 승리하신 날입니다. 절망이 패하고 부활의 소망이 승리한 날입니다. 

저는 운동을 잘 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퍽 좋아합니다. 여러 운동들 가운데 한 가지는 어릴 때 기초 훈련도 받아 본 적이 있고 또 짧은 기간이기는 합니다만 선수 생활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믿지 않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제가 씨름선수입니다. 요즘이야 몸무게를 달고 체급을 나누어서 씨름을 합니다만 그 때는 체급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순서를 짜서 붙어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요즘도 제 몸이 거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백이면 백, 모두 나보다 몸집이 큰 사람하고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이 가장 통쾌하게 이길 수 있는 기술이 한가지 있습니다. 큰 사람 밑에 깔려 들어가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혹은 넘어지는 순간에 몸을 뒤틀어서 상대와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소위 "대치기" 혹은 "뒤집기"라고 하고 기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과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대한 통나무 하나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잘려지고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믿음이 죽어있는 성도들은 세파속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살아있는 성도들은 환경을 역류합니다. 시류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모든 악조건을 뒤집는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고 하면 뒤집기의 명수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듯 패배하는 듯 하나 상황을 반전시키고 역전시키는 능력이 있더란 말이죠. 이 시간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 가고 기쁨을 앗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불행해 하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실패와 좌절과 절망의 그늘에서 한숨을 쉬며 살아가십니까? 

우리에겐 역전의 능력이 있습니다. 역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뒤집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안에서는 불행이 행복으로, 불가능이 기적으로, 지옥이 천국으로, 죽음이 부활로 뒤집어 집니다. 역사상 최대의 뒤집기가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일 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시간동안 실패가 있었습니까? 상처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반드시 부활합니다. 우리에겐 부활의 감격이 있습니다. 역전의 능력이 있습니다. 실패를 뒤집어 승리로 상처를 바꾸어 축복으로 살아 가십시요.

역전승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게임이 있습니다. 1978년 이든가요. 주일 낮 예배가 막 끝나는 시간이었습니다. 홍수환 선수와 카라스키야 챔피언이 권투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로 권투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사택으로 뛰어 들어 설 때는 이미 홍수환 선수가 세 번이나 다운이 되어 패식이 짙은 시간이었습니다. 또 한번 다운! 이제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벌떡 일어난 홍선수 -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카라스키야를 사정없이 두들겨 K.O. 시켰습니다. 소위 사전오기의 신화입니다. 그는 지금 온누리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II. 갈릴리에서 만나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무덤 속에 계셨던 사흘동안 "예수가 K.O.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번져갔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과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죽음에게 역전승 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뒤집기의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K.O.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께서 죽음과 음부의 권세에 역전승" 이 얼마나 멋진 소식이며 희망찬 소식이었습니까?

이날 아침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이미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줄 알고 시체에 바르기 위해 가져갔던 향유병을 무릎 앞에 놓고 절망과 낙심, 어둠과 슬픔에 빠져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게임은 이미 승리로 끝이 났는데, 한편에서는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늘 패배의 그늘에서 슬피 울고만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옆에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의 시신을 못 보았습니까? 당신이 어디로 옮긴 것은 아닙니까?" 
온몸에 광채가 나는 이 사람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갈릴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주께서 갈릴리로 먼저 갈 것이니 거기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놀란 여인들은 정신 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곳 저곳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내 천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이 말씀은 이미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시기전 수차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32에 보면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III. 왜? ① - 완전한 절망이 있는 곳

갈릴리는 유대나라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지방이었습니다. 남북의 길이는 96km 동서의 길이는 48km에 달하는 지역으로 갈릴리 바다와 요단 계곡이 있고 우거진 숲들을 가지고 있는 조용한 촌락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가신 곳은 바로 그곳 갈릴리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원수라도 갚기 위해 빌라도 법정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던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의 광채로 빛나는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변화산 등반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으로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부활의 예수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시며 "갈릴리 거기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죽음의 공포에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정복하고 한자리 할 것을 기대했던 제자들의 소망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3년이나 그토록 따라 다녔던 고생은 헛수고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가 왕국을 얻게 되면 오른편에서 한자리 해보겠다던 그들의 꿈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왠만하면 3일만에 부활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믿어 보며 3일만이라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볼만도 한데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자 공동체 마저 완전 K.O.패 당한 그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고향을 찾았다면 모두 갈릴리 이곳 저곳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자살한 가롯 유다외 11명의 제자들의 한숨짓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방 도처에서 절망, 낙망, 한숨, 좌절의 소식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부활의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의 그 순간은 예수께서 오시는 순간이요, 좌절의 장소는 예수께서 오시는 공간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그곳에 제일 먼저 오셨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상처가 있는 곳, 실패가 있는 곳, 절망이 있는 곳, 그곳에 승리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진 제자들을 일으켜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IV. 왜? ② - 첫사랑이 있는 곳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 아니라, 사마리아나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둘째,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첫사랑이 어려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이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주로 이곳을 무대 삼아 가르치시기도 하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백부장의 신하를 고쳤고, 갈릴리 언덕에 올라 소위 산상보훈으로 알려진 행복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빈그물 들고 낙심 중에 있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 오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이 바로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주님은 이곳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위를 걸어가셨고, 갈릴리 강변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첫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세상의 헛된 욕망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의 능력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재출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과연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새출발이 가능했습니다. 

