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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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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주 추운 겨울날 한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고 소주 두 잔을 먹고 한남대교에 나아갔습니다. 그는 뇌수술을 받고 이혼 등 대형 사건을 다섯 차례나 겪고 나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답니다. 한강으로 막 뛰어 내리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지금 뛰어내리면 얼어 죽어요 좀 기다렸다 따뜻한 봄이 되면 뛰어 내려요” 라고 말을 했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피식 웃었습니다. 

뛰어내려 죽으려는 사람에게 지금 뛰어내리면 얼어 죽으니까 따듯한 봄날 까지 기다렸다가 뛰어내리라는 그 말에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웃음으로 그의 마음에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살을 포기하고 다시 일어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주)한중 엔터테인먼트 진철호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한순간의 웃음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갑고 어두운 세상에 웃음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속의 칙칙하고 무거운 어두움을 깨고 부활하심은 바로 무겁과 어두운 인생들에게 웃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류가 죄에 빠져 신음하게 된 후로 하나님은 인류를 웃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웃으며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인류가 웃으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히 웃기는 일을 하고 계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7:1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창 18:10-1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폐경기가 지나서 아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100세 가까이된 할머니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니 .... 이것은 가히 코메디에 가까운 유머였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웃었습니다. 사라는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미있는 유머로 받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자기를 웃기려고 하시는 말씀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흐뭇해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야 웃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사라가 당황한 나머지 “아니오. 하나님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 보다는 당황하여 임기 응변식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안 웃었다고 말하는 사라에게 하나님이 창 18:15절에 보면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책망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웃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 귀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사라야 제발 웃어라” 그런데 자꾸 안 웃었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아니야 너 웃었잖아 속으로 ...”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라의 거짓말을 문제 삼으셨다면 그 다음에 책망 같은 다른 말씀이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의 말을 거짓말로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라에게 유머 감각을 발휘하셔서 사라의 웃음을 해학적으로 받으시고 “그래 이젠 내가 너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라의 유머스런 대화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1년 후에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창 21:3절을 보면 낳은 그 아이를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이란 말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웃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 21:6절을 보면 사라가 이삭이라는 이름을 짓고 사라는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웃게 하시는데 우리가 웃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피터 마샬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향해 웃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웃음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웃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계속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세리였으며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그가 사는 동네를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 몰려와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가 잘 안들려서 그런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설교했습니다.
"그때 니고데모가 보니까 길가에 커다란 뽕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쯤 되자 성도들이 "와"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당황하지 않고 순간 적인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여러분 그때 삭개오가 나타나서 뽕나무에 앉아있는 니고데모를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거긴 내자린데 왜 네가 거기 있냐? 빨리 내려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웃지 않으시는 분들은 지금 정신을 딴데 두고 있는 분들입니다. 아니면 정서 불안 내지는 우울증 초기 증세 이던지요?

목사 한분이 천국에 갔는데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일일이 맞이하면서 팔로 끌어 안기까지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계시고 악수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속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기회가 되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사람을 차별하십니까? 누구는 일어서서 맞이하고 누구는 앉아서 맞이하시는 건 무슨 이유신가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 내가 일어서면 이 자리에 앉으려고 그러지....” 

얼마 전에 홍콩의 한 항공사 승무원들은 회사측과 임금 협상에 난항을 겪자 회사에 항의하기 위해 "웃음 짓는 서비스를 파업하겠다"고 협박성 경고를 했다고 합니다. 
깍듯한 인사와 따뜻한 미소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접촉하는 것이 항공사 승무원들의 가장 큰 임무인데 '웃지 않겠다'면 서비스를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항공사의 승무원들이 웃음을 파업하고 차갑고 무뚝뚝하게 손님을 대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다. 그것도 수천 미터 공중을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들을 대한다면 얼마나 으시시 하겠습니까? 

“성공하려면 웃는 연습부터 하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는 나를 웃게 하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았을 때에 코메디의 황제로 불렸던 이 주일 씨는 그 자신이 남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서 남을 웃기고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했지만 그 자신은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남을 웃기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나중에 폐암 말기의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웃기는 연기를 통해 그가 행복한 것 같고 늘 웃음과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우리들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는 외아들을 잃은 슬픈 아픔을 안고 살면서도 남을 웃겨야 하는 그의 인생의 불행한 모습 속에서 얼마나 맘속으로 울어야 했을까요?

