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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갈릴리로 가자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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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로 가자 (마 28:1~10)

오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겨울은 매우 길고, 지루하고 몹시도 추웠는데, 이제 봄기운이 완연해지고 자연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살던 생명들이 봄을 맞이하면서 기지개 펴고 깨어나고 있습니다.  강물이 풀리고 들판에는 새들이 노래하고 산과 들에는 꽃이 피어나는 봄이 돌아왔습니다.   부활절은 기쁨의 축제요, 감격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음산한 무덤, 차디찬 주검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끝나나 싶었는데,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희망이 되셨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절망의 깊은 계곡에 묻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전3:11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땅에서 잘해야 80년, 90년이 되기 전에 거의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80년의 삶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도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생명의 형태와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지 생명이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영벌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영생을 사모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구한 것처럼,“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심정으로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은 어린이라고 하면 부활을 가장 좋아하고 즐거워 할 사람들은 우리 어른들이라고 생각 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영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구원받은 확신에 넘쳐야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여러 학생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지금 살아있는 분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한분만 말해봐요?”라고 했습니다.   “카터예요”  “부시예요”  여러 학생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학생 하나가 “예수님이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훌륭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은 “아니, 돌아가신 분 말고 살아계신 분만 말해보세요” “선생님, 예수님은 살아계세요,  영원히 살아계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신앙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1:17-18에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롬4:25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신 것은 우리의 범죄로 인함이었고, 다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고 끝났다고 하면 성자의 죽음,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죽음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위대한 죽음이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 공동체가 아니라 부활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었고,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빈무덤 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실패요, 좌절이지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는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유명한 판넨베르그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말해 기독교사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다.   특히 부활절 사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역사의 출발점을 이룬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동시에 그 신앙의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실질적인 근거는 빈무덤에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이 확증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였음도 인정되고, 부활은 장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든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바울이 이미 언급한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서15:14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수많은 예언,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예수님의 귀한 생애, 그의 사역 그 외에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평가, 수없는 증언도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고 하면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파하는 기독교도 헛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지만, 죽은 육체가 소생하였다거나 원기 회복되었다는 말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직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 청년이 죽어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에 우리 주님이 살리셨습니다.  죽었던 육체가 소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요,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지만 살아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다시 죽어야 하는 육체요, 전에 있던 육체가 소생한 것입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나 다시 죽어야 합니까?  그래 죽어야 한다.  그러면 왜 살리셨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늙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지만, 아직 썩지 않은 육신에 단지 생명이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입니다. 새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육적인 몸이 연장되었지만, 변화를 받아 영적인 몸으로 변하였습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죽어야 하는 몸이었으나, 죽지 아니할 몸으로, 신령한 몸이 되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15:53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은 부활을 설명하면서 “연속적인 전이”라는 말과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의 예수님이 변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알려 주는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가에 나타나셔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때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에 “평안하냐?”고 안부를 물으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신다”,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 여성들이 새벽같이 무덤에 찾아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려고 찾아갔습니다.  참으로 담대한 여성들입니다.  남자들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크랜필드’라는 학자는 “때때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전혀 소용없는 일도 하게끔 충동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주의 일에 앞장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사랑의 가치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만 합리적인 가치로 행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 신앙의 세계는 합리적인 행동만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는 합리적인 가치를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사랑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볼 때에 합리적인 가치를 따라 평가하고 대할 수 있어도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사랑의 가치를 따라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합리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에 참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갈릴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부활의 영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신학적인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였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신 곳입니다.    우리는 갈릴리 출신이 아니기에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전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 제자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는 곳, 넉넉한 관용과 여유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곳은 생명을 죽이는 곳이었으면 갈릴리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었습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라는 신앙의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감격, 감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갈릴리에서 다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다 받아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많습니까? 그래도 그 자존심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 목사부인이 되겠다고 나선 아내를 정말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 전도단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불렀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를 불렀습니다. 가버나움 세관에 앉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신 곳이었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꿈을 안고 자신의 열정을 바쳐 헌신하기로 다짐한 곳입니다.  어언 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보니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감으로 두려워 떨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다시 한번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롭게 재기하라고 하십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는 다 잊어버리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다시 한번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갈릴리에 만나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내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내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주셨습니다. 그들의 도망치던 나약한 모습도 다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도망친 사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 부끄럽고 누추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그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씻어주고 감싸줄 수 있는 크신 능력이십니다.  

갈릴리로 가자는 것은 이미 말씀으로 가르쳐준 대로 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눅24:6에서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4:8에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이미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기적보다도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갈릴리는 당시 소외되고, 이방인같이 여기던 곳입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무시하던 곳입니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땅, 실망과 좌절의 땅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안고 절망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를 정도로 무시하고 소외시키던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들고 소외당하고 열등의식에 빠져 있는 저 낮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28:16에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 주님은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부탁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도 신령한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거할 날을 사모하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시고, 말씀 중심으로 사시고 사명에 충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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