갈릴리! 그곳은 -
첫사랑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믿음의 새출발을 하는 곳입니다.
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
흩어진 공동체를 재건하는 곳입니다.
절망을 바꾸어 희망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에 머물지 아니하고 새 출발을 했던 사람들, 사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으나 실패하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40년을 살던 중 80세에 가시떨기 앞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요. 니느웨를 회개시키라는 사명을 받고도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여 풍랑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기도하다가 두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고 천사를 보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첫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갈릴리에서 사명을 받았으나 모두 도망갑니다. 다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 사랑 확인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 이곳 갈릴리에서 빈 그물 들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다가 요한복음 21장 - 이곳 갈릴리에서 다시 빈 그물 들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예수님 그 사랑 확인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그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사랑이 스며있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 제자들과 이 첫사랑을 회복하시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V. 왜? ③ - 회개가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새롭게 만나주신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사해바다는 들어가는 물만 있지 나오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흘러 들어가는 물이 있고 오염되고 때묻은 물, 빠져나가는 물이 있습니다.

갈릴리 - 그곳은 은혜가 있고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팔았습니다. 이곳에서 시기했고 다투었고 배신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했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제자로서 새롭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잘못도 있을 수 있고 허물과 부족이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배신했던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겁니다.

회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회개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자는 회개를 못합니다. 비겁한 자는 언제나 변명하고 핑계하고 위장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언도한 빌라도 기념산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 산에서 빌라도의 손 씻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내 잘못이 아니다" 빌라도의 변명소리도 들린다고 합니다. 비 오는 날 산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이런 소리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회개하기 싫은 사람은 예루살렘거리에 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갈릴리로 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이제 용서하고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돌아오면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이미 사랑하시기에 먼저 갈릴리로 달려가신 것입니다. 갈릴리 - 거기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계셨습니다.

러시아 한 공작이 지방법원의 배심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피고인 가운데 한 윤락녀가 잡혀들어 왔습니다. 그 여인은 창녀촌에서 윤락행위를 하다가 어느 손님에게 독약을 타 먹이고 손님의 귀중품과 돈을 훔쳤다는 죄목입니다. 배심원으로 있던 이 공작은 피고인으로 심문을 받고있던 이 창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랍니다.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양심이 비수에 찔린 충격을 받습니다. 

7년 전 일이 생각납니다. 이 공작은 어린 하녀 아이를 유혹하여 임신시키고 내팽개친 일이 있는데 그 죄인이 바로 그 하녀였던 것이지요. 그때부터 하녀 아이는 집에서 쫓겨나 배신감으로 방황하다가 결국 창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 또한 이 여인은 여관집 주인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극의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시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려주세요" 애처로운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선고받습니다.

공작은 양심의 무서운 가책을 받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가 있다" - 창녀를 돕기로 작정합니다. 추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얼어붙은 땅 시베리아를 찾아갑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삼등 열차를 타고 갑니다. 공작의 연민은, 정은 점차 사랑으로 바뀌고 결혼하자고 프로포즈까지 합니다. 이 여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가산까지 모두 탕진합니다. 온갖 오해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어느날 드디어 이 여인이 형무소에서 나옵니다. 형무소에서 나온 이 여인은 공작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감방에서 만난 청년 시몬슨의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떠나갑니다. 그 뒷모습은 묘한 배신감으로 지켜보고 있는 공작의 이름은 네플류도르. 그 여인은 카츄샤. 이 소설은 바로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입니다.

톨스토이는 주인공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최선을 다해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그 모습을 인간의 "부활"이라고 본 것입니다. 회개는 부활을 가져다 줍니다. 새로운 출발을 가져다 줍니다. 
Ⅵ. 왜? ④ - 사명이 있는 곳

왜 -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갈릴리 - 이곳에서 소중한 교훈들을 들었고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성장했으나 이곳 - 갈릴리에서 구원 역사, 전도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이곳 저곳 도처에서 예수님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분의 교훈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분의 전도의 열정 - 그분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던가?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사명의 자리로 모이라는 것이지요. 인간구원의 본거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분주하고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루 하루 부딪히는 실망과 초조 때문에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속된 일들에 휩싸여 사명의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일에 파묻혀 사람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져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갈릴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책임회피형 장소가 아니라 다시 전쟁터로 나가기 위해 점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갈릴리는 사명의 땅입니다. 부활절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이 날은 비전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Ⅶ. 맺으며

말씀을 맺습니다. 

한신대 학장으로 계셨던 김정준 목사님은 그의 젊은날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르게 하루가 다르게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저마다의 얼굴에는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절망과 낙심과 한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준 목사님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선생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하여 펜을 들고 써 내려간 시가 「내가 죽는 날」입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21장 22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또한 나의 묘패에는 이렇게 새겨주오. 단 한마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소.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이리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소.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 나라 올라가는 내 걸음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소.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에 광채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소.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오히려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 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거기서만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갈릴리에서 만난 성도들,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갈릴리 이곳 저곳에 숨어 있던 제자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세상으로 달려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우리 함께 갈릴리로 가십시다. 당신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이 절망의 땅이라 할지라도 갈릴리에서 만난 주님은 당신의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싸늘한 심정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랑을 회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격함으로 살아가십시다.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당신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랑의 땅으로 가십시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 주십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삶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명의 땅으로 가십시다. 비전의 땅으로 가십시다. 거기서 주님 만나고 새로운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희망의 땅, 사랑의 땅, 비전의 땅에서 만나자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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