겉으로는 웃음이 있었지만 속에는 눈물로 가득 찬 삶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는 폐암 말기로 투병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남들 눈에는 자신이 행복하게 비쳐졌는지 몰라도 제게는 즐거웠던 시절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슬프고 외로웠던 기억이 더 많았다"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인생들이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척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취미나 술과 도박에 섹스에 빠져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빠지면 빠질수록 인간은 더욱 허무해 집니다. 바로 이런 인생들에게 오늘 사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21:6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웃게 하셔야 참된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들을 주셨기에 그 아들 이삭을 통해서 웃음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100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 즉 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웃기신 것입니다. 행복한 웃음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만 웃게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라의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웃게 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웃게 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아들이 없던 가정에 이삭을 낳게 하심으로 행복한 웃음을 주셨고 그 이삭의 후손을 통해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 왕의 가계를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웃음을 웃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진정한 웃음을 선물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행 3:19절에 보면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분 좋은 일 즉 웃을 일 생긴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의 역사에 관하여 우리에게 기쁨의 웃음을 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 126:1-5까지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구원이 임하는 그 때에 우리가 한 바탕 웃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행복한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웃음은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 그것이 얼굴 모습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웃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웃고 살 수 있습니다. 사라처럼 하나님이 웃게 하시는데 인상 쓰고 살 필요가 있습니까?

얼굴을 펴고 웃어봅시다. 

성공 연구가 정태기 박사는 “사람이 박장대소하는 웃음 1회에 400만원의 가치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온 계산인지는 모르지만 잠언 17:22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라고 한 것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건강을 위해 수십만원 수백만원 짜리 보약을 먹지 말고 

성령의 은혜를 받아 웃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에서 슬픔의 빛을 제거하고 웃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 14: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으로 웃음이 회복 되시를 바랍니다.
진정한 웃음의 회복 이것이 궁극적인 인류 구원의 목표인 것입니다. 계 21:4절에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라에게 행복한 웃음을 웃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행복한 웃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생로병사의 비밀” 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의 “웃음”에 관하여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해본 결과 15초 동안 웃는 것은 달리기로 9분을 뛴 것 같은 운동효과와 건강 증진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억지로 웃는 표정만 지어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분에 의해서 웃음을 웃지만 우리의 뇌는 기분과 상관없이 웃는 표정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뇌에는 웃는 입 모양만을 식별하는 전용 시스템이 되어 있는데 사람이 웃을 때 사용되는 얼굴 근육이 그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도 일부러 라도 웃는 입 모양만 만들어지면 뇌에서는 실제로 웃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지으면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가 웃는 것을 좋아하시는가 하는 것을 인간 창조의 섭리 속에 담아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른 제자들을 다 제쳐두고 왜 먼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도 여자들의 입이 싸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빨리 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누구의 입을 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빨리 그리고 온 세상에 전파 되어야 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웃게 만들어야 합니다. 

인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서양인들은 자녀를 위한 기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는 구절을 빼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항상 진지하되 결코 너무 진지하게 되지 않도록 충분한 유머를 갖게 하옵소서” 

카네기의 <웃음예찬>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음은 가정에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친구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는 소망이 되고 우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며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런데 웃음은 살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으며 도둑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쥐 한 마리가 고양이에게 쫓기고 쫓겨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쥐가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에라 모르겠다 고양이 흉내나 한번 내보자” 그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야오옹” 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쫓아가던 고양이는 다 잡아먹게 된 쥐새끼가 갑자기 소리를 내는데 그만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저게 나를 웃겨...” 
껄껄 웃던 고양이가 이 정도로 재치 있는 쥐 같으면 살려 둘 만도 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 그냥 살려주기로 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쥐가 집으로 들어서면서 한숨을 푹 내 쉬고는 새끼 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새끼 쥐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어미 쥐는 오늘 있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애들아, 아무리 못해도 외국어 한 마디 쯤은 할 줄 알아야 하겠더라” 

그렇습니다. 
웃음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열어주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 이제부터 웃음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행복하게 웃으며 삽시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행복해 집니다. 
욥8:21-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사라를 웃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웃음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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