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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 (살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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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 (살전 5:1~11)

이 땅에 많은 장애우들이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장애우가 되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의 장애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기부 천사로 잘 알려진 가수 김장훈씨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뛰고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눈앞이 흐려지고 진땀이 흐르면서, 이러다 갑작스럽게 죽는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을 하지만 그러나 몇 분 후 그런 증상은 깨끗이 사라지는 그런데 이런 증세가 계속해서 수시로 일어나면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일손이 잡히지 않아 계속해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증세가 바로 공황 장애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서 보면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의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건강하게 살다가 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 안에서의 관심은 언제 우리가 세상을 떠날 것인가 보다는 오히려 언제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이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어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 난 다음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따라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지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어때야 하는지를 오늘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소설에 보면 어떤 도둑이 언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무슨 물건을 훔쳐갈 것이라고 미리 알리고는 그 알려준 그대로 물건을 훔쳐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야 나 언제 너희 집에 가서 무슨 물건을 훔쳐갈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도둑이 어디 있나요? 뭐 우리네 서민들이야 실상 도둑이 든다고 해도 훔쳐갈 만한 것들이 없죠. 하지만 집 안에 귀한 보화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제 도둑이 들지 몰라서 여러 가지 도둑을 막기 위한 장비들을 설치해 좋기도 하고 사나운 개도 기르고 뭐 경비원도 두고 하지만 그래도 열 명의 파수꾼이 한 명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고 하지 않아요? 그것은 도둑이 언제 올지 어떤 방법으로 숨어들어올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죠. 그걸 안다면 도둑맞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건 주님이 오실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를 안다면 하늘나라 가기가 정말 쉬울 거 같아요. 아니 주님이 오시기 전에 내가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날을 알 수만 있다면 뭐 실컷 못된 짓을 하다가 십자가 위의 강도처럼 그때 가서 회개하고 용서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고 뭐 그렇게 힘들게 살 이유도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아니죠.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믿음 안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요. 지난 번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하기 위해서 갔다가 텔레반에 납치가 되었던 분들만 하더라도 총을 들이대고 죽기 싫으면 회교로 전향하라고 협박을 했다지 않습니까? 그분들 끝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킨 것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어요. 물론 그들 가운데 죽은 분도 두 분이나 계셔서 우리 마음이 참으로 아프지만요. 어쨌든 그분들 거기 가서 그렇게 납치되어 죽을 고생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거기 그 시간에 갔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고 하죠. 

그런데도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점쟁이들을 찾아가곤 해요. 그런데 정말 우리 앞길을 알 수가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길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요. 그렇게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여 주셨단 말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인지를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궁금해 하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그날과 그때는 아버지 한분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는 아들조차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아들 되신 예수님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어느 때 어느 장소로 오신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이미 네 번이나 언제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한 번도 맞지를 않았어요. 그러자 이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는데 아직 그 수가 차지를 않아서 몸을 감추고 계신다. 아니 그럴 바에야 뭐 하러 세상에 오셔서 몸을 감추고 있겠어요? 차라리 그냥 하늘에 계시면서 때가 차기를 기다리시지. 그런데도 거기 속아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1992년 다미 선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해 10월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날짜와 시간까지 예고를 해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과 그때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겁니다. 도둑이 언제 오는지 모르듯 주의 날은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 바울 사도가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 가운데도 임신한 여자 분이 계십니다마는 오늘날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출산 예정일이라고 해서 어느 날 아이를 낳게 될 것을 미리 다 계산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계산하고 있는 바로 그날 아이를 꼭 낳게 되던가요? 아니잖아요. 아직은 며칠 더 남았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닥쳐서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가게 되잖아요. 어떤 때는 반대로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아이가 나올 생각을 안 하죠. 그럴 때는 얼마나 불안해합니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배 아프기만을 기다리면서 혹시 이러다가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물론 속 편하게 미리 가서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죠. 하지만 주님의 날은 우리 마음대로 앞으로 당기고 뒤로 늦추고 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그날이 언제인지도 몰라요. 단지 성경은 그날이 도둑 같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야 말로 참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뭐 세상 종말이 온다고 저렇게 떠들 이유가 없지 않냐? 하지만 정신 나간 사람들은 바로 그들입니다. 왜 그래요?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날이 도둑 같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요. 그 주님의 날이 도둑 같이 이르게 되면 그때 가서야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게 될 겁니다. 마치 노아가 120년 동안 세상에 홍수가 나서 물이 차올라 온 세상이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저 미친놈 미친 소리 하고 있네 하지 않았겠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홍수가 뭔 지도 모를 때 아녜요. 아니 홍수는커녕 비조차 오지 않을 땝니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어요. 단지 매일 같이 안개가 올라와서 땅을 촉촉이 적셨다고만 했죠. 그러니 노아의 하는 말이 정말 미친 소리로 들렸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날에 보니 미친 건 노아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었지만 말이죠. 결국 홍수 때 피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노아의 가족들뿐이었단 말입니다. 

그건 이 세상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이 땅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을 아무리 우리가 저들에게 이야기해도 그들의 귀에는 미친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그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겁니다. 내가 어리석었다고 왜 그때 내 이웃의 박장로가 말할 때 믿지 않았던가? 깁집사가 말할 때 그 말을 믿을 걸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으리, 버스 지나간 다음 손 흔드는 격이 아닙니까? 문제는 이렇게 땅을 치며 가슴을 두드리며 후회할 사람 가운데 우리 가족 우리 이웃이 포함돼 있다면 우리 가슴도 찢어질 듯 아프지 않겠어요? 그렇기에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힘써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기를 참 감사하게도 우리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 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죠. 그것은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라는 이 말씀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 우리들에게 도둑 같이 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둠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잘못될 수도 있죠. 실수 할 수도 있죠. 세상에 아무런 잘못도 실수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의인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더니 단 하나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문제는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지만 그냥 넘어진 채로 쓰러진 채로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힘써야 하는 겁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고 우리 모두 노래하죠?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거예요? 단지 돈만 많이 벌면 잘 사는 건가요? 그래서 좋은 집에 살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면 잘 사는 건가요? 그러면 행복한가요?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살아가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죠. 그뿐 아니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빛이요 낮이라는 말씀이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빛이 되신 예수님, 낮이 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어둠에 속하지 않는 거예요. 왜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도 강조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바로 말씀되신 분이기 때문이죠. 

