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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을 아는 신앙인 (롬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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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아는 신앙인 (롬 1:1~4)
 
저는 우리나라가 복음으로 충만하여, 잘 사는 나라,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복음이 충만하기보다, 이단들이 너무 날뛰고 있다. 이단들이 좋은 이름은 모두 다 사용하면서, 국회에 진출하려고 한다. 또 교회 안에 슬그머니 들어와, 교회를 무너뜨리려 한다.

이단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복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란다. 요금 신문을 보면, 점쟁이들과 무당들에 대한 광고가 많다. 스포츠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간지에까지 광고들이 실리고 있다. 점쟁이들과 무당들이 왜 그렇게 광고를 많이 하는가? 많은 사람이 찾기 때문이다.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인생을 상담하는가? 그 이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누군가의 인도함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고, 교회의 약함을 공격한다. 사실 많은 부분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맞는 부분은 반성하고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러나 틀린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격분할 필요가 없다. 대적이 나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한 적보다 더 큰 동기부여는 없다”

고대 지중해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패권을 두고, 경합을 벌렸다. 냉전 같은 싸움이 500년 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다. 한니발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로마는,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불태우자는 의견으로 들끓었다.

로마는 관용의 국가이다. 적을 초토화시키는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한사코, 카르타고를 불태우고자 했다. 이때 스키피오 장군은 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분노의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스키피오는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며 울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키피오의 눈물이다. 그가 왜 울었는가? 불타는 카르타고에서 ‘불타는 로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르타고로 인해 경거망동하지 않고, 항상 대비하는 자세로 있었다. 그런데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리자, 긴장이 풀리고 내분이 일어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올바른 진리가 선포되지 않으니까,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찾아간다. 이러한 대적에 대하여,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진리를 올바로 알고 선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올바른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복음이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1. 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2-3).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기쁜 소식이다. 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기쁜 소식인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말씀들은, ‘죄에서 구원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고(창3:15), 베들레헴에 태어나신다고 약속했다(미5:2).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고(사7:14),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렘23:5-6), 은30에 팔리고(슥11:12),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고(사53:9). 무덤에 계속 있지 않고, 썩지 않게 부활한다(시16:10). 특별히 ‘고난당하는 종’(사53장)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예언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하셨는데, 성경 말씀대로 오셔서, 그 예언을 이루시고 성취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하며 따라갈 수 있다. 지금도 자신이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해 미리 예언해 놓은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성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약속은, 정확하게 모두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힘이 없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놈들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돌아가셨다. 그래서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다. 

이단들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만들지만,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다. 예수님은 다른 길을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다.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습으로, 천사의 모습으로도 보내지 않으셨다. 인간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살다 가셨다. 인간이 되신 이유는,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기쁜 소식을 복음이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베소라(ה󰙜וֹשׂ󰔶)라고 한다. ‘아름다운 소식’(사40:9, 61:1), ‘기쁨의 소식’(사41:27)이다. 이 말은 ר󰙴󰔯(살, 몸)이 될 때, 복음(ה󰙜וֹשׂ󰔶)이 된다(요1:14).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약속이다. 가장 기쁜 소식은,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죄를 담당하시어,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다(눅4:18-19). 다른 복음은 없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임을 믿으시기 바란다(요일4:3).


2.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셨다(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나.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인간이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삶에는 구원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존재하셨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말은, 믿지 못한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적과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철학적, 윤리적으로는 본받을 만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소망이 있다. 인간 되신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의 삶에는 역전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눈물을 아시고, 고통을 아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고통과 눈물, 외로움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 구하면, 죽음을 이기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부활을 주신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슬픈가? 고통이 있는가? 눈물이 있나? 그것은 당신의 업보다. 당신이 전생에 죄가 커서 그렇다. 그러니 그냥 감당하라고 한다. 

가난도 고통도 모두다 당신의 업보니까, 그냥 적응하고 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눈물이 있느냐? 고통이 있느냐? 괴로움이 있느냐? 이런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구하여, 역전하는 인생이 되어서, 영향력을 발하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의 인생은 소망이 있고, 역전할 수도 있다. 삶 가운데 역전을 원하시고, 이적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믿으시기 바란다. 삶에서 이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 되신 예수님만 믿으면, 역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적, 윤리적으로 영향력을 발했던 예수님만 믿으면, 부활의 역사는 없다. 그러므로 죽음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안에 슬픔이 있고, 근심이 있고, 눈물이 있나요? 그것이 역전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란다. 내 삶 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시기 바란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을 경험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너의 아픔을 안다고 하신다.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도와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구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능력을 믿고,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4).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전체를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만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만 고백한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만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복음과 연결되고, 예수님과 연결된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 핍박자요, 훼방자였다. 하지만 복음과 연결되는 순간, 하나님의 사도로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든, 복음과 연결될 때, 삶의 변화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연결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삶으로 체험했다는 말이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말뿐인 복음이 아니다. 미사여구로서의 복음이 아니다. 이 복음은 나를 변화시킨 복음이요, 지금도 내 속에서 역사하는 복음이요, 내가 생명을 걸고 확신하는 복음이라는 말이다.

내가 체험한 복음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맥빠진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떤 제자는 선지자라고 대답하고, 어떤 제자는 엘리야라고 하며, 여러 가지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주장은 그만하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 자신의 고백을 원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칭찬을 듣는다.

예수님은 지금도 다른 사람들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을 듣기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고백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더라” “누가 그러는데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고 하더라” 이것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증인이다. 증인들은 본 것을 증거 한다. “예수님은 능력이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라고 말하는, 내 신앙, 내 간증이 있어야 한다.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복음, 내가 체험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그것이 능력의 원천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인간되신 예수님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 되어야, 그때 거기에 자유와 평안이 있고, 은혜가 있고, 진정한 역전과 변화가 있다.

신문에 보도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15만 명이나 감소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 교회가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을 돕는 것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봉사의 70% 이상은, 교회에서 하고 있다. 다만 교회가 홍보하지 않을 뿐이다. 사회에서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할 때, 보통 3가지 타락을 지적한다. 목회자들과 교회와 성도들이 타락했다고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10만 명이 넘는 목사들 가운데, 분명히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로서 합당하지 못한 모습도 보이는 일들도 있다. 성도들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추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썩은 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썩었는가?

구약시대를 보면, 선지자들도 썩었고, 성전도 썩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썩었다. 그런데 하나님도 썩었는가? 그렇지 않다. 중세시대를 보면, 성직자도 썩었고, 교회들도 썩었고, 백성들도 모두 썩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도 썩었는가? 그렇지 않았으며, 그럴 수도 없다.

만약 교회가 다 썩어서 냄새가 나고, 그리스도인들이 다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고, 주님이 되어야 삶에 변화가 온다.
 

결론입니다. 

이단들이 날 뛰고 있을 때, 복음을 분명하게 알아, 넘어가지 말고, 저들을 건져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나와 연결시켜야 한다.

그럴 때 역사가 일어난다. 슬픔의 옷이 변하여, 찬송의 옷이 된다.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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