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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 그 놀라운 힘 (요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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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 그 놀라운 힘 (요 20:19~29)

   인간 관계에 있어서 만남이란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관계라는 표현 자체가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배우는 학생은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지식 전달 능력이 뛰어난 스승보다는 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스승도 학생을 잘 만나야 합니다. 머리 좋은 것만 믿고 건방진 학생보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을 만나야 가르칠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만남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기르는 보람이 있을 것이고 자식도 부모를 잘 만나야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히브리 노예의 해방을 이끌어 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그는 먼저 바로의 딸을 만남으로써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위대한 출애굽 역사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초대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때까지 그토록 열심히 핍박하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말 그대로 죽도록 충성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스승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들킬 경우 자기들도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더라고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을 굳게 닫고 숨어 있던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아울러 그 예수가 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과연 그 후 그들은 담대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 땅에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구나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변합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 옛날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담대하게 바뀝니다. 시편 118편 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주님이 함께하시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시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옛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됩니다.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는 약간 이상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했던 말들을 잠시 살펴봅시다. 먼저 요한복음 11장 16절 말씀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좀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죽으러 가자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5절 말씀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모든 일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스승인 예수의 인격과 정체를 의심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모든 일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성격 때문에 그는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함께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 바로 그 의심 많은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도마를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과의 그 만남을 통해서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또한 회의적인 사람 도마가 완전히 고침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다만 그 때 그 제자들에게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변화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았으면 보내신 분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신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다 빚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빚진 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빚을 갚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빚진 자와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대상이 그 누구든지 상관하지 말고 전해야 하며 그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개의치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죽어가는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일찍이 주님은 자신을 미워하여 죽이려는 사람들조차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와 같은 그들에게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고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고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그 모습을 본받아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 않습니까? 갈기갈기 찢어진 교회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신뢰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과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보다는 이 세상이 교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대나 희망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이기 때문에 허물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친구는 제가 뒤늦게라도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기쁘고 또 지금의 제 모습이 아주 평안한 것도 참 부럽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주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그 까닭을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아니나다를까 지나치게 열성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에 몹시 좋지 못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 파키스탄에 진도 7.0이 넘는 강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완전히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그 상황에서 한국에서 온 선교 팀이 목숨을 걸고 현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재민들에게 가지고 간 음식을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을 나눠 주기에 앞서 은근히 기독교 의식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그 친구는 무지하게 화가 났다고 합니다. 이왕이면 좀 더 지혜롭게 선교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 팀의 태도에 대해서 지금 제가 뭐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도 목숨을 걸고 거기 간 것이니까... 다만 그 친구가 그 때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은 금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7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나 하나의 구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성령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을 늘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산 소망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빚진 자와 같은 심정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널리 전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어린 양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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