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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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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17)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에 길이라네"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곡에 붙인 고 주기철 목사님이 작사한 신앙고백적인 노래말입니다. 크리스챤의 노래말은 있지만 크리스챤들의 곡은 따로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뜻입니다. 

본문 13장 11-13절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시체는 성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성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랐다는 것과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등식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영문(營門) 밖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영문 밖을 한마디로 말하면 '탈 유대교'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문 밖은 부정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에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첫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일의 속죄 제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예수의 죽음이 대제사장적인 속죄사역의 성취입니다. 둘째 의미는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은 후에 백성들에 의해 배척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낡아빠진 유대교의 박제된 옛 언약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 언약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으로 나가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 그냥 가서는 안되고 그 능욕을 지고 가야된다는 의무적 조건이 붙습니다. 
능욕을 진다는 말은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우리도 같이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의 불충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교회운동의 사명입니다. 그 교회운동의 전부는 구령운동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하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믿음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말이 복잡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실천하기 어려워서다. 우리가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지만 이것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개념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여러 성경에서 거듭거듭 말하고 있듯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첫 번째 해야할 일은 전적 자기부인입니다. 철저히 자기를 파괴하는 데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말은 당시 십자가형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던 데서 나왔습니다.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형들을 목격했던 제자들에게 죽음의 상징인 자기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엄숙한 결의로서 마음속 깊이 새겨야 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형으로 모두 순교를 해서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중심 의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다양한 환경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름에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말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각자가 받은 은혜에 대한 보은행위가 행동화 될 때 오는 고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각자 자기에게 부여된 거룩한 책임과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각자 각자에게 자기 몫에 태인 다양한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입니다. 
우리 찬송가 365장에도 나와 있듯이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라고 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Ⅱ.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 제물이 되라 는 뜻입니다. 

1) 예수로 말미암은 찬미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디 아우투 )의 의미는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의 희생제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제물이 되어주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찬미의 제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운반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운반되는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장애물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온전히 운반되지 못하는 찬미는 그 제물이 사탄에 의해 도둑맞은 것입니다. 

2) 예수로 말미암은 물질적 봉사로서의 제물입니다. 
본문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1) 형제를 사랑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본문 13장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했습니다. 

(2) 손님을 대접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본문 13장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그들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을 예언했습니다(창 18:1-21). 
소라 땅 마노아 부부는 기묘자를 대접했습니다(삿 13:15-20). 

(3) 동정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본문 13장 3절에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4) 전도자를 위한 물질적 사례에서 나타납니다. 
본문 13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자들을 왜 이렇게 선대해야 합니까? 
① 전도자는 우리 영혼의 인도자이기 때문입니다. 
② 전도자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침에 있어서 자기가 무슨 계산할 자인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③ 전도자들의 사역을 즐거움으로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물은 희생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여러 제물들은 우리의 제물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이 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희생하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 그대로 더 좋은(더 나은 부활) 것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Ⅲ. 새 언약의 길로 가자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무죄한 아벨의 피를 대조시켰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옛 언약의 대표인 모세와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대조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죄한 아벨의 피는 저주와 연결되었습니다. 아벨의 피는 악인을 멸망시키고자 땅에서부터 복수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죄한 그리스도의 피는 저주가 아니라 이 피를 믿는 자들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죽이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살리는 새 언약의 법입니다. 

히브리서 8장 8절에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말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시겠다는 것이며 새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쫓겨난 영문은 거룩한 곳도 영광스러운 곳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신 영문 밖이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유대교의 헛된 계율에 묶여 있지 말고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7장 22절에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입니다.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8장 6절에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고 했습니다. 

1) 영원한 기업을 얻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기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기업은 바로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얻는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이 기업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의 길입니다. 

2) 새 언약의 일꾼의 길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에 대하여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이며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옛 언약은 피의 희생제사로 되지만 새 언약은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됩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바로 생명의 복음의 일꾼입니다. 의문의 일꾼 즉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일꾼이 아니라 영의 일꾼 즉 사람의 마음속에 실제로 적용하는 생명적 가르침의 일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누리게 하는 축복의 일꾼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곧 주님의 일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일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문 밖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문 안에 계시지 아니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계시는 영문 밖은 부정하고 더러운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영문 밖은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생명이 있고 그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영문 밖에 승리자의 상급이 있습니다. 영문 밖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체화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써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영문 밖에서 고난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주님이 계시는 영문 밖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는 불신의 영역이 영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이 영문 밖입니다. 영문 밖이냐? 영문 안이냐? 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표징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피조 세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고난과 함께 하는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문 안입니까? 영문 밖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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