요한복음 1장에 뭐라고 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또 계속해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을 때 사람들의 빛이 되신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 깨우쳐 말씀대로 살아가게 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죠. 우리가 정말 빛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된다고 했어요. 지난 시간에 뭐라고 말씀했죠?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했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다면 아무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져도 듣지를 못하니 어찌 주님을 영접할 수가 있단 말에요. 그래서 깨어서 정신 차려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말씀과 가깝습니까?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날마다 깨어서 기도하고 있나요? 앞에서 보았듯이 말씀은 곧 빛이죠. 그런데 말씀이 없다면 어찌 빛 가운데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럼 어두움이죠. 어두움에 있고서야 어찌 그날이 도둑 같이 임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어둠에 잠기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밤이 되면 어떻게 해요? 어둡기 때문에 불을 켜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불을 켜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려면 먼저 말씀을 읽어야죠? 말씀을 들어야죠? 무언가 건더기가 있어야 건질 수가 있지 건더기도 없이 맹물만 있다면 무얼 건질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예수님이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그 말씀을 가지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 심령에 불을 밝혀주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또한 깨어 기도하라는 거죠. 아무리 말씀을 많이 읽어도 주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건 세상없는 학자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이 그 충만하신 은혜와 진리로 나를 깨우쳐 주셔야만 내가 깨달을 수 있죠.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은혜가 되시고 진리가 되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고 나를 가르쳐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하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그 예수님이 지금 내 마음에 와 계신데 그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퍼하시겠느냔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아무리 내 마음을 두드리고 외쳐도 그 소리를 전혀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으로 남아 있지는 않느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못 듣죠?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정신 차리라고 했는데 정신 놓고 잠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어쩌다 교회에 나올 때나 한번이지 나머지는 전혀 상관도 없고 그저 정신 놓고 사느냐고 바쁘다 보니 피곤하고 지쳐서 깊이 잠들어만 있으니 그런 내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슬프고 답답하시겠느냔 말입니다. 그저 어둠 속에만 잠겨 있으니 앞이나 제대로 보입니까? 한 걸음을 걷기도 힘들잖아요. 뭐가 보이는 게 있어야죠. 빛이 없는데 그저 깜깜하기만 한데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깨어 정신 차리라는 겁니다. 불을 켜라는 겁니다. 말씀의 불을 켜세요. 기도의 불을 켜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세요. 

지금 우리의 마음이 마치 기름이 떨어져가는 등불처럼 가물가물하고 있지는 않나요? 말씀이 없는데 무엇으로 불을 켜겠어요. 기도하지 않는데 무슨 불이 일어나겠어요? 말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는 표적이 뭐에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는데 우리들에게 있는 표적이 뭡니까? 그저 새 방언을 말하는 것 하나뿐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하는 것은 단지 방언의 은사만 말씀하는 것이 아녜요. 새 방언이라는 것은 믿음의 말을 한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 비난의 말이 아닌 칭찬과 격려와 위로의 말, 기를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 이게 바로 새 방언이란 말에요. 그런데 과연 우리의 말이 이런가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새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겁니까? 예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에요. 그래서 내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워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사세요. 날마다 깨어 기도하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란 말입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말씀에 깨어 있고 기도에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고 내 마음에 오직 주님으로만 가득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합니까?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군인이나 경찰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탄조끼를 입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방탄조끼를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철모를 쓰듯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를 쓰러트리기 위한 공격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방탄조끼를 입으라는 하는데 이는 곧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믿지 말고 세상을 믿지 말고 사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무시하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다 지키세요. 오직 말씀대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세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네 믿음대로 되어라 네 믿은 대로 되어라 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지 못하면 역사도 없어요. 머리로 믿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거기에 내 논리, 내 생각을 들이대지 마세요.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더 정확한 줄로 믿으십시오. 그리고는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겁니다.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고 말하는 분이 계셔요. 왜 나만 그래야 되냐고 하는 분도 계셔요. 왜 그래야 하냐고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되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거기 무슨 이유가 있었어요?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 한 게 있나요? 없잖아요. 그저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어요.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어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어요. 그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할 이유에요. 거기에 뭐가 더 필요합니까?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그렇다면 나와 너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실 겁니다. 그럼 우리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어요. 심판밖에 없겠죠? 그래서 소망의 헬멧을 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해도 쉽지를 않아요. 그래서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로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피차 권면도 하고 덕을 세워나가라는 거예요. 여기 권면하라고 했지 상처 주라고 하지 않았어요. 비난하고 욕하고 성질부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덕이 안 된다면 권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바로잡아 준다는 뜻에요. 그러니까 바로 잡아주어야지 튀어 버리게 만들지 말아야 해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조근조근 말씀하시며 다시 세워주시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해야 그게 바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거죠. 

그런데 피차 하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나도 권면 받을 때도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도 자기는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죠. 그건 피차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말을 그 사람의 말로가 아닌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마음 상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피차 덕을 세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누가 바로 세울 수가 있죠?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역사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다툴 일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고 마지막 때 버려질 사람도 없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서 내 안에 은혜와 진리로 넘쳐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믿음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소망으로 가득한 나